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도스 패소스의 뉴욕 『맨해튼 트랜스퍼』와 근대 자본주의의 파편적 혼돈
존 도스 패소스의 뉴욕 『맨해튼 트랜스퍼』와 근대 자본주의의 파편적 혼돈
  • 이준영 교수(영어교육)
  • 승인 2015.10.12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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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우리 영남대를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포함되는 20~30대 청년세대들은 자신들을 일컬어 ‘88만원 세대’라든가 ‘N포 세대’ 등으로 자조적으로 명하며, 취업과 주거, 그리고 결혼과 출산 등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어려움을 함께하며, 기성세대들의 안이함에 대해 울분과 비판을 토하며 방황을 하곤 한다. 이런 젊은 세대들의 방황과 기존 기득권 세대에 대한 울분은, 안타깝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어쩌면 시대별로 계속 반복되었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문학의 역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가 전공하는 미국문학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들에 속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 Hemingway)와 스코트 피츠제럴드(S. Fitzgerald) 또한 소위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 혹은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리는 이런 방황하는 청년 세대에 한때는 속했던 이들이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이 세대의 젊은이들은 기존 미국사회가 외쳐왔던 문명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근대 서구사회의 척박한 경제적 현실과 정치적인 위선, 부조리 그리고 천박한 상품문화에 환멸을 느끼고 기존 세대를 비판하며 대안을 찾아 길을 떠났고 방황했다. 헤밍웨이는 스페인이나 쿠바로 떠났고, 피츠제럴드는 낭만적 사랑의 이상을 좇아서 떠나갔다. 하지만 지금까지 잘 알려진 이 두 작가 외에 이 당시 미국사회의 방황하는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작가가 있으니 그는 바로 필자가 주요 관심을 가졌던 존 도스 패소스(John Dos Passos)이다.   

  비록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도스 패소스는 미국문학사에서 ‘길 잃은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모더니즘미학의 실험정신과 저항문학 고유의 사회비판 정신을 자신의 문학세계에 조화롭게 승화시켜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로부터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the greatest writer of our time)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보다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도스 패소스는 근대 서구사회에 대한 비판에서 이 두 작가보다는 진보적이고 생산적인 태도를 취했다. 다시 말해, 헤밍웨이는 근대문명에 대한 이상과 믿음의 상실로 인한 울분과 방황을, 『태양은 또 다시 뜬다』(The Sun Also Rises) 와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등에서 볼 수 있는 유미적인 도피주의나 소영웅적인 염세주의로 극복하려 하였다면, 피츠제럴드는 그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처럼 과거에 대한 낭만적 이상과 향수로 대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도스 패소스는 이들보다 더 철저한 현실의식과 비판의식을 갖고 문학창작을 통해 더 총체적이고 직설적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한 모순과 불평등한 억압을 고발하고, 더 나아가 사회를 진보적으로 개선하려 노력하였다. 이런 면에서 도스 패소스의 작품은 현재 우리 사회의 방황하는 청년들의 아픔을 함께하는 문학적인 동반자이자 인생 선배가 되어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뉴욕이라는 거대하면서 냉혹한 대도시를 배경으로 길을 헤매며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맨해튼 트랜스퍼』(Manhattan Transfer, 1925)를 소개하겠다.       

 ‘메트로폴리스’라는 근대 독점자본주의사회가 만들어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느낌 중 하나는 아마도 아무리 오래 살아도 가시지 않는 낯섦이라는 이질적 감정일 것이다. 이는 일상적 삶 속에서 타인들과 늘 거리에서 조우해야만 하고, 생활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익숙한 건물이나 고층 빌딩이더라도 그 안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현대 도시인들이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대도시라는 역사적 환경에서 피어난 모더니즘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는, 창문 너머로 삭막한 거리를 홀로 내다보는 고독한 도시인이 느끼는 낯섦이다.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이런 낯섦과 마주해야 하는 일상적인 상황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를 들 수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이 말했듯이, 버스나 철도 등 근대 대중교통체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는 그 어떤 시대에도 낯선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 앉아서 말 한마디 없이 서로 경계어린 눈초리로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한동안, 심지어 몇 시간씩 보내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버스나 전철 안에서 사람들은 청각보다는 시각에, 입과 귀를 통한 대화 없이 눈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낯선 타인들과 상호작용을 해야만 한다. 소통이 불가한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주시하며 경계해야만 하기 때문에, 관계 맺음이 파편적이며 단속적이다. 또한 거리의 교차로 반대편에서 마주보며 횡단하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상대방의 움직임을 시각으로만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교차하는 혼란함 속에는 놀람과 충돌의 가능성이 항상 잠재해있다. 

 짐멜이 언급한 대중교통체계 안에서의 낯선 어색함과 소통부재는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맺는 인간관계의 본질, 즉 고립된 모나드(monad)로서의 개개인들이 낯선 타인들과 벌이는 놀람과 충돌이 잠재한 파편적이고 단속적이며 혼란스런 상호작용을 은유한다고 할 수 있다. 도스 패소스가『미국』(U.S.A.) 삼부작과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소설의 제목을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메트로폴리스인 뉴욕의 대중교통체계를 중추적으로 연결하는 환승역인 ‘맨해튼 트랜스퍼’(Manhattan Transfer)로 명명한 이유도, 바로 이 소설을 통해 대도시라는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고립되고 소외된 군중들이 펼치는 파편적이고 단속적이며 놀람과 충돌이 잠재한 혼돈스런 삶의 풍경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차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이른바 ‘재즈시대’(Jazz Age)라는 거품경제의 활황기에 출간된『맨해튼 트랜스퍼』는 전통적인 형식의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고, 스무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들이 개별적인 몽타주(montage)로 일정한 규칙 없이 파편적이고 단속적인 소용돌이를 이루며 혼란스럽게 펼쳐진다. 그리고 이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버스나 전철에서 조우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낯선 타인들이며, 기존 소설들의 관례와는 달리 작품 안에서 서로 유의미한 관계나 발전적인 인연도 맺지 않고 그저 스쳐지나간다. 이들을 연결해 주는 것은 메트로폴리스 전역에 거대자본주의의 생리에 맞게 펼쳐진 버스와 기차 그리고 페리선(ferry)을 연결하는 대중교통망일뿐이며, 이 중심에는 당시에는 비교적 최근에 건설된 중추 환승역인 ‘맨해튼 트랜스퍼’가 있다.  

 뉴욕이나 대구, 또는 서울과 같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메트로폴리스에 사는 사람들은 문득 이 거대한 도시의 실체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한다. 자신의 일상적 궤적을 벗어난 대도시의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존재양상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면, 비록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지만 항상 낯설기 때문에 가벼운 외출이 아닌 불안한 여행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맨해튼 트랜스퍼』는 뉴욕의 실체를 알기위해 시내중심으로 여행을 하는 허름하고 지친 노동자 버드 코페닝(Bud Korpenning)의 일화로 시작한다. 버드는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브로드웨이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How do I get to Broadway?")라고 물으면서 그는 ‘중심지’에 다다르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서 문맥상 의미인 ‘중심지’가 ‘사물의 중심’(the center of things)으로 표현된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한 도심지(downtown)가 아닌 당대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 즉 당시 서구자본주의 세계의 중심이 된 뉴욕을 움직이는 ‘질서의 원리’(ordering principle)와 같은 것을 알려는 욕구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버드는 여행을 하지만, 중심을 찾기가 그리 녹록치는 않다는 것을 독자들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맨해튼 트랜스퍼』의 버드와 같이 무언가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자의 이미지와 모티브는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영미문학 전공자들에게도 상당히 낯선 이름인 존 도스 패소스의 작가로서의 독특한 경력을 효과적으로 설명해주는 출발점이 된다. 또한 정치논평과 희곡 그리고 미국역사에 관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그의 대표 소설들을 비롯한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로 이루어진 그의 문학세계에서도 여행은 상당히 핵심적인 모티프이다. 실제로 그는 유럽뿐만 아니라 남미와 러시아 그리고 중동과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행을 다녔고,『역동적인 브라질』(Brazil on the Move)과 같은 여행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도스 패소스에 관한 권위자인 루딩톤(T. Ludington)은『존 도스 패소스: 20세기의 오디세우스』(John Dos Passos: A Twentieth-Century Odyssey)라는 제목 하에 그의 전기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가는 모험과 고난에 가득 찬 기나긴 여정을 통해 고향을 갈망하듯이, 존 도스 패소스는 1차 세계대전참전 후, 미국을 비롯한 유럽문명에 대한 낭만적 이상과 믿음을 상실하고 거대 자본주의체제의 모순과 압제 그리고 환락적인 상업문화의 천박함에 환멸을 느끼며 여행을 하였다. 그는 궁극적으로 소수 대자본가가 독점하는 자본주의나 부조리한 전쟁광인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거대 체제에 맞서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그 속에서 인간의 창조적 가치를 꽃피울 그런 고향을 갈구하는 여행자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길 잃은 세대’의 여타 작가들과는 다른 도스 패소스의 문학이 가지는 변별성에 대해 평론가인 알프레드 카진(Alfred Kazin)은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인적이면서 “비극적인 나”(tragic ‘I’)가 도스 패소스의 작품에서는 현대사회라는 “비극적이고 포괄적인 우리”(tragic inclusive ‘we’)로 대체된다고 지적하면서 그의 소설에 내재된 공동체적인 사회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보통 현실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사적인 영역의 세계로 도피하는 개인을 중심인물로 내세우는 반면, 도스 패소스는 사회 자체를 주인공으로 제시하며, 개별 등장인물들은 근본적으로 이를 위한 조연의 역할을 맡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맨해튼 트랜스퍼』의 진정한 주인공은 스무 명이 넘게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맨해튼 환승역을 중심으로 대중교통망이 혈관처럼 퍼져있는 뉴욕이라는 메트로폴리스인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더블린이나 찰스 디킨슨(C. Dickens)의 런던, 그리고 샤를 보들레르(C. Baudelaire)의 파리처럼 특정도시가 한 작가에게 아주 중요한 창작의 모티브가 된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맨해튼 트랜스퍼』처럼 뉴욕이라는 한 도시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등장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맨해튼 트랜스퍼』는 뉴욕을 두 가지의 서사관점을 사용해 역동적이고 총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첫째는 생리학적인 관점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도시의 생리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의 혈관처럼 “맨해튼 트랜스퍼” 환승역을 중심으로 도시 전역에 퍼져있는 대중교통망이 고독하고 소외된 도시인들을 자본주의체제에 공급하는 것처럼 소설은 그리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벌레라든가 동물 등의 이미지에 빗대어 도시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으며, 회전문이나 소용돌이 등의 동적인 상징을 사용하여 도시 특유의 역동성을 묘사하곤 한다. 또 하나의 관점은 골상학적인 시각이다. 생리학의 동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주로 뉴욕의 정적인 형상들, 예를 들면 독점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된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인간관계의 소외와 왜곡, 상품문화 특유의 이기적 망각 등의 분열적인 형상들을 파편적인 몽타주들이 불규칙한 상호작용을 뼈대로 한 서사전력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불길한 미래를 고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사전략 하에『맨해튼 트랜스퍼』는 신문기자, 배우, 법률가, 공장노동자, 음식점 종업원, 밀주업자, 떠돌이 노숙자, 은행원, 이민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들을 피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많은 등장인물 중에 상품문화를 숭배하며 브로드웨이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엘렌 대처(Ellen Thatcher)나 지식인으로서 천박한 자본주의사회에 환멸 하는 지미 허프(Jimmy Herf)에 관한 스토리는 비교적 상세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중심인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여러 등장인물 중에서 조 할랜드(Joe Harland)와 같은 기업가나 볼드윈(Baldwin)같은 법률가는 엘렌 대처와 같이 배금주의에 편승하여 성공을 거두지만, 안나 코헨(Anna Cohen)과 같은 저임금 노동자나 콩고(Congo)나 에밀(Emile) 같은 이민자들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억압에 비극적으로 희생당한다. 

 이 등장인물들의 몽타주들은 서로 유기적인 연결 없이 브라운(Brown) 운동을 하는 고립되고 소외된 입자들처럼 불규칙한 파편들로 배열되어있다. 그러나 가끔씩 등장인물들이 서로 조우할 때가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고립과 소외를 극복하는 진취적인 연대감의 가능성이 암시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상류사회를 꿈꾸는 배우지망생인 엘렌이 유명디자이너의 옷가게에 들러 옷을 고르고 있을 때 뒷방 작업실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재봉작업을 하는 안나가 불에 그슬려 화상을 입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때 엘렌은 그녀가 갈구하는 화려한 드레스에는 착취당하는 어린 소녀의 피와 땀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죄의식을 느끼며 안절부절 한다. 그러나 “반짝이는 회전문”(shining revolving doors)이 상징하는 상품문화의 화려함에 휩싸이며 엘렌은 곧 안나의 비극을 망각하게 된다. 한편 무기력한 반항아이자 지식인인 지미 허프는 길을 잃고 방황을 하게 된다. 중심을 찾으려는 버드 코페닝과는 대조적으로 지미 허프는 겉으로는 상품광고로 휘황찬란하지만 속은 공허한 뉴욕의 중심을 떠나서 멀리 가려하지만, 버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디로 갈지는 미처 모른다. 뉴욕의 실체를 알기 위해 떠난 버드나 지미의 여행은 실패할 운명이지만, 아마도 영남대생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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