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인문학] 우리 문화의 DNA를 찾아-한글의 세계적 창의성
[융합인문학] 우리 문화의 DNA를 찾아-한글의 세계적 창의성
  • 백홍 준기자
  • 승인 2015.11.16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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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일 상경관 208호에서 정병규 북디자이너의 특강이 진행됐다.

 ‘책의 분장사’, ‘대한민국 북디자이너 1세대’, ‘한국 북디자인의 개척자’. 정병규 북디자이너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민음사 편집부장, 홍성사 주간, 중앙일보 편집국 아트디렉터로 활동했다. 또한 1984년 2월 한국 출판시장 최초의 디자인 회사인 ‘정 디자인실’을 열었다. 현재는 ‘정병규 학교’의 대표이다.

대표적인 작품은 소설가 최인호의 역사소설 『해신』의 표지이며, 도서 『정병규 북디자인』을 저술했다.

 지금까지 시각적인 것을 다뤄오면서 인문학을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여러분 또한 그럴 것이다. 오늘 이야기는 시각적인 것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고, 생각될 수 있고 구현될 수 있는지, 또 각자의 전공과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전해줄 것이고, 그 주제는 한글이다.

 언어적(verbal) 의미와 시각적(visual) 의미=‘의미’라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언어적 의미와 시각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두 가지 의미 중에서 이제는 시각적 의미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시대가 왔다. 상업주의자들은 아날로그가 죽었다고 하지만 인류 탄생 이래 우리는 가장 행복한 상생·상관적 시대로 가고 있다. 그 시대로 가지 못하면 한국인의 정체성, 문화도 별 볼일이 없다. 이 두 의미를 어떻게 생산하고 상품화하며 가치를 매기느냐는 것이 아날로그, 디지털 시대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 문자와 서양 문자의 차이=‘visual meaning’의 측면에서 기본적인 동양 문자의 원형은 네모꼴을 전제로 했다는 것이며 이는 알파벳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문자를 쓰기 위해 그 밑에 필요한 종이를 그라운드라고 하면 알파벳의 그라운드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동양의 문자는 한자든 한글이든 일본어든 이 문자들의 그라운드는 네모꼴로 모두 같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봤을 때 동양에서는 네모꼴이 성립하지 않으면 언어라고 할 수 없고 이렇게 해석하면 한글이든 일본어든 전체를 다 하나의 문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글을 한자의 네모꼴에 맞추려고 억지로 모아쓰기 해서 끼워 맞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주장에 대한 정확한 반론은 다음과 같다. 한글은 다른 동양의 문자와 같이 자음과 모음이 쌓여지고, 영어는 옆으로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의 차이다.

 한국의 한글 연구=지금까지 한국의 한글 연구는 언어적 의미에만 빠져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한글 연구자들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고 새로운 철학과 가치들이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고 기술에 의해 촉발되는 시대다. 현재 한국 국어학은 구심적, 언어 과학적, 언어학적 문자 연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적 의미에 대한 문자학을 먹고 살기 위해서 연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언어학 기반의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언어학적 문자학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것을 전제로 했을 때 어떤 문자학이 생길 것인가. 구체적으로 그런 생태계 속에서 문자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것을 전제로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현재 언어학적인 문자학을 하는 사람들은 방금 말한 것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글의 중요성=한글은 마치 공기처럼 익숙해서 사람들은 평소 한글에 크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공기의 오염도가 심각해지면 문제가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공기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이 좋은 상태인 것이다. 공기가 정상이기 때문에 우리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이지 공기가 희박하거나 탁해서 오염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글도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수록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내 한글 전문가들이 현명해서 한글에 무관심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무식해서 관심이 없는 것인지 두 경우를 모두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공무원이나 그래픽디자이너들이 한글을 가지고 철없이 상품화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한류 상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의 한글. 이것이 무슨 한글 디자인이며 한글 사랑인가. ‘나무토막 2개를 붙여서 ㄱ과 ㄴ을 만들어 합쳐 ㅁ을 만들었다’, ‘넥타이에 ㅇ와 ㅗ를 반복적으로 그려 추상무늬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현대 미술이라고 우기는 눈뜨고 못 볼 상황이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다들 전문가의 생각을 틈나는 대로 눈여겨보고 분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훈민정음의 기록, 모아쓰기=국어학계는 두 파로 나눠져 있다. 그 중 하나는 ‘한글을 네모 꼴 속에 모아쓰는 것은 잘못됐다. 세종대왕이 이렇게 좋은 문자를 만들어 놓고 한자 숭배로 모아쓰기를 한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는 파(블록 풀어쓰기 주장파)이고 다른 파는 모아쓰기가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파이다. 그것 때문에 디자인계의 엄청난 낭비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훈민정음을 읽어봤으면 다 해결됐을텐데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 훈민정음은 위대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의 가장 구체적인 기준이 바로 모아쓰기다. 그 이유는 다음 세 문장에 나타나 있다.

 먼저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한글만 아니라면 모든 문자들은 하나의 같은 기원과 역사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글이라는 문자의 존재와 훈민정음의 발견 이후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장에 대해 설명하자면 한글은 문자의 혁명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은 일어났는데 그 혁명에 대해 풍문만 떠돌 뿐이다. 세계의 문자 역사는 새로 쓰여져야 한다. 한글은 세계의 문자를 바꾸고 역사를 새로 쓴 문자이다. 세계의 문자를 한글의 존재로 인해 두 종류로 나눈다면 한글과 한글이 아닌 문자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글이 사용되는 한 한글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훈민정음에 기록된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 한글을 사용한다는 것은 훈민정음에 기록된 사실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재미있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한글이 그렇게 대단해? 증거를 대봐” 했을 때 나오는 증거가 바로 훈민정음이다. ‘한글이 사용되는 한 한글은 본질적으로 훈민정음에 기록된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사실은 일상생활에서 잊고 살아도 되지만 한국말을 사용하고 한글을 사용하는 한 이것은 한 번쯤은 기억돼야 하고 상식이 돼야 한다. 훈민정음이 기록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없는 기독교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훈민정음이 발견됐기 때문에 이것이 역사가 되고 사실이 돼서 이젠 벗어날 수 없고, 이에 따라 한글은 연구, 사용, 디자인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이 있고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훈민정음에 기록된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에 기록된 그대로 하라. 따라서 훈민정음에는 모아쓴다고 했기 때문에 모아쓰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글의 글자꼴은 서로 간에 구별만 되는 단순한 부호가 아니라 그 모양 속에 다른 문자와 차별되는 철학과 정보가 담겨 있는 새로운 문자 기호다’라는 것이다. 문자 속에 정보가 담겨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한글 문자학 연구의 출발점이다. 훈민정음을 읽어보면 동양철학이 많이 나온다. 훈민정음을 볼 때는 다른 문자를 보던 시각을 가지고 보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한글에 대해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에 조작된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논문으로 발표하곤 한다.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다른 문자에 없는 여러 사실들이 들어있다 그것은 크게 3가지다. 바로 한국어, 동양철학, 동양문자성이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문자의 시각적 유형, 즉 동양인이 문자를 바라보는 문자관과 서양인이 문자를 바라보는 문자관은 전혀 다르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글은 다른 문자학과 다르게 동양적인 특징을 가진 문자이면서 철학이 들어있고 우리말과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한글의 제작 기법과 가치=한글을 만드는 방법, 제작 기법은 대상을 정해놓고 그 대상과 생각과의 연관성을 찾아 본따는 방식이었다. 기역을 예로 들면 목구멍을 닫는 모양을 본떴다. 한글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국어학적, 문자학적 사실 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글을 창조하는 데 방법론을 도입하고 제시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인문학 모든 것을 동원해서 철학을 가지고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위대한 사실이다. 동양 철학을 아무리 찾아봐도 문자 만드는 방법이 없지만, 세종대왕은 문자를 만들었다. 문화 생산의 원리를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한글은 동양 철학, 인문학의 집대성이고 중요성은 방법론이다. 한글을 만드는 것은 동양 철학에 없는 내용을 해석해 제조하고 기법화한 것이다. 모델을 설정하고, 방법론을 구성하고, 그것을 통해 한글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상적인 요소를 모델화해서 새롭게 짝을 만드는 원리도 만들어냈다. 이를 세종은 다른 말로 가획의 원리라고 표현했다. ㄱ에 ㄱ을 더해 ㄲ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 한글은 활자가 먼저 개발된 문자이다. 훈민정음을 처음 세상에 내보낼 때 인쇄를 해 책으로 만들어냈다. 세계 최초로 새로운 문자를 발표함과 동시에 활자 인쇄와 편집을 통해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한글 속 잠재돼있는 색=한글에는 색이 잠재돼 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동, 서, 남, 북, 중앙으로 나눠놓고, 각 방위에 상징적인 의미를 둔 것이 오행이다. 북쪽은 까만색, 중앙은 노란색, 동쪽은 파란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빨간색으로 말이다. 각 방위에 우리 한글의 낱자가 위치해있다. 이처럼 낱자에 색을 대입해서 아, 설, 순, 치, 후음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한글이다. 훈민정음에는 다른 문자에는 없는 역사, 지식, 문화가 녹아있는 것이다.

 네모 속에 잠재된 힘, 아른하임 사각형=아른하임 사각형. 사각형이 우리와 만날 때 사각형 속에 잠재된 힘이 드러난다. 네모를 볼 때 물리적으로 보지 말라. 그 속에는 심리적인 힘이 있다. 즉 교감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문자를 만든 것이 동양문자학이다. 동양문자학에는 힘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 이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른하임 사각형이다. 그 힘이 동양 문자들 속에 있는 것이다. 한글은 그것에 착안해 만들어 낸 것이다. 한글은 동양의 가장 이상적인 모형인 하늘과 땅이 만나는 소용돌이를 상징한다. 중요한 것은 동양 사유의 원형적인 평면 중에서 도형적인 트렌드 중 하나가 소용돌이라는 점이다. 하늘과 땅을 만나게 하는 것을 해결하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것의 출발이 아른하임 사각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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