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탄생 100주년, 그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윤동주 탄생 100주년, 그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 이남영 기자, 조규민 기자, 하지은 기자
  • 승인 2016.02.29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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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일본 유학 첫 해 여름 입교 대학시절 윤동주 시인 (앞줄 맨 오른쪽)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시 중 하나인 「서시」의 한 구절이다. 왜 시인은 부끄러움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참회했을까.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고민하는 철인이었던 그가 그토록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의 부끄러움은 무엇이었는지 우리 대학교 김문주 교수(국어국문학과)와 함께 알아보자.

 친일, 저항의 논리로 개인을 평가해서는 안 돼=윤동주라는 인물을 다룰 때, 친일이나 저항에 관한 논의로 집중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거대한 논리, 국가나 민족이라는 큰 필터로 개인을 보게 되면 폭력적인 관점만 낳을 뿐, 윤동주 시인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했다. 특히 한국 근대사 중 일제와 관련된 부분에서 나타나는 개인에 대한 강력한 시선은 정확한 실체를 보지 못하게 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 문학사와 개인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윤동주는 좀 더 섬세하게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윤동주 시인이 통하는 이유는 지금껏 단순히 친일과 저항으로 호명됐던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며 “심훈이나 이상화, 이육사 등의 시인들과 달리 윤동주의 감수성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화된 고민의 산물이었다”고 했다.

 동주의 문학과 시대=1917년, 일제의 지배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윤동주’라는 한국 문학의 빛이 태어났다. 윤동주가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던 30년대 후반 무렵에는 문학 매체들이 축소되고, 모국어로 창작 활동을 하는 것을 제한받았다. 그럼에도 윤동주가 특유의 아름답고 순수한 언어로 시를 계속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윤동주가 북간도 출신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북간도 지역은 기독교를 굉장히 빨리 수용했고, 윤동주의 집안과 마을 역시 그러했다. 민족과 결합한 기독교는 윤동주의 내면 공간의 탄생과 연관이 있다. 김 교수는 “개인은 시대와 살아온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며 그러한 것들이 윤동주의 문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윤동주의 시를 거울로 표현했다. “당대의 많은 문인이 일본의 문제를 비켜가려고 하지만 윤동주는 그 문제 앞에 자기를 내놓고 마주서 있다”며 “그래서 윤동주의 시는 그 당시 시인들과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거울 같다”고 했다.「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에서도 당시 최고의 시인인 정지용이 해방 이후 나온 무명 시인의 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윤동주는 늘 자신의 문제를 돌이켜보고 생각했다. 김 교수는 “역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인간 사회 발전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인간의 덕목이며, 그 예를 우리는 윤동주에게서 본다”고 했다. 이어 그는 “우리 젊은이들이 덧칠한 겉모습에 만족하지 말고, 깨끗하게 씻어 자기 문제를 보고 필요하다면 고민하고 요구하고 연대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오늘날의 윤동주를 지키기 위하여

 윤동주 시인은 우리에게 낯익고 친숙하게 기억되는 대표적 시인 중 한 명이다. 또한 그는 광복을 바라며 시를 쓴 민족시인이다. 그런 시인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지키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봤다.

 윤동주 시인을 기리기 위한 활동은 여러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에선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 영인본을 전시하고 있다. 심정구 담당자는 “이번에 윤동주 서거 71주기를 맞이해 전국 ‘윤동주 창작음악제’, ‘문학강연’ 등이 준비돼 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8일에 개봉한 영화 <동주>도 작품을 통해 시인을 기리고 있다. 영화에서는 같은 집안에서 자라고 일생을 함께 해온 송몽규와 윤동주 시인을 함께 풀어나갔다. 각색한 부분들이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윤동주 시인의 전기영화로 그의 일생을 잘 나타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데 소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1일 월간지-see 잡지 (이하 see 잡지)에선 중국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직접 방문한 뒤 쓴 글을 실었다. 이 글은 생가에서 발견한 문제점과 우려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2013년, 중국은 시인의 생가를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돈 10억 원을 들여 수리를 했다. 하지만 생가 입구에 세운 경계석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는 윤동주 시인이 중국을 위해 일제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했고, 죽었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생가 내부에 있는 시비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중국어로 쓰여 있어 마치 윤동주 시인이 중국어로 시를 쓴 것 같은 착각도 들게 한다. 이에 see 잡지에선 “윤동주 시인은 서울과 일본에서 활동하며, 모든 작품을 한글로 쓴 우리나라의 민족시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유족들이나 관련 단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중국 측에 공식 항의하는 것을 꺼리고 있어 윤동주 시인이 중국인으로 굳혀질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라고 전했다.

 한편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윤동주 시인 관련 사업을 운영 중이다. 2014년에는 중국 국가 공인 관광지 지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는 윤동주 시인을 중국의 역사로 만들고,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해 수입을 얻으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가가 있는 지역이 중국 영토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가 지키고,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모두의 관심이 필요할 때다.

▲ 동지사대학시절,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밑줄 왼쪽에서 두번째)
▲ 숭실 중학교 시절 (첫줄 맨 오른쪽)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본지의 기자는 직접 윤동주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후쿠오카에 가서 그 흔적을 찾아봤다. 또 일본의 ‘윤동주 시읽기 모임’의 창립자이자 후쿠오카현립대학 명예교수인 니시오카 겐지 교수를 만나 윤동주 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활동에 대해 들어봤다.

 현재 후쿠오카에는 윤동주 시인이 생체실험 때문에 죽음을 맞았던 형무소가 없어지고, 근처에 깔끔한 외관의 후쿠오카 구치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조차 과거에 형무소가 있었고, 조선의 한 문학청년이 무고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원래 후쿠오카 형무소 옛터 앞에는 바다가 있었으나, 현재는 매립지로 변해 주택과 상가들이 자리잡고 있다. 시인도 바닷소리를 들었을까. 닿을 순 없지만 옆에 있는 바다를 통해 고향 가족들과 고국 소식을 마음으로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 바다가 사라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니시오카 겐지 교수와의 인터뷰

니시오카 겐지 교수
   

  어떻게 윤동주 시인을 알게 되었나?
 아는 교수님이 윤동주 50주기 기념행사로 후쿠오카 형무소 옆 공원에서 위령제를 하고 싶다며, 허가서를 받아달라고 해서 인연이 시작됐다. 그때 타국에서 억울하게 죽은 시인을 모른척하고 그냥 둔다는 건 시인을 두 번 죽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윤동주 시읽기 모임’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한 달에 한 번, 작품 하나에 대해 토론 한다. 10년 동안 200여 편 정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를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모임이 잘 진행되기 위해선 기존의 논의와 해석보다 한 단계 위의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정말 어렵다. 윤동주의 시는 천 년 묵은 사탕과 같다. 몇 십 년 동안 씹어도 달콤함이 날까 말까 한다. 그 빛은 뾰족하게 와 닿는 게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윤동주 시비 건립 추진에 대해 후쿠오카 구청은 지역에서 유명하지 않고, 시민 교양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가 방침을 전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비 추진을 반대하는 이들은 ‘시비 무용론’에 대해 주장한다. 윤동주 시 자체가 시비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됐다. 확실히 물체로 존재하는 비석을 세우자는 것인데, 그들은 시 자체를 시비라고 하니 그건 종이 비석이라고 해야 한다. 시비 건립을 고집하는 것은 역사인식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비를 세우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기도하고 교육, 위령할 수 있는 장소가 돼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말인데, 그는 한 알의 보리 씨앗이었다. 윤동주는 여기서 죽었지만, 그 보리 씨앗을 여기서부터 싹 틔워야 한다. 후쿠오카에 남겨진 씨앗을 내다 버릴 수 없다.

 윤동주에게 역사는 어떤 의미였을까?
 윤동주가 살던 시대는 격동기였다. 그래서 윤동주의 작은 촛불은 감출 수도 없이 세상에 번져나가는 역할을 했다. 그는 앞날을 보고 살았던 사람이다. 현실은 암담하지만, 정신은 해방된 조국을 보고 있었다. 창씨개명, 일본 신문물을 흡수한 것도 해방된 조국을 위해 일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그를 지지하던 아버지는 일본에 유학도 가게 해줬지만 그렇게 거기서 죽고 말았다. 아들의 유골을 가지러 간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한국인도 윤동주를 잘 알고 있지만,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왜 그를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깨끗하고 맑은 윤동주의 시 정신을 통해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40년대에 대해 한국인과 일본인이 얘기하면, 마지막은 싸움으로 끝나거나 주먹질을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일본과 한국이 대화 주제로 삼기에는 까다로운 시대다. 하지만 윤동주만이 양국의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게 하고, 미소 짓고, 안아주고 싶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마치 평화의 사도처럼 윤동주 시 세계엔 마법과 같은 힘이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후쿠오카 형무소를 방문하고 싶을 때 연락하면 언제든 안내해주겠다. 세월이 금방 갔다. 나는 벌써 70세 노인이라 얼른 마무리를 지어야한다. 현재 후쿠오카에 윤동주가 있었다는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한국에서의 관심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니시오카 겐지 교수 메일: knishioka@y7.dion.ne.jp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25년 중앙서림 초판본을 그대로 복원하는 오리지널 디자인 시리즈 초판본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췄다고 들었다. 초판본을 재연한 계기가 무엇인가?
 김소월, 윤동주 등 옛 시인들의 작품은 이미 여러 종류의 책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표준 철자법 등이 정해지면서 기존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처음 나온 그 모습을 재연한다면,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우리나라 시에 관심을 가질 것 같아 기획했다. 정제되지 않은 우리 말, 시인이 살던 그 시대의 언어를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을 시작으로 시집이 발행되고 있다. 특히, 윤동주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온라인 서점 예약 판매만으로 종합 베스트셀러 2위까지 올랐다. 대다수의 독자보단 소수의 독자를 겨냥한 책이라고 들었다. 의외로 이렇게 좋은 실적까지 냈는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리 출판사 책의 내세울 점은 디자인과 감성이다. 디자인 부분에선 아련한 클래식 분위기가 나는데 오래된 것을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감성적인 부분에선 시인들이 우리 역사와 관계가 있는 인물로 출판됐다는 점이 있다. 김소월과 윤동주는 이른바 민족시인이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말로 창작하신 분들이고, 아마 한국인이라면 모두 존경하고 좋아할 그런 시인이라 큰 의미를 두는 것 같다.

 윤동주의 시집을 내면서 윤동주 시인의 많은 작품을 봤을 것 같다. 윤동주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무엇인가?
 「별 헤는 밤」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다. 이 서정적인 시인이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니 감정이 움직였다. 이 시를 읽으면서, 또 부록으로 구성된 판결문을 보고 눈물이 났다.
이 책을 엮은 편집자로서 윤동주를 표현한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강골(强骨)이다. 일제의 서슬이 시퍼런 시기였는데 표현에 거침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해 달라.
 너무 익숙한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진 책들에 다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이 연구할 것이다. 책을 읽는 것뿐 아니라 소장하고 선물할 수 있는 재미가 담긴 책을 꾸준히 출간할 계획이다.

영화로 본 윤동주의 인물 관계도

 윤동주 탄생 100주년 관련 취재를 하는 사이, 윤동주 시인을 다룬 영화인 <동주>가 개봉됐다. 본지의 기자들은 영화를 보고, 윤동주의 인물 관계를 간략히 정리해봤다.

 윤동주의 라이벌이자 죽마고우, 송몽규=영화 <동주>는 제목과 달리 왜 윤동주와 송몽규의 관계에 집중했을까.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영화화하기에 앞서, 송몽규를 그와 공존한 가장 가까운 관계이자 윤동주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생각했다. 때문에 송몽규를 영화에서 집중시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윤동주에게 송몽규는 어떤 의미였을까.

 윤동주에게 송몽규는 중국 용정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고종사촌이었고 닮은 점이 많은 친구였다. 특히 이들은 문학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들은 함께 잡지를 읽고 시를 썼으며, 문학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늘 함께 한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함께 투옥되었다가 윤동주가 먼저 옥사했고, 한 달 뒤 송몽규도 세상을 떠났다.

 영화 속에서 송몽규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윤동주는 작품활동으론 별다른 활약이 없고 송몽규가 내린 결정을 좇고 따르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윤동주는 송몽규에게서 벗어나 스스로 어떤 일을 선택하고, 점차 주체적인 모습으로 변모해 민족시인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든다’. 송몽규가 윤동주에게 한 말이다. 이들은 함께 자랐지만, 후대의 역사 기록에선 윤동주 ‘시인’, 송몽규 ‘열사’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됐다. 송몽규 열사는 왜 윤동주 시인에게 이처럼 말했을까. 아마 그만큼 윤동주와 그의 작품을 아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들에게 서로는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숙명같은 라이벌이자 떨어질 수 없는,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는 친구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관계=윤동주는 정지용의 작품성을 존경했다. 시를 쓸 때 그의 시를 참고해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윤동주의 시에선 정지용의 시에서도 볼법한 서정적인 시풍이 발견된다. 영화에는 윤동주 시인이 정지용 시인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때 정지용은 윤동주에게 유학을 권한다. 실제로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의 ‘윤동주 약력’에 따르면, 윤동주 시인이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시인을 찾아가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이 같은 도시샤대학교(同志社大學校)에 다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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