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 문학동인지
지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 문학동인지
  • 강민희 교수(대구한의대 교양교육원, 스토리텔러)
  • 승인 2015.11.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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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법의 시대, 다양화를 꿈꾸는 길
 문화는 역사적·지역적 특색에서 비롯되며, 다양한 환경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다기한 면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날처럼 문화의 확산과 공유가 신속히 이루어질수록 다양성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이 특정지역에 편중되면 지역 간의 격차와 괴리감이 커지게 마련이다. 지역문학이 중앙문단의 지체라는 중심주의적 시각도 수정되어야 한다. 중앙문학이 전파되어 지역문학이 형성되고 발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오히려 지역의 독자성과 주체성이 향상될 때 다양한 문학과 문화가 공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역문학의 가치를 확산하고, 대중의 관심을 환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지역의 문학동인지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남궁벽이 「폐허잡기」에서 밝힌 바와 같이 문학동인지는 “전문인으로서의 폐쇄적 집단성과 함께 ‘차별화(distinction)’을 지향”하여 “준동인(準同人)으로서의 독자, 즉 뜻을 알아주는 사람”만을 위하기 때문에 여타의 매체에 비해 텍스트의 확보가 쉽지 않고, 작가의 범위나 유형 분류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문인과 문학청년들에게 “팽창하는 발표욕을 소화, 수용하는 든든한 공기(公器)의 구실을 다”했다는 김용직의 말이나 “의무적으로 꼭 써야할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동인지가 아닌 잡지에 글을 쓰자면 자연 눈칫밥 먹는 것 같아서 쓰기 싫고, 거기 쓰자니 남의 시비가 있”었다는 김동인의 회고를 통해 문학동인지의 역할과 가치가 상당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의 발언은 문학동인지야 말로 문학의 양적성장을 견인하고, 문학 외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운 창작의 장(場)을 제공함으로써 예술성·전위성·자율성이 보장된 작품을 창작하는데 기여했음을 시사한다.
 
 백화만발한 문학의 정원
 문학동인지를 빼고 한국현대문학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양자가 시작점·성장점을 공유해 왔음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각 시대별로 문학동인지와 연결된 이야기는 하나 이상을 찾아볼 수 있다. 함께 우리문학사와 문학동인지가 얼마나 긴밀하게 관계해 왔는지 살펴보자.

1920년대를 ‘동인문단의 시대’, ‘동인지 시대’로 정의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이 의견은 타당해 보인다. 실제로 당대의 문학동인지가 차지한 자리는 결코 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문단이 형성되던 이 시기에 문학동인지의 발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을까? 신문이나 문예지, 종합지에 무명의 작가를 위한 충분한 지면이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문학청년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현대의 근본 파토스인 “근본적으로 새롭게 출발하려는 결심”을 기존의 매체가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출발에 대한 요구가 그 누구보다 강렬했던 문청들은 자연스레 문학동인지를 기획했을 것이다. 요컨대 1920년대의 문학동인지는 새로운 문학을 꿈꾸고, 나누며, 생산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문단의 성장기인 1930년대에는 한국현대서정시를 주도한 『시문학』(1930)을 비롯한 많은 수의 문학동인지가 등장했다. 이 시기에는 많은 시가 발표되었으며,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작품도 적지 않았다. 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상태로 도입되었던 다양한 문예사조의 특징이 작품에 내면화되었고, 현대시의 지향점을 고민한 것도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특히 김영랑과 박용철이 주축이 되었던 『시문학』은 김용직의 주장처럼 “거대한 순수시의 산맥”으로 오늘날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 김영랑과 박용철이 주도한 문학동인지 『시문학』제1집(1930.03)

 1940년대와 50년대의 문학동인지는 해방과 6·25전쟁으로 인한 중앙문단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표상된 자리였다. 1960년대는 “습작모음이 아닌 동인지의 모습을 보여준 시기(김현)”로 지금도 발행되고 있는 『관동문학』과 『두타문학』처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인지가 고개를 내밀며 문학의 장을 확대하는데 기여했다.

 동인지와 무크지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는 사실 문학동인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문단 내에서의 영향력도 감소했다는 쓰라린 속사정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존의 검열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문학을 창작하고 배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청들의 사랑을 받았다. 즉, 동인지를 통해 검열을 통과한 정기간행물로 유통되는 기존문단 혹은 중앙문단에 대항하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문단 외부에서 문학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환기한 일종의 문화적 운동을 펼친 시기가 1980년대인 셈이다.

 이처럼 동인지가 한국현대문학사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현대문학이 배태되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예술성과 전문성과 자율성을 확보하는데 기여해 왔고, 종합지와 문예지만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신진작가나 문학청년, 문학애호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장으로 기능했으며, 중앙문단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동반자의 역할도 해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지역문화를 부흥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동인지가 창조적인 지역문화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현대적인 문단이 형성되던 일제강점기에서부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는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문학수업을 제외하면 체계적인 습작 및 지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으므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동인지는 문청이 창작활동을 전개하는 곳이자, 궁벽한 시골에서도 확보할 수 있는 자체적인 발표지면이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유치진과 동인지 『토성』의 이야기를 복기(復棋)해 보자.

 유치진은 중학생 때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당 학문에 대한 이해는 전무했지만, 철학이 삶의 진리를 찾는데 일조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는 이 무렵 쇼펜하우어나 니체와 같은 철학자의 책과 체호프의 작품을 접하며 철학과 문학을 함께 꿈꿨다. 그리고 이 시기에 통영의 문청들이 주축을 이룬 문학동인회 ‘토성회’가 발족했다. 유치진은 동인회에 들어 성실한 습작기를 보냈다. ‘토성회’는 일고여덟 명에 불과한 동인으로 구성되었던 데다, 정기적인 동인지 발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치진에게 “우습고 부끄러운 작품”이나마 계속해서 쓰는 원동력이자, 작가로 하여금 그 시절처럼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창작에 매진한 일이 없고, 자신의 작품에 깊은 감동을 느낀 적도 없다고 술회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유치진에게 문학동인회와 동인지는 습작을 지속케 하는 단순한 매체와 집단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낭만의 시기”이자 삶을 “성장시키고 기름지게 만든” 땅이었던 셈이다.

 문학동인지는 문학 외적인 이유, 즉 동인 간의 의견대립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종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회적인 요건도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동인지의 창간과 발행은 끊이지 않았다. 왜 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운영에 대한 불안감보다, 작품을 발표하고 이를 인쇄물로 제작하여 배포한다는 설렘이 문학청년들에게는 더 컸을 것이다. 게다가 문학동인지를 제작하는 동안 이루어지는 습작과 합평, 동인 간의 문학적 교류는 문청과 동호인들로 하여금 동인회를 조직하고, 동인지를 발간하도록 하는 힘 아니었을까?

 문학동인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들
 1921년, 26쪽에 불과한 얇은 책자로 선보인 『장미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동인지는 발표지면이자 실험시의 무대, 에꼴(école)의 형성체로 그 역할을 다해 왔다. 하지만 동인지문학이 응원과 환호 속에서 배태되고 성장한 것은 아니다. 전통과 뚜렷한 성격이 결여될 경우 질적 수준에 대한 우려 섞인 비난이 빗발쳤다. 문학동인지에 발표되는 작품에는 “치열한 시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윤재근의 의견은 보편적인 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동인지와 동인지문학에 대한 평가도 아쉽다. 매년 여러 종의 동인지가 간행되고 있지만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고, 월평에서조차 동인지에 실린 작품에 대한 언급은 유보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 이유를 오늘날의 문단이 ‘메이저급’ 문예지의 지면에 연연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지나치게 성급한 것일까? 그러나 1966년에 창간된 『문학시대』의 「창간사」 중 “서울문화권에 예속”되어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문학시대』의 「창간사」는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날은 무뎌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문학동인지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콘텐츠적 가치를 도출하고, 지역의 문화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6·25전쟁 당시 국립마산결핵요양소(現, 국립마산결핵병원)에서는 그곳에 머물던 수많은 문인들에 의해 『청포도』, 『무화과』 등의 새너토리엄(Sanatorium) 문학이 형성되었다. 마산에서는 마산문학관을 필두로 이들 새너토리엄 문학동인지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했고, 그 성과물로 『마산의 문예동인지』(마산문학관, 2007)를 펴냈다. 또한 종전(終戰)과 동시에 해체되는 피난문학과 동인지의 폐쇄적인 성향으로 인해 대중에게 공개될 수 없었던 작품에 대한 발굴도 지속하고 있다.

 문학동인지의 발행처가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발돋움하기도 한다. 서정주·김동리·김달진·함형수 등이 만든 『시인부락(詩人部落)』의 공간, 보안여관(保安旅館)의 변화가 그것이다. 광화문에서 효자로를 따라 청와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보이는 이 여관은 『시인부락』 판권에 기재된 발행처 주소로 문학애호가들의 관심을 받았다. 실제로 당시 혜화전문학교 학생으로 ≪동아일보≫를 통해 막 등단한 서정주는 함형수와 함께 보안여관에서 3개월가량 머물면서 문학동인지를 한 장 한 장 만들어나갔다. 
 
 김영랑과 박용철을 비롯한 ‘시문학파’ 동인들의 문학을 테마로 하는 ‘시문학파기념관’은 국내에서는 유일무이한 유파를 대상으로 한 문학관이다. 참신한 기획력과 지역민을 위한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지역과의 밀착도도 좋아 운영기간에 비해 높은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 강진 내의 문화자원과 동인의 문학공간에 대한 네트워킹이 원활하지 않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펼치고 있다.

▲ 대구의 문학청년들이 발행한 문학동인지 『문원』 제2집(1937.05)

 우리지역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동인지 『문원(文園)』이 있다. 1937년 4월에 창간되어 통권 2호로 종간된 이 동인지는 창간호는 찾지 못했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제2집만 발굴된 상태다. 여기에는 창간을 격려하는 소설가 홍효민, 시인 김동환, 독자 함성운의 글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어지간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총체적인 연구와 이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기획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즉, 『문원』에 대한 연구와 문화산업으로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는 뜻이다. 천천히 그러나 꿋꿋하게 우리지역의 문학을 살찌울 문학동인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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