指鹿爲馬(지록위마)
指鹿爲馬(지록위마)
  • 김상수 위원장(직원노동조합)
  • 승인 2015.11.30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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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10여 년 전 본부 부서의 팀장으로 근무할 때, 부서원 한명이 호들갑스럽게 “팀장님, 출근하는데 학교 주차장에서 고라니를 봤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자네 어제 술 좀 마신 모양이군.”이라고 했더니 그 직원이 정색하며 “아, 진짜 고라니가 있었다니깐요.”라고 대답하였다. 사실 나는 그 전부터 캠퍼스를 질주하는 고라니를 많이 봐 왔던 터라 그걸 처음 본 후배 직원을 놀리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네, 술 깨거든 이야기 하자.”고 한 번 더 면박을 주었더니 그 친구가 홀로 분통 터져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아들 호해를 2대 황제로 옹립하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환관 조고(趙高)가 황제 앞에 사슴을 끌어다 놓고 말이라(指鹿爲馬) 하자 황제는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고는 모여 있던 중신들에게 말인지 사슴인지를 물었다. 중신들은 한결같이 “말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서로 무관한 듯하나 연관성이 있다. 권력이 약하거나 힘이 없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게 진실이라 하더라도 한마디로 무시될 수 있다. 반면, 절대 권력을 가진 자의 주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것임을 알고도 동의한다. 속된 말로, 힘없는 놈은 아무리 주장해도 이야기가 안 통하고, 힘있는 놈은 쓰잘 데 없는 소리를 하더라도 동조자가 넘쳐난다. 이런 사회가 바로 불통의 사회요, 마비 또는 경직된 사회인 것이다.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있거나, 아니면 그 권력에 빌붙어 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자들임이 분명하다.

 새누리당의 유승민 파동 이후 대구권의 국회의원들이 공천권에 매달려 납작 엎드린다는 보도를 보고 2,300여년전의 고사인 지록위마와 환관 조고가 연상되며,  ‘권력은 국민으로부터’라는 허울좋은 시대에도 권력의 속성은 그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만나 본 국회의원 개개인은 의지와 능력을 두루 갖춘 대단한 분들임에 틀림없으나, 권력이든 돈이든 그들보다 더 센 자들 앞에선 초라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백과사전에는 5.16군사정변으로 기술되어 있는 5.16에 대해 청문회를 거쳐 임명되는 현 정권의 국무위원급과 4대 권력기관장들의 답변은 가히 현대판 지록위마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5.16에 대해 각계의 여러가지 의견이 있는 것 같아 중립적 입장에 서야 하는 공직자로서 개인의 의견을 말 할 수 없다.”라는 요지로 답하는 게 아마 최근 정리된 모범답안인 모양이다. 국가의 운영을 책임지는 사람들인데도 절대 소신껏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환관 조고 앞에서 겁먹고 사슴을 말이라 하던 그 중신들과 다름없다.

 선거가 아닌 지명을 받는 자들이야 임명권자의 권한 범위이므로 체념한다 하더라도 선거로 뽑는 선출직들은 정말 잘 선택해야 한다. 생각없이 선택하다가는 그들의 횡포와 권력에 놀아나는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뽑기만 잘 해도 본전은 할 수 있다는 말이 게임에서 자주 쓰인다. 충분히 생각하고, 확실하게 판단해서 선택하자. 그래야 그 기간만이라도 마음 편히 사슴을 사슴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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