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인문학]우주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우주
[융합인문학]우주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우주
  • 장수희 준기자
  • 승인 2015.09.1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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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합 인문학’은 ‘스무살의 인문학’과 달리 학문간 융복합 인재 양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인문학을 중심으로 자연과학 및 공학을 융복합적 관점에서 강의하는 과목이다. 따라서 학문 간의 융복합을 시도하는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강좌가 구성되었다.

 지난 8일 ‘융합 인문학’ 수업에서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의 특강이 진행됐다. 장회익 교수는 물리학 이외에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학문의 비교연구와 같은 학문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과학과 메타과학』,『삶과 온생명』,『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등의 책을 썼다. 그에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적으로 연결된 우주 속의 인간과 인간 속의 우주에 대해 들어봤다.

 인간은 우주 속에 있고, 우리 의식 속에는 우주가 있다. 이처럼 우주와 인간은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연결됐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은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세계에 있는 어떤 존재이며, 나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답을 얻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밖에서 오는 정보를 통해 얻을 수 있다. 보통 우리는 현재 보고 있는 것을 과거로 연결하고 미래를 예측하지만 우리는 과거밖에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는 태양과 해는 몇 분 전의 것이다. 우리가 형태로써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132억 년 전 경의 우주의 실물이다. 하지만 이것을 본다고 해서 우주를 아는 것은 아니다.

 ‘앎’은 그 데이터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연결해야 한다. 그래서 우주의 보편원리를 통해 의미 있는 ‘앎’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 보편원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존재의 원리’와 ‘변화의 원리’다. 하나의 형상이 있을 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들어있는지를 말할 수 있고, 물리학적으로 얼마나 정교한지를 얘기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액체로서의 물과 얼음으로서의 물이 있다. 이 두 가지는 형태에 따라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정교성이 달라진다. 에너지로 비교하면 액체로 있을 때가 더 크다. 얼음으로 돼 있는 것을 액체로 만들기 위해선 1g당 80kcal의 열을 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더 정교한가를 따지면 얼음으로 존재할 때다. 얼음이 되려면 분자 하나하나가 일정한 위치에 자리잡아야 하지만 물은 분자가 뒤죽박죽 섞여도 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자유에너지(F)’를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 값과 정교성(D)에 절대온도의 값을 합한 것이 자유에너지이다. 변화의 원리는 자유에너지가 줄어드는 쪽으로 변화한다. 이 원리가 우주 내의 모든 형상이 나타나는 기본 원리다.

 별의 출현과 소멸, 그리고 그 의미=별의 출현은 큰 의미가 있다. 그 전에는 물질이 드문드문 퍼져있었지만, 지금은 중력 때문에 한 군데로 몰린다. 그것이 별이 되고 그 안에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 우리가 알고 있는 무거운 원소들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에너지를 형성하며 폭발하고 우주 공간 내에 무거운 원소들을 터뜨린다. 폭발하는 중에 격렬한 에너지 변화가 나타난다. 그때 방사능을 가진 그전보다 더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진다. 이런 원소들은 깨지는 도중에 우연히 만들어졌기에 무한정하고 상황이 허용하면 깨져 버린다. 이것이 ‘핵분열반응’이다. 이 과정은 전부 자유에너지를 낮추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별과 주변사이의 뜨겁고 찬 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별은 많은 에너지가 좁은 데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주변보다 뜨겁다. 지구와 같은 행성도 에너지를 받아 꽤 높은 온도를 유지하지만 태양과 비교할 수 없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충분히 높은 자유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 팔을 한번 들기 위해선 자유에너지를 써야 한다. 모든 변화는 자유에너지가 감소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온도가 높은 천체가 있고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은 지구가 있으면 여기서 자연적인 자유에너지가 온다. 그때 이를 활용해 자유에너지를 보여줄 수 있다.

 물병에 물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떨어진 물방울이 있다. 이것은 질서가 모여있다고 볼 수 있으며 ‘국소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소질서 자유에너지가 일부러 흩어지면 국소질서가 형성된다. 실제로 국소질서가 가장 낮은 상태에서는 잠시 유지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하면 상당히 쌓여 언젠가는 깨지게 된다. 조각이 나서 흩어져 여러 형상들이 우리 땅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1차질서’라고 부른다. 이러한 것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별과 천체는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질서다.

 2차질서의 출현=‘이차질서’의 특징적인 것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라고 하는 것이다. 국소질서는 유한한 공간 안에 있는 정교성을 가진 질서다. 자체촉매라는 것은 질서가 만들어질 때 이것이 들어가게 되면 만들어지는 것이 굉장히 원활해진다. 또한 이것이 들어감으로써 자기와 유사한 것들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1차질서에 여러 가지 물질들이 있다. abcde라는 이런 특별한 물질들과 같이 다수가 1차질서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이런 것들이 우주 내에 제멋대로 요동을 치다가 이러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순서에 따라 이것의 기능이 결정이 되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면 일정한 순서를 둬야 한다. 그리고 밑에는 이것과 같거나 친근한 것들끼리 짝을 이룬다.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있으면 저 하나의 질서가 만들어지기는 어렵지만 그 다음에는 얼마 안가서 자신과 비슷한 것이 엄청나게 많이 생길 뿐만 아니라 지속이 된다.

 변이 국소질서 형성 확률=하나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백만년이 걸린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 바뀌는 데 또 백만 년이 걸린다. 그러면 한 단계 더 높은 정교성을 지닌 물질이 된다.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일 경우와 아닐 경우, 이것이 만들어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백만 년 만에 하나가 생기고 3,4일 후에 깨지는 일을 반복한다. 하나가 우연히 만들어지기 위해선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처음 하나 생기고 나서 불과 얼마 후에 십만 개가 된다. 약 10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한 차원이 지나면 바탕질서도 단계 별로 바뀐다. 최초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것은 없어진다. 바탕질서도 변하기 때문이다. 현저한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밑 상황에서는 위 상황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대기 중 산소가 20% 이상 있고 이는 다른 물질을 만나면 화합해 산화작용을 일으킨다. 지금은 산소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데, 처음엔 가장 유해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산소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산소가 있어야 기능하는 존재가 바탕질서와 밀접하게 존속했다. 이것을 ‘온생명’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낱생명을 지금까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고 봤다.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어떻게 에너지를 얻느냐’이다. 예를 들어 광합성을 하는 녹색생명체들이 여기 있는 물과 이산화탄소를 유기물질과 산소로 전환시키고 여러분들은 팔을 움직인다. 이는 바로 태양에너지로 움직이는 것이다. 태양에너지가 녹색식물에 오고 이것이 내 팔로 온 것이다.

 낱생명적관점의 문제점=낱생명은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온생명을 봐야 생명이 이해될 수 있다. 함께 있고 모두를 포함해야 진정한 생명의 단위이다. 온생명을 보지 못해 생명의 정의를 할 수 없었다. 온생명은 다른 것들과의 성공적인 관계 맺기가 중요한데 지식과 정보를 계속 받아들여야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지성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낱생명이 온생명 안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지성인데 이것이 생겨나면 놀라운 현상이 발생한다. 지적활동의 주체적 양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물질로 구성되지만 이 물질 안에서는 나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주체적 양상은 오직 그 주체가 된 자만이 의식할 수 있다. 내 몸이 온생명 안에 있지 않고서는 온생명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온생명 안에 하나의 낱생명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라는 것을 이해하면 삶은 복합질서 참여자의 주체적 양상을 가지게 된다.

 삶과 나=우리의 삶은 낱생명이다. 우리는 공동체지만 혼자 사는 정신을 가지고 있기에 ‘일인칭 복수’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것을 국한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소인’이라 부른다. 반대로 우리, 민족, 국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군자’라 부른다. 그리고 온생명과 온우리까지 모두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성인’이라 부른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면, ‘온생명도 의식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온생명 안에서 스스로를 온생명이라 느끼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주체의식을 가진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성인’에 의해 온생명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생명이 온생명까지라는 것을 배우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주체로 인식하는 존재가 됐지만 아직도 완전한 주체는 아니다. 인간의 집합적 지성 안에서 온생명을 자신이라고 의식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의 온생명은 아직까지도 깨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아주 최근까지도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가 이것의 집합적 지성에 힘입어 거의 40억 년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를 의식했으며, 이에 맞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해나갈 새로운 존재로 부상하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순환적 연결이다=우리는 40억 년 동안 다섯 번의 대멸종과 같은 대참사를 겪었다. 지금 우리는 제 6의 멸종에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 의한 것으로, 인간이 생태계에 균열을 일으켜 다른 생물들이 멸종하고 있는 것이다. 열대우림의 1,000만종 가운데 1년에 27,000종씩 멸종하고 있다. 온생명은 사람보다 1억배 긴 수명을 가지고 있다. 계산해보면 사람의 나이는 단 2분으로 2분 만에 모든 세포가 죽어간다. 우리의 온생명이 태어난지 40억년 만에 지성과 자의식을 갖춘 진정한 삶의 주체로 떠오르려는 시점에 그 인간이 이미 암세포로 전환돼 다른 생명을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삶’은 생명의 주체적 양상이며 ‘앎’은 삶의 인식적 활동이다. 본래 앎은 성공적인 자기관계 맺기를 위한 것이다. 자연의 기본 원리를 통해 우주, 생명, 인간을 이해했지만 인간의 주체를 파악 가능한 것인지 인식한 후 다시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다. 학문이라는 것이 이것을 완성시키려는 것이고 이것이 완결되면 이 안에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을 담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이해는 뫼비우스 띠 형태의 순환적 연결 속에 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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