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속의 전쟁법 관상성전투와 백제 성왕의 죽음
『삼국사기』 속의 전쟁법 관상성전투와 백제 성왕의 죽음
  • 김영수 교수(정치외교)
  • 승인 2015.09.1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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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 시대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전쟁이 많았던 시대였다. 7백여 년 간 끝없이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삼국사기』는 전쟁 기사로 가득 차 있다. 일상화된 전쟁 속에서도 삼국 시대 사람들은 인간미를 잃지 않았다. 백제 성왕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백제 성왕(?-554, 재위 523-554)은 신라군에 사로잡혀 죽었다.『삼국사기』에도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 매우 소략하다. 그러나『日本書紀』에는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일본서기』는 백제, 신라,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풍부한데, 일본이 천자국이고 백제와 신라가 일본에 조공을 바친 것처럼 서술하여 믿기 어렵다. 성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에도 그런 부분이 있다. 하지만 성왕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일본서기』에는 이 사건이 554년 12월의 일로, 『삼국사기』에는 7월로 기록되어 있다. 사서의 기사를 보자.

【기사 1】(『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 제4 - 성왕 32년
 성왕 32년(A.D. 554)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기사 2】『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제4 - 진흥왕 15년
 진흥왕 15년(554)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 경주)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明襛=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현재 서울 강남구) 군주(軍主)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 충북 보은) 출신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기사 3】(『일본서기』권19 欽明天王 15년조)
 여창(餘昌. 백제 성왕의 아들, 27대 威德王)이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노신들이 간하여, “하늘이 아직 우리를 돕지 아니합니다.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노신들이 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大國(일본)을 섬기고 있다. 무슨 두려울 것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관산성, 지금의 옥천)에 요새를 쌓았다. 아버지 明王(성왕의 본명이 明襛이었으므로 明王으로 씀)이 걱정하여, “여창이 오랜 싸움에 괴로움을 당하고, 오랫동안 침식을 폐함이 많았다. 어버이의 은혜가 많이 빠졌고, 아들로서 효도도 이루기가 드물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왔다는 것을 듣고, 나라 안의 군사를 모두 일으키고, 도로를 막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는 좌지촌(佐知村, 충북 보은)의 사마노 고도(飼馬奴 苦都, 다른 이름은 谷知)에게, “고도는 천한 종놈이요, 명왕은 이름 있는 왕이다. 지금 천한 종으로써 군왕을 죽이게 하려 한다. 후세에 전하여져서 길이 그 이름이 남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붙잡아 재배하여, “왕의 머리를 베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종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一書에 명왕이 의자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주어 베게 하였다라고 한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여 눈물을 흘렸다. 허락하여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고 머리를 늘여 베임을 당하였다. 고도는 참수하여 죽인 후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一書에 말하였다. 신라는 명왕의 두개골을 수습하여 두고, 예로써 나머지 뼈를 백제에 보냈다. 신라왕이 명의 뼈를 北廳의 階下에 묻었다. 이 廳을 都堂이라고 한다.] (이상 『일본서기』)

 6세기 백제와 신라에는 두 명의 걸출한 왕이 존재했다. 백제의 성왕(재위 523∼554), 신라의 진흥왕(534년~576년, 재위: 540년~576년, 제24대)이 그들이다.

 진흥왕은 재위 37년간 신라의 영토를 3배나 확장시킨 뛰어난 정복왕으로, 여우의 책략과 사자의 위엄을 함께 지닌 드문 인물이었다.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한 나제동맹은 눌지왕 이래 진흥왕대까지 120년간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진흥왕은 이 동맹을 깨고 백제와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진홍왕은 재위 11년(A.D. 550)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뺏은 도살성,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공취한 금현성을 모두 차지했다. 두 나라 군대가 공성전으로 지친 틈을 타 어부지리를 취한 것이다. 왕의 나이 불과 17세 때였다.

 하지만 백제는 나제동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와 신라를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도살성을 빼앗긴 이듬해인 551년,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지역 10개 군을 차지했다. 백제는 76년간 고구려에 점령당했던 한강 하류지역 6개 군을 회복했다. 백제의 오랜 숙원을 풀었던 것이다. 백제는 원래 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여 한반도의 중심을 장악한 나라였으나 475년 개로왕 때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한강 유역을 잃었다. 그 뒤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겨 한반도 남방 지역 국가로 위축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강 유역의 회복은 백제가 고토를 회복했을 뿐 아니라 중흥의 기틀을 탈환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진흥왕은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백제의 공격계획을 고구려에 알려주었다. 또한 553년(진흥왕 14년)에는 2년 전 백제가 공취한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했다. 철저히 백제를 농락했던 것이다.

 당제 백제의 왕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로,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고 한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천도와 지리에 정통하여 이름이 사방에 알려졌다”(妙達天道地理 名流四表八方)(『日本書紀』권19 흠명천왕 16년조)고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수도를 공주에서 사비로 옮기고 백제 중흥기를 이끈 명군이었다.

 553년(진흥왕 14년) 성왕은 신라의 배신을 참고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로 시집보냈다. 성왕은 나제동맹을 회복하고 싶다는 뜻을 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라를 안심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신만고 끝에 수복한 고토를 신라에게 다시 빼앗긴 백제로서는 신라와 나라의 명운을 건 건곤일척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듬해 554년(성왕 32년) 성왕은 신라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는 겨우 50인의 군사와 함께 관산성으로 이동 중 신라 복병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다.

 이 때 성왕의 군대를 물리친 신라의 지휘관은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이었다. 무열왕 김춘추의 회고에 따르면, 성왕과 백제의 재상(佐平, 혹은 장군) 4인이 함께 사로잡히고(『삼국사기』권43, 열전 제3, 김유신), 1만 혹은 29,600명의 군사가 모두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성왕의 세자 여창이 노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키자, 그를 걱정한 성왕이 세자를 위무하기 위해 전장에 나갔다. 이 정보를 접한 신라는 거국적인 군대를 일으켜 백제군을 격멸하였다. 성왕의 죽음을 간략히 기록한『삼국사기』와 달리『일본서기』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얼마 후 신라의 종 고도(苦都)는 성왕을 붙잡은 뒤 두 차례 절을 올리고, 그의 목을 효수했다. 성왕을 죽인 고도는『삼국사기』에 김무력의 비장 도도(都刀)로 기록되어 있다.『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성왕의 전장 방문 정보가 신라에 누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 국력을 기울여 성왕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신라가 그 임무를 사마노(飼馬奴)로 불리는 비천한 신분의 도도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이름을 보면 그는 아마 말을 키우는 마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빛나는 것은 사로잡은 자와 사로잡힌 자의 태도이다. 도도는 사로잡힌 성왕에게 모욕을 가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절하면서 죽일 수 있게 해 줄 것을 간청했다. 도도는 천한 신분의 인물이었지만, 적국 왕의 명예를 존중했던 것이다. 성왕 역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왕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적절한 죽음의 형식을 원했다. 죽음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에는 삼국 시대를 살아간 전사들의 전쟁 윤리와 삶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두 사람 모두 생의 가치를 삶과 죽음보다도 명예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생사를 다투는 전장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규범이 존재했다. 이것을 삼국시대의 전쟁도덕과 전쟁법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도도가 말하는 신라의 규범 역시 인상적이다. 즉, 신의를 어긴 자는 왕이라 해도 죽음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인의 사회적 관습법에서 ‘신의’와 ‘약속’의 무게는 왕권을 초월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도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 물론 백제가 신라를 기습 공격한 것은 나제동맹의 신의를 어긴 것이다. 하지만 먼저 신의를 깬 것은 성왕이 아니라 진흥왕이었다. 신라는 여러 차례 동맹의 신의를 저버렸다. 그러나 성왕은 더 이상 시비를 논란하지 않고, 승자의 규범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초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 상황에서 규범의 핵심기준은 ‘시비’가 아니라 ‘승패’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에서는 옳은 자가 아니라 이긴 자가 심판권을 갖는 것이다.

 죽음 앞에 선 성왕의 독백은 그가 삼국 간 전쟁에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일생을 살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왕이었지만, 고뇌에 찬 삶을 살았다. 성왕의 목을 벤 도도는 그의 시체에 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고 구덩이에 묻어, 죽은 성왕의 명예를 더 이상 손상시키지 않았다.

 또 다른 기록이 전하는 내용은 훨씬 리얼하다. 즉, 신라는 성왕의 목을 수습하고 나머지 뼈만 백제에 보내 예를 지켰다. 적과 포로의 시체에 대한 예우도 전쟁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왕의 목은 돌려보내지 않고, 중요한 국사를 결정하는 관청인 도당 앞 계단 밑에 묻었다. 신라는 적에 대한 예우를 갖추면서, 다른 한편 승리의 명예도 간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상의 기사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의 치열함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숙연하고도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의 경험 중 가장 비인간적이고 반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지키려는 행위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최상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야수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인적 존재이다. 삼국 시대의 전장에서 일어난 이 이야기는 역설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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