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인문학] 학문 융합의 의미와 필요성, 국내의 논의
[융합인문학] 학문 융합의 의미와 필요성, 국내의 논의
  • 하지은 준기자
  • 승인 2015.09.30 2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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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상경관 208호에서 김상환 교수의 특강이 진행됐다.                                             사진 장수희 준기자

 지난 15일 ‘융합인문학’ 수업에서 김상환 서울대 교수의 특강이 진행됐다. 김상환 교수는 주로 현대 프랑스 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주요 관심은 구조주의 전후의 현대 철학 사조를 동아시아의 문맥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2012년부터 과학과 인문·예술 융합의 기초가 될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철학과 인문적 상상력』등이 있다. 그에게 최근 떠오르고 있는 융합학문의 의미와 필요성, 국내의 논의에 대해 들어봤다.

 이상(李箱)의 부채꼴 인간=우리나라의 3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건축가인 이상은 자신의 필명인 이상의 ‘상’을 ‘상자 상’으로 했다. 왜 ‘나는 상자다’라고 했을까. 그의 산문을 보면 원형적이지 않고 부채꼴로 쪼그라든 근대문명에 대한 어떤 패러디, 반어를 볼 수 있다.

 근대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한없이 나뉘고 분화된다는 것이다. 특히 직업의 분화를 살펴보면 과거 원시인은 혼자 많은 일을 겸했지만 현대로 내려오면서 직업이 분화돼 그 중 하나만 선택하게 됐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의 전문 직업에 붙들려 근대적 분업체계에 갇혀있는 인간이 됐다. 근대인은 자기 안의 상자에 갇혀서 밖을 못 본다. 오늘날 직업이 분화되면서 가치관, 세계관의 분화에 더해 학문의 분화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과거 고전적인 철학자들은 전방위적인 학자였는데 지금은 그런 학자를 찾을 수 없다. 근대 학문, 문명의 배후는 한없는 분화 속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 와중에 우리 인간은 부채꼴로 쪼그라들었다. 전문성을 얻은 대신에 전위성을 상실한 것이 근대인의 운명이다. 이상은 이미 2, 30년대에 이런 현상을 예견해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융합학문의 흐름은 바로 이런 근대문명의 폐단이 누적돼 학문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지경이 되었다는 것과 관련된다. 계속 나누고 깊이 파고들기만 할 것이 아니라 좀 넓은 시선을 회복하자는 논의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요즘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다. 새로운 학문, 사고의 전제를 찾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하는 시대다. 결국 필연적으로 근대문명이 부딪히는 한계 때문에 융합 담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융합의 유형=융합연구의 유형에는 다학제(multidisciplinary), 학제간(interdisciplinary), 초학제(transdisciplinary)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되고 친숙하며 중간 위치에 있는 것이 학제간 연구다. 학제간은 말하자면 표준적인 비빔밥 정도의 융합이라고 하면 되겠다. 초학제는 섞었는데 찌개나 수프가 돼버려 재료가 형질 변화를 겪을 정도로 강도 높게 합쳐진 경우를 뜻한다. 다학제는 조금 더 느슨한 것으로 물리적이며 병렬적인 형식을 취한다.

 이런 분류는 융합되는 학문이 섞이는 강도에 따른 것이다. 철학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논의를 하면서 사람들이 빠뜨리는 게 있는 것 같다. 기초의 중요성이다. 데카르트는 학문을 나무에 비교했다. 뿌리가 형이상학이고 뿌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순수자연과학, 여기서 더 뻗어 나온 가지가 이른바 응용과학이다. 과실이 나무 끝에서 열리는 것처럼 데카르트가 볼 때 학문의 유용성은 응용과학에서 나온다. 요즘 가장 활발하게 융합하는 테크놀로지 수준으로 가려면 줄기, 순수과학 분야로 하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기초적인 것으로 내려가지 못하면 횡적인 융합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기 어렵다. 인문학이 융합에 관여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문학이 자연과학, 전자공학 등에 많은 거름을 줘야 가지 끝에 탐스러운 과실이 열린다.

 융합 관련 논의1=융합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가 나올 때 늘 되돌아가게 되는 중요한 고전적인 논쟁 몇 가지를 살펴보자.

 ①두 문화 논쟁: C.P 스노우는 1953년에 아주 유명한 강의를 했다. 그 강의의 요지는 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이 별개의 세계를 이뤄서 서로를 대립하고 불신하는 것이 사회 발전에 엄청난 장애와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고 개탄하는 내용이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사이가 갈수록 멀어지고 서로를 불신하는 것은 근대국가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노우가 제시한 문제는 아직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②지적 사기 논쟁: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전 세계에 왕성하게 휘몰아칠 때 일어난 논쟁이다. 앨런 소칼(Alan Sokal)과 장 브리크몽(Jean Bricmont)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얼마나 과학을 남용하고 있는가’라는 내용의 책을 썼다. 과학도 모르는 인문학자들이 저명한 프랑스 철학자들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과학사가들까지 함께 비판한 것이다. 이후 이른바 과학 전쟁이라는 대논쟁이 인문학과 과학 사이에서 벌어졌다. 논쟁이 거듭될수록 서로 이해하게 되고 위대한 평화가 찾아왔으며 이는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두 문화 사이에 화해를 가져온 사건이었던 것이다.

 융합 관련 논의2=조금 더 크게 보면, 융합의 원래 말은 convergence다. 2001년 미국 과학재단과 미국 정부가 협동하여 새로운 정책보고서를 냈다. 거기서 convergence technology라는 말이 등장했다. 여기서 융합이란 나노기술, 생명공학기술, 정보기술, 인지과학 등 4대 분야를 상호 결합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정보기술을 핵심으로 하는 융합기술은 산업 분야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 놓았다. 가령 전화, 인터넷, 사진기 등 기존의 다양한 제품이 하나의 휴대장치 안에 결합되면서 일어난 스마트 혁명이 대표적 융합혁명이다.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창조경제의 창조 역시 이 융합혁명을 근거로 한 것이다.

 융합연구는 인문학이나 자연과학, 테크놀로지 분야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책과학이나, 행정학 분야에서도 왕성하게 나타난다. 사회는 복잡하므로 단일전공의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할 수 없다. 점점 더 다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가령 어떤 도시 개발을 할 때 교육시설, 의료시설, 환경평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관여해야 제대로 된 도시개발을 할 수 있다.

 요즘은 학문뿐 아니라 정치학적으로도 큰 변화의 시기이다. 중국의 힘이 날로 커지고 있다. 예전에는 아이비리그에서 공부해야 정상에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동아시아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정치경제학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세계에서 요구되는 인재는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도 물론 잘 알고 있어야 하지만 동서의 문화적, 인문적 전통을 함께 알아야 정상에 설 수 있다. 따라서 동서의 융합이 융합인문학의 궁극적 이유가 될 것이다.

 융합에서 합류로=자연과학과 인문학,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겉으로는 공통점이 많아 보이지만 뿌리가 달라서 억지로 하나로 만들려고 하면 부작용이 크다. 이는 장구한 세월이 필요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의 패러다임, 이런 것을 우리가 융합하고 병행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이 따로 흐를 때는 따로 흐르고 만날 때는 만나서 좋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합류를 거듭하듯이 자연스럽게 융합이 이뤄지는 것이 좋다.

 은유와 이합적 사유=융합적 연구를 위해서는 대단히 창의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융합혁명에 필요한 창조적 사고의 형식은 뭘까.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몇 가지 답을 만들어봤다.

 1950년대 미국에서 창조심리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했다. 이때 나온 중요한 책인 A. Koestler의 『The Act of Creation』에서 쾨슬러는 창조가 bisociation이라고 했다. bisociation은 association에서 나온 신조어다. association은 하나의 체계, 상자 안에서 일어나는 연합이다. 그런데 쾨슬러가 볼 때 창조적인 사고는 두 개의 패러다임을 횡단하는 연상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의 이론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 현상은 새로울 수 없다. ‘너나 잘하세요’ 라는 말이 있다. 동방예의지국일수록 존대와 하대, 상하·귀천을 엄격히 구별한다. 그런데 하대와 존대가 우리가 모르는 순간 결합해서 ‘너나 잘하세요’라니. 얼마나 웃기고 신선하며 독창적인가. 

 우리에게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게 만드는 장면,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말을 가만히 보면 두 프레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사성을 간파하는 것이 은유의 능력이라고 했다. 비슷한 사물이 아닌 서로 다른 시스템에 속하는 개체들 사이의 유사성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시 문구가 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유사성을 간파한 멋진 지적 표현이다. 어느 날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봤는데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 것이다. 문학적인 상상력의 핵심도 프레임으로부터 나온다.

 횡단적 사유의 3단계=서로 다른 두 개체 사이의 유사성을 간파해 이어 놓는 것이 창조적 사고의 논리적 형식이다. 보통사람이 이합적 횡단의 사고까지 도달하려면 몇 단계의 정신적 형태변화가 필요하다. 발달심리학에서는 횡단적 사유를 3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는 체계내적 사유다. 처음에 이상의 말로 돌아가면 자신의 상자, 세계, 전공에 빠져 일정한 정체성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2단계인 체계간적 사유의 제일 중요한 특징은 모든 것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 기준이 명확할 경우 틀린 것을 모른다. 이게 20대의 특징이다. 나이가 들면 여러 개의 관점을 허락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3, 40대는 갈등을 타협시키는 능력이 생긴다. 그러나 아직 배타적 두 프레임을 연합하지는 못한다. 3단계에 해당하는 체계 횡단적 사유는 6, 70대 쯤 생긴다. 시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 인문학과 과학, 동·서를 결합하는 것이다. 천부적으로 창조적인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열심히 자기 길을 가다 보면 마침내 창조적 사고에 이를 것이다.

 궁극의 과제=융합인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문학이 풀어야 할 마지막 핵심적인 문제가 있다. 로고스(logos)와 미토스(mythos) 사이의 차이다. 자연 과학자들은 모든 말이 하나의 공식으로 압축되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 한다. 인문학자들은 서사구조를 중시한다. 어떤 이야기 속에 이상화된 내용을 보전하고 전달하는 것이 동양적인 것이고, 초역사적인 기원을 찾아 과거를 비판하는 것이 서양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뛰어넘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융합인문학의 궁극적 문제는 로고스와 미토스라는 두 프레임을 어떻게 이합시켜서 둘을 넘어서는 제3 세계의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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