개강 단상
개강 단상
  • 정은(사범대학 교육학과)
  • 승인 2016.02.2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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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평생 마지막 학기가 될 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며 나름 비장하게 개강을 맞이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상당히 긴 시간동안 그러한 내 나름의 비장함은 뿌듯함과 웃음의 종강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어느 순간엔 정말로 그 학기가 마지막 학기가 되긴 했지만.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 버린 학기도 있었다. 돌아보니 그랬던 기억이 있다. 학생의 자리에서 겪었던 개강 기억들.

 한참이 지나, 나는 또 다시 매학기 개강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학생이 아닌 다른 자리에서 개강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무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 한 채 시작된 새로운 일상은 나를 무척 당혹스럽게 했다. 속에 가득 찬 것은 학생인데, 실제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니 강의실에서 서툴 수밖에 없었다. 행여나 학생들이 나의 이런 모습에 불편한 것은 아닌지(물론 그랬을 것이다.) 오만가지 걱정을 하며 한 학기 한 학기 살아온 것이 벌써 꽤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개강 첫 날인데’ 혹은 ‘서로 처음 만나는 시간인데’ 하는 마음으로 은근 학생들이 내게 먼저 따뜻하게 대해줄 것을 기대했던 적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헛웃음이 난다. 학생들도 똑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강, 개강일의 묘한 재미있는 긴장이라는 것을 참 나중에 알았다.

 “이제 곧 개강인데 기분이 어때요? 방학동안 뭐 했어요?” 이런 질문 앞에 쭈뼛 쭈뼛 거리는 학생들을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말 해줘!’ 하며 무언의 압력을 넣었던 적이 많았다. 왜 이런 질문을 아무 생각 없이 학생들에게 퍼부었었는지, 살짝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나 스스로에게 먼저 그 질문을 했어야 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는 개강 전에 이따금 자문해 보는데 올해의 경우를 보자면, 개강을 앞두고 나는 약간 달떠있고, 이미 매우 피곤하며, 다소 설렌다.

 O. Sacks라는 신경학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Awakenings>(‘사랑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보면, 스스로는 아무 능동적인 움직임을 할 수 없는 환자가 타인(심지어 다른 사물)과의 접촉만으로 움직이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환자의 그런 변화에 대해 병원 관계자 모두 무관심하지만 유독 한 의사는 다르게 설명한다. 그 환자들이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물(물건)의 의지를 빌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그 장면이 참 인상 깊었고, 그 후 나 또한 얼마나 많이 또 자주 타인이나 특정 물건의 의지(물건의 의지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에 기대어 생활하고 있는지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사소한 예로,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정말 하기 싫을 때, 때마침 그 일을 하려는(하고 싶어하는) 누군가를 발견하면 옳거니 하고 자기도 덩달아 그 일을 시작하게 되곤 한다. 어쩌다 마음에 쏙 드는 옷이 생겼을 때, 혹은 신발을 샀을 때 ‘야 멋진데, 나 오늘 한 번 나가줘야 하지 않나!’ 하며 외출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이처럼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매우 자주 타인(가끔 물건)의 의지를 빌려 살아간다.

 언젠가부터 나는 별 준비 없이 살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 이 영화를 떠올린다. 이제 개강이 꼭 열흘 남았다. 개강에 담긴 ‘시작’이라는 의지에 기꺼이 내 마음을 얹으며, 이 차가운 봄 운명적으로 내게 원고를 청탁해 준 우리대학교 학보사 학생들에게 다정한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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