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위로를 던지다
세상에 위로를 던지다
  • 강신애 기자, 하지은 준기자
  • 승인 2015.11.3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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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민주 동문(국어국문학과 94학번)은 우리 대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해 작가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2005년도에 창작 뮤지컬 <빨래>를 발표했다. 그 후  2005년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극본상, 2010년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 극본상 등을 수상해 인정받는 연출가로 자리매김했다. 앞으로 추민주 동문은 뮤지컬 <빨래>를 중국, 일본에 진출시킬 예정이며, 현재는 연극<두근두근 내인생>을 연출 중이다. 그런 그를 만나 연출가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보고, 모교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들어봤다.

연출가 추민주

 연출가와 작가를 꿈꾸게 된 계기는?
 대학교 때 연극 동아리 ‘천마극단’에서 활동하며 재밌게 대학생활을 보냈다. 처음 동아리 활동을 했을 때는 연기하는 것이 제일 재밌었기 때문에 배우가 되고 싶었지 연출을 하거나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 연출을 맡게 되었는데 직접 연출을 해보니 더 적성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연출가를 장래 직업으로 생각할 만큼 동아리 활동에서 뚜렷한 비전이나 내 능력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즐거운 생활이었다.

 학창시절엔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돈을 벌어서 책이나 읽으면서 소박하게 살고 싶은 환상이 있었다. 그러던 중 IMF 사태가 일어나 어수선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기가 왔다. 그런 찰나에 서점에 취직했다.

 서점에서 월급을 받아 한국연극잡지를 구매했는데 그 속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광고를 발견했다. 광고를 보고 난 후 이렇게 지내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 <송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첫 직장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생각했던 직장의 모습과 취직해서 겪은 일들의 차이는 너무 컸다. 직장에서 일하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생각해 보니 가장 행복했던 일이 대학교 때 연극 동아리를 했던 것이고 그것을 하게 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전문적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열심히 공부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만약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학창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가?
 동아리 지원서를 썼을 때다. 선배들이 얼마나 허세를 부리던지(웃음). 가입할 당시 천마극단은 1년에 4작품을 공연한다고 했는데 생산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공연하는 선배들이 멋있어 보여 동아리를 찾아갔더니 선배들이 연극에 대해 아는 체하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웃긴 일이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연극이 단지 자신의 재능만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연극만의 미학이나 가치를 같이 연구하고 생산해내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또 20대의 객기도 맘껏 부릴 수 있는 공간이어서 좋았다. 밤새 술도 마시고 같이 모여 공동창작을 해 대회에서 상도 타고 서울 구경도 처음 해봤다. 공동창작을 했던 경험은 공연과 관련된 직업을 갖는 데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때 했던 작품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가?
 <나이 서른의 우린>, <발 달린 쓰레기>라는 작품이 있었다. <나이 서른의 우린>은 2학년이 되기 전 다 같이 카페에 모여 앉아 썼던 작품이다. 우리가 30살이 되었을 때 사회에 찌든 모습을 그려 보자고 해서 쓴 작품인데, 지금 생각하면 웃긴 발상이었다. 대회에서 그 작품으로 2등을 해서 상금으로 50만 원을 받았는데 전부 책을 사는 데 썼다. <발 달린 쓰레기>는 3학년 여름방학 때 모여서 썼던 작품이었는데, 돈이 쓰레기와 섞이는 바람에 모두가 모여 쓰레기 봉투를 뒤지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 낮에는 연극 스터디를 하고 저녁에는 선배 집에 모여 밥도 먹고 앉아서 대본을 쓰기도 했다. 그러한 경험들은 함께 만드는 즐거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즐거움을 깨닫게 했다. 천마극단에서 활동했던 것이 지금 연출가가 된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연극 활동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의미가 크다. 당시 국어국문학과(이하 ‘국문과’)에는 글쓰기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재능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그 친구들처럼 글을 잘 쓰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래서 글에 대한 열정이나 재능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하지만 당시 글 쓰는 것이 어려웠던 것은 장르적으로 시나 소설이 어려웠던 것이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말하는 것처럼 문장을 쓰는 것이었다. 동아리에서 대본을 쓸 때는 마냥 즐거웠기 때문에 이 사실에 대해 알지 못했고, 나중에 연극원에서 대본을 쓰는 순간이 왔을 때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 글을 쓸 때 영향을 주는 가치관은 국문과에서 공부하며 생긴 것 같다. 일례로 구비문학 수업 때 감포로 답사를 갔는데 무당 할머니들의 집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들은 나중에 대사를 쓸 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적고, 대사를 써서 다듬는 작업을 하는 데 좋은 영향을 끼쳤다. 

 학교에 다닐 당시엔 나와 전공 사이에 괴리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찾았을 때 결국 대학에서 전공했던 것이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국문과에서 수강했던 언어학이나 구비문학 등의 수업이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때 찾아서 공부하게 만든 계기였던 것 같다.

 뮤지컬 <빨래>는 10주년을 맞았다. 흥행을 예상했는가?
 <빨래>는 2003년에 연극원 졸업 작품으로 발표했었고 2005년에 세상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2006년에 기금을 지원받아 본격적으로 대학로에서 상업 공연으로 발을 디뎠는데 처음에는 흥행하지 못했다. 평단이나 관객의 호응은 좋았지만 관객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뮤지컬은 막대한 제작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 투자가 성사되지 않으면 공연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뮤지컬은 잠시 접고 연극에 몰두했었다. 그러던 중 수익에 상관없이 작품성만을 인정해주는 뜻밖의 ‘엔젤 투자자’가 나타났다. 덕분에 2008년에 다시 <빨래>를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역시 많은 사람이 작품을 좋아해줬지만 워낙 많은 돈이 투입됐기 때문에 투자액 대비 많은 수익을 낸 것은 아니었다. 제작비를 회수해서 처음 이익이 생긴 것은 2009년 배우 홍광호와 임창정이 출연했던 공연이었다.

 처음 작품을 제작하면서 10년 동안 빚을 졌고 빚을 갚기 위해 3년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리고 작가로서 로열티를 제대로 받은 것은 3년 전부터다.

 요즘 대학생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경제적인 문제들에 타협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요즘 정부에서 청년실업대책사업으로 청년들이 전문가들에게 멘토링을 받을 수 있는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뮤지컬에서도 멘토링 사업을 진행하기도 하는데, 그런 자리에 멘토로 가게 되면 이미 진로를 선택했지만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반은 무엇인가? 부모가 얼마만큼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가?

 예전에 비해 많은 학생이 학자금 대출을 받는 등 어려운 현실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예술 교육은 너무 경쟁 위주, 대회 위주이며, 천재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발표하거나 마을 극장을 이용해도 된다. 나 또한 주목을 받긴 했지만 처음부터 막대한 투자를 받은 것은 아니다. 같이 일했던 친구들과 전국을 돌며 무대를 찾아다녔다. 문화예술진흥사업 중 소외 지역에서 공연하는 사업이 있는데 그곳에 신청해서 장애인복지회관, 교도소, 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무대에 작품을 올렸다. 차를 타고 다니며 모텔 방에 모여서 밤새 게임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러한 경험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

 성과 위주로 목표를 설정하게 되면 이 일을 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 혼자만의 재능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 작곡가 등 협업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또 여러 가지 변수가 많은 일이기 때문에 흥행하는 것이 목표가 되면 힘들 것이다.

 학교에서 졸업 작품으로 준비했던 작품이 세상에 나갔을 때 시작이 쉽지 않았을 텐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경제적인 것이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부터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 수 없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때 해결해나가는 것이었다. 공연은 개인의 생각, 재능, 정서 모든 것이 모여서 꽃을 피우는 일과 같다. 때문에 협업이 잘 이뤄지지 않았을 때 힘들었다.

 <빨래>는 본인의 추억에서 시작됐다고 안다. 외국인 노동자와 인사를 나눈 기억이 오랫동안 남아 작품으로까지 이어진 이유가 있나?
 대구에 살 때는 한 번도 가난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이 가난했기 때문에 사람들 간에 위화감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서의 삶은 너무나도 팍팍했다. 서울에 상경해 반지하 방에 살았는데, 당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위화감은 충격적일 정도로 컸다. 아르바이트하러 가면, 사람들이 나를 외국인 노동자를 보듯이 대했는데 거대도시의 빛과 그림자에서 나는 그림자의 한편에 자리했다.

 한 번은 빨래를 널러 갔는데 건너편 건물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나에게 인사를 했는데 시큰둥하게 보았다.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대뜸 인사를 했으니 넙죽 인사를 받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내가 왜 새침하게 그 인사를 무시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과 내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훗날 작품을 쓸 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을 갖고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그것은 빨래였다. 내가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계기는 빨래였다. 나는 단순히 내 주변의 이야기를 극에 담았을 뿐이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우리는 막연하고 불안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그냥 늙어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이 일을 하고 싶다. 무대에 작품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인생 이야기를 쓰고 공연을 하면서 사람들과 즐겁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앞으로 노인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노인극을 만들어야겠다란 생각이 든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만이 노인극은 아니다. 노인들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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