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의 그 날 |
평소와 다름없던 2003년 2월 18일,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오전 9시 52분 32초, 1079호 전동차가 대구 중앙로역에 진입했다. 그 순간 전동차에 타고 있던 지체장애 방화범이 휘발유에 불을 붙였고, 전동차 내부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전동차 안에 있던 40대 남자 승객이 소방본부에 화재 발생 사실을 최초로 신고했다. 그 시각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호 전동차는 전 정거장에서 떠났고, 사령실로부터 주의운전 경보만 받고 화재현장인 중앙로역으로 진입했다. 이 일이 그렇게 큰 사고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오후가 되니 사망자 수가 점점 늘어났다. 다섯 시부터는 손이 떨리고 가만히 있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집사람과 함께 대구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내려오는데 손이 떨려서 운전을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이나 중앙분리대에 부딪힐 뻔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신 차려야지’라는 생각 하나로 겨우 대구에 도착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구 시내에 도착했는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더라. “우리 아 좀 찾아주이소”라고 정신없이 외치고 다녔던 기억밖에 없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면서 대구 병원을 다 찾아보고 다녔다. 실종자 명단에도, 사망자 명단에도 우리 아들 이름은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다 포기하고 있을 때 정부가 우리 아들 핸드폰 GPS로 위치추적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휴대폰의 위치가 ‘중앙로’라고 뜨는 순간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왔다. ‘우리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하는 희망과 이제 ‘영영 보지 못하는구나’ 하는 절망. 절망이 더 컸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화가 났다. ‘한 차만 늦게 탔어도, 아니면 한 차만 빨리 탔어도.’ 이런 생각에 모든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다. 고통도 그런 고통이 없다. 2~3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다. 집사람은 아직도 지하철을 타지 못한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지’ 라고 넘기고 싶지만 도저히 넘길 수가 없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매번 2월만 되면 그때가 생각나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
13년 후의 오늘 |
대구지하철 참사 이후, 13년이나 흘렀음에도 참사의 상처와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아픈 기억과 함께 현재까지 이어진 유가족과 대구시 간의 갈등, 그 끝없는 싸움. 본지는 그 논란을 짚어봤다.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참사를 둘러싼 논란이 끝나지 않는 것은 대구시와 유족들 모두 더 나은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대구시청 관계자와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는 “20대는 미래를 책임지는 세대이기 때문에 참사에 대해 더 잘 알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남아있는 문제들이 잘 해결되어 미래 세대에게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그들을 기억하는 시간 |
올해로 대구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지 13년이 지났다. 사고 발생 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추모식과 기억의 공간을 찾아 그들을 기리고 있다. 지난 18일 대구도시철도공사 강당에서 대구지하철 참사 1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유족과 참사 관련 시민단체 뿐만 아니라, 대구시장과 대구시청 관계자들이 참석해 피해자와 유족들을 위로했다. 황순오 추모위원회 담당자는 “추모의 의미도 있지만 참사의 아픔에 대한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이 같은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다짐하기 위해 추모식을 개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권영진 대구시장은 “피해자분들께 머리 숙여 삼가 명복을 빈다”며 추도사를 전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세월호 사고 유가족이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와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추모식을 찾았다. 유경근 세월호 가족대책위 정책위원장은 “지하철 참사와 세월호가 비슷한 맥락의 사고인 것 같아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떠나보낸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대구지하철 참사 유족들과 함께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전했다. 추모식이 끝난 뒤에도 강당에서는 헌화식이 계속해서 진행됐다. 같은 날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 설치된 ‘기억의 공간’에도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기억의 공간’은 지난해 12월 시민들에게 처음 공개됐고, 참사 현장에 있던 공중전화 박스 등 45개의 물품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이에 대해 윤병현 대구시청 재난안전실 사회재난과 지하철사고수습팀장은 “사고현장을 보존해 아픔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이 공간을 공개하게 됐다”며 “이를 통해 후손들이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편 기억의 공간은 관계자들 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공개가 지연되기도 했다. 이에 그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늦게나마 공개된 것에 대해 다행이라는 의견을 전했다. 대구지하철 참사는 세계 지하철 참사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대구시에서는 부끄러운 역사라할 수 있음에도 참사의 흔적을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공개했다. 이에 윤 팀장은 “사고가 발생한 지 13년이 지나 시민들에게 잊혀졌을까 걱정했지만, 잊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에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
사고 당시 지하철 내부에 불이 쉽게 번진 원인 중 하나는 객차 내 대부분의 소재가 가연성 소재였기 때문이다. 대구의 지하철은 2003년 2월 18일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임정우 대구도시철도공사 안전방재부 대리는 “사고 후 좌석시트나 바닥재와 같은 내장재부터 전동차 외부에 부착돼있는 광고물 등 모든 것을 불연성 소재로 바꿨다”고 말했다. 또한 열차가 지나가는 궤도에는 정전이 되더라도 자동으로 비상등이 켜질 수 있게 해 전국에서 최장시간, 최대밝기로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전이 됐을 때 비상구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는 형광물질이 바닥에 부착돼 있어 몸을 낮추면 출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임 대리는 “대구도시철도공사에는 안전사고와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지침서가 마련돼 있고, 그에 따른 행동방식이 명시돼 있다”고 말했다.
또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계기로 안전교육장인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가 조성돼 개관일로부터 지난해까지 약 100만 명의 체험객이 다녀갔다. 작년에는 약 800명이 넘는 외국인들도 교육장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교육장에는 지하철 관련 안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김대호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교관은 “체험을 했던 분은 두번, 세 번씩 찾아주시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덧붙여 그는 아직까지 홍보가 잘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