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에 기적이 있었더라면····
1호선에 기적이 있었더라면····
  • 박민정, 백홍, 장수희, 지민선 기자
  • 승인 2016.02.29 13: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3년 전의 그 날

 평소와 다름없던 2003년 2월 18일,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오전 9시 52분 32초, 1079호 전동차가 대구 중앙로역에 진입했다. 그 순간 전동차에 타고 있던 지체장애 방화범이 휘발유에 불을 붙였고, 전동차 내부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전동차 안에 있던 40대 남자 승객이 소방본부에 화재 발생 사실을 최초로 신고했다. 그 시각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호 전동차는 전 정거장에서 떠났고, 사령실로부터 주의운전 경보만 받고 화재현장인 중앙로역으로 진입했다. 이 일이 그렇게 큰 사고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금방 진압될 줄 알았던 화재는 급속도로 확산됐다. 1079호 전동차에서 1080호 전동차로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한 것이다. 곧 중앙로역 역무원이 화재사실을 119에 재차 신고했다. 그제야 1080호 전동차의 기관사는 승객에게 대피명령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승강장은 암흑상태였고 유독가스로 가득찼다. 일부 승객은 수동으로 출입문을 열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승객은 전동차 안에 그대로 갇히게 됐다. 소방차와 구급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했고, 사고 발생 후 약 3시간 50분만인 13시 38분에 최종적으로 화재가 진화됐다.

 당시 우리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손원찬 씨(당시 원예2)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아버지 손태윤 씨를 통해 사고 당시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구지하철 참사로 인해 아들을 잃은 그는 예상과 달리 꽤나 담담해 보였다. 다음은 손태윤 씨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내 아들 아닙니다=나, 집사람, 우리 아들 둘. 이렇게 우리 가족은 네 명이다. 내가 내 새끼 자랑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우리 첫째 아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었다. 내 성격이 워낙 무뚝뚝한 편이라 아들에게 표현을 잘 못했지만, 다행히도 우리 아들은 엇나가지 않고 바르게 자라줬다. 학교에서 부모님 모셔오라는 소리 한 번 들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부모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고생하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졸업 전부터 일자리를 알아봤다. 군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있던 2월 18일에 안심역에 있는 친구와 놀다가 중앙로에 있는 이모를 보러 간다고 했다. 그 당시 나랑 집사람은 포항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뉴스를 통해 중앙로역에 화재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큰일이 아니겠거니’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들한테 전화했다. 생전 전화를 받지 않던 아이가 아닌데, 그날따라 연락이 안 됐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전화했지만,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따르릉, 따르릉’ 뿐이었다.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고, 티비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오후가 되니 사망자 수가 점점 늘어났다. 다섯 시부터는 손이 떨리고 가만히 있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집사람과 함께 대구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내려오는데 손이 떨려서 운전을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이나 중앙분리대에 부딪힐 뻔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신 차려야지’라는 생각 하나로 겨우 대구에 도착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구 시내에 도착했는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더라. “우리 아 좀 찾아주이소”라고 정신없이 외치고 다녔던 기억밖에 없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면서 대구 병원을 다 찾아보고 다녔다. 실종자 명단에도, 사망자 명단에도 우리 아들 이름은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다 포기하고 있을 때 정부가 우리 아들 핸드폰 GPS로 위치추적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휴대폰의 위치가 ‘중앙로’라고 뜨는 순간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왔다. ‘우리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하는 희망과 이제 ‘영영 보지 못하는구나’ 하는 절망. 절망이 더 컸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화가 났다. ‘한 차만 늦게 탔어도, 아니면 한 차만 빨리 탔어도.’ 이런 생각에 모든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렇게 아들을 마주한 순간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부정하고 싶었다. 손가락도 따로 있고, 두개골도 따로 있고, 뼈를 다 끼워 맞춘 모습이었다. 또 한 번 “내 아들 아닙니다”라고 부정했다. 화장도 계속 미루다가 결국 화장을 했다. 당시 우리 아들이 치아교정을 했었는데 거기 스님이 “아드님이 이를 하셨네요” 하며 뼛가루들 사이에 있는 철을 보여줬다. 그때 딱 체념을 했다. ‘우리 아들이구나’하고.

 고통도 그런 고통이 없다. 2~3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다. 집사람은 아직도 지하철을 타지 못한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지’ 라고 넘기고 싶지만 도저히 넘길 수가 없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매번 2월만 되면 그때가 생각나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13년 후의 오늘

 대구지하철 참사 이후, 13년이나 흘렀음에도 참사의 상처와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아픈 기억과 함께 현재까지 이어진 유가족과 대구시 간의 갈등, 그 끝없는 싸움. 본지는 그 논란을 짚어봤다.

 2·18안전문화재단 설립은 언제쯤?=2·18안전문화재단 설립에 대한 협의는 2003년 3월 대구시와 유족 간 처음 진행됐다. 하지만 참사 후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2·18안전문화재단 설립이 확정되지 않았다. 합의 초기에는 이사진 구성에 대한 불만과 재단 설립 신청 주체 간 갈등 등의 이유로 늦어졌다. 현재 이 문제는 해결된 상태지만, 국민안전처의 재단 설립 승인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이사진 구성 문제에 대해 전재영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기존 이사진의 구성은 다소 편파적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협의가 길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임원 구성에 대한 협의는 완료된 상태다. 재단 설립 신청 주체 간 갈등의 경우 신청 주체를 유가족으로 할 것인지, 대구시장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발생한 의견 차이다. 예정대로라면 지난해 3월 국민안전처에 승인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었으나, 신청 주체에 관한 협의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결정이 늦어졌고, 마침내 지난해 9월 24일 대구시장이 승인 신청서를 제출했다.

 재단 설립의 마지막 관문은 국민안전처의 재단 설립 승인이다. 실제로 지난해 9월 24일 승인 요청을 했으나 국민안전처 내부 인사이동 등의 이유로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뚜렷한 답변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에 윤병현 대구시청 지하철사고수습팀장은 “국민안전처의 판단이라 구체적인 결과와 발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2·18안전문화재단이 설립되면 현재 대구시가 임시 관리하고 있는 국민 성금은 재단이 관리하게 되며 피해자 추모사업, 장학사업, 학술사업 등을 도맡아 할 예정이다. 김태일 2·18안전문화재단 이사장(정치외교학과)은 “2003년의 불행한 기억을 교훈으로 삼아 대구를 안전과 생명의 도시로 가꿔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추모사업, 어디까지 왔나=추모사업은 추모제, 참사 관련 교육 및 홍보, 유가족에 대한 지원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추모제는 국민 성금을 관리 중인 대구시와 유가족의 합의 아래 성금으로 진행하며, 이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주기에는 유가족들이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마련해 진행하기도 했다. 전재영 국장도 5주기당시 비용을 지원한 적이 있음을 밝혔다.

 또한 추모탑은 만들어진 상태지만, 이는 공식 위령비가 아니다. 동화사시설집단지구의 상인들이 이 일대가 추모공원화 될 것을 우려해 추모탑 건설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대구시는 이에 대해 “적정 시기에 추모탑을 공식화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한편 추모벽은 ‘기억의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2015년 12월에 완공된 상태다.

 논란의 백서발간=대구시는 대구지하철 참사와 같은 대형 사건이 발생하면, 참사와 관련된 백서를 발간하고 있으며, 실제로 지하철 참사에 관한 백서는 2005년에 발간됐다. 하지만 유가족 측은 “대구시가 발간한 백서와는 별개로 유가족의 시선이 담긴 백서를 발간하고 싶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민 성금을 관리하고 있는 대구시는 유가족과 2010년 상반기까지 백서를 발간하기로 약속한 뒤, 2009년 10월 성금의 일부인 약 8천만 원을 유가족에게 편성했다. 하지만 백서는 아직까지 발간되지 않았고, 8천만 원은 모두 사용한 상태다. 이후 대구시 공무원들은 성금을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대구시는 백서가 발간되지 않고 소진된 8천만 원에 대해 유가족을 대상으로 배임·횡령으로 수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 유가족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대해 대구시는 “8천만 원은 국민 성금의 일부이기 때문에 돈의 주인이 명확하지 않고, 그에 따라 명확한 피해자 또한 없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은 것”이라며 “하지만 백서가 발간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문제”라고 주장한다. 반면 유가족은 “백서는 발간되지 않았지만 재단, 추모비 설립 문제 등이 해결되면 바로 발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 수목장=희생자 대책위에 따르면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인근 192그루의 나무에 사망자 유골을 화장해 뿌리기로 대구시와 합의했다고 한다. 이는 동화시설집단지구 상인들이 상권에 타격이 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추모공원 설립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구시는 묘역화를 둘러싼 대구시와 유가족 간의 합의는 없었다고 한다.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설립 시 2․18기념공원을 지정하자고 합의한 적은 있으나 추모공원을 만들자는 합의는 없다는 것이다. 이달 18일에 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참사를 둘러싼 논란이 끝나지 않는 것은 대구시와 유족들 모두 더 나은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대구시청 관계자와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는 “20대는 미래를 책임지는 세대이기 때문에 참사에 대해 더 잘 알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남아있는 문제들이 잘 해결되어 미래 세대에게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들을 기억하는 시간

 올해로 대구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지 13년이 지났다. 사고 발생 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추모식과 기억의 공간을 찾아 그들을 기리고 있다.

 지난 18일 대구도시철도공사 강당에서 대구지하철 참사 1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유족과 참사 관련 시민단체 뿐만 아니라, 대구시장과 대구시청 관계자들이 참석해 피해자와 유족들을 위로했다. 황순오 추모위원회 담당자는 “추모의 의미도 있지만 참사의 아픔에 대한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이 같은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다짐하기 위해 추모식을 개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권영진 대구시장은 “피해자분들께 머리 숙여 삼가 명복을 빈다”며 추도사를 전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세월호 사고 유가족이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와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추모식을 찾았다. 유경근 세월호 가족대책위 정책위원장은 “지하철 참사와 세월호가 비슷한 맥락의 사고인 것 같아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떠나보낸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대구지하철 참사 유족들과 함께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전했다. 추모식이 끝난 뒤에도 강당에서는 헌화식이 계속해서 진행됐다.

 같은 날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 설치된 ‘기억의 공간’에도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기억의 공간’은 지난해 12월 시민들에게 처음 공개됐고, 참사 현장에 있던 공중전화 박스 등 45개의 물품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이에 대해 윤병현 대구시청 재난안전실 사회재난과 지하철사고수습팀장은 “사고현장을 보존해 아픔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이 공간을 공개하게 됐다”며 “이를 통해 후손들이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편 기억의 공간은 관계자들 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공개가 지연되기도 했다. 이에 그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늦게나마 공개된 것에 대해 다행이라는 의견을 전했다.

 대구지하철 참사는 세계 지하철 참사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대구시에서는 부끄러운 역사라할 수 있음에도 참사의 흔적을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공개했다. 이에 윤 팀장은 “사고가 발생한 지 13년이 지나 시민들에게 잊혀졌을까 걱정했지만, 잊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에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 역 내 바닥에 부착된 형광물질                  사진 박민정 기자
 
 대구지하철 참사 후 대구시 곳곳에서는 지하철 안전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다. 이에 대구도시철도공사는 대대적인 변화를 통해 지하철의 안전을 위한 노력을 했고, 안전교육시설도 마련했다.

 사고 당시 지하철 내부에 불이 쉽게 번진 원인 중 하나는 객차 내 대부분의 소재가 가연성 소재였기 때문이다. 대구의 지하철은 2003년 2월 18일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임정우 대구도시철도공사 안전방재부 대리는 “사고 후 좌석시트나 바닥재와 같은 내장재부터 전동차 외부에 부착돼있는 광고물 등 모든 것을 불연성 소재로 바꿨다”고 말했다. 또한 열차가 지나가는 궤도에는 정전이 되더라도 자동으로 비상등이 켜질 수 있게 해 전국에서 최장시간, 최대밝기로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전이 됐을 때 비상구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는 형광물질이 바닥에 부착돼 있어 몸을 낮추면 출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임 대리는 “대구도시철도공사에는 안전사고와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지침서가 마련돼 있고, 그에 따른 행동방식이 명시돼 있다”고 말했다.

 또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계기로 안전교육장인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가 조성돼 개관일로부터 지난해까지 약 100만 명의 체험객이 다녀갔다. 작년에는 약 800명이 넘는 외국인들도 교육장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교육장에는 지하철 관련 안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김대호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교관은 “체험을 했던 분은 두번, 세 번씩 찾아주시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덧붙여 그는 아직까지 홍보가 잘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