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그리고 현재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그리고 현재
  • 장보민 기자, 문희영 기자
  • 승인 2015.09.1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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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일본군 위안소에 강제 동원돼 병사들을 상대로 ‘성 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라고 부른다. 일본군 위안소는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위치했으며, 이곳에서 조선, 타이완, 네덜란드 등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여성이 일본 병사들을 상대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위안부’ 문제는 1945년 해방 직후 언론을 통해 제기됐으며, 1991년 故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을 통해 본격적인 인권문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현재까지 매주 수요일이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고 있다. 해방 후 70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지만 문제 해결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우리나라의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사건의 대두로부터 현재까지의 해결 과정을 한혜인 한국여성인권진흥원 팀장의 인터뷰를 통해 시간 순서대로 짚어봤다.

 1990년 5월, ‘위안부’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하는 성명서 발표=“‘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에 있어 기폭제의 역할을 했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처음으로 ‘위안부’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이어 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 등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죄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범죄행위에 대해 공식사과를 하고 이를 문서로 만들 것’, ‘현 정권이 이 문제에 대해 책임지고 해결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위안부’ 문제에 일본 정부의 책임이 있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방식의 커밍아웃이 증언의 의미이다”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했다. 당시 김학순 할머니는 “내 순결을 빼앗고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심정도 있다. 어떻게 내 원통한 심정을 풀 수 있겠는가”라고 밝혔다. 잊고 싶은 기억임에도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일본이 이에 대해 부인을 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이전에도 알려진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음에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처음 알렸다는 의미에서라기보다, ‘위안부’ 문제에 일본 정부의 책임이 있으며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 ‘아시아 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강제동원, 강제연행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로 다뤄진 재판이다”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에 제기한 최초의 소송인 ‘아시아 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이 시작됐다. 이 소송은 ‘위안부’ 피해자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 유족회에 소속돼 있는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함께 한 것이다. 그동안 노동자들이 피해 사실을 증언해왔으나 일본 측은 강제동원사실을 계속해서 부인해왔다. 이에 본 재판에선 강제동원이 범죄 사실이라는 내용으로 원고를 냈다.

 1993년 6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법’ 제정=“일본 정부는 여성기금을 마련해 보상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를 일본 정부의 책임회피라 생각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한국 정부가 구제책을 내놓겠다는 측면에서 본 법안이 제정된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법’을 제정한다. 이는 2002년 12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변경돼 현재까지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지원근거가 되고 있다. 이 법률에 따라 정부는 생활지원금지원, 영구임대주택 알선, 의료지원을 했다. 이 밖에도 생활실태 조사, 정책만족도 조사, 정서적 안정 지원 및 건강치료 지원 사업 등을 실시했다.

 1993년 8월, 고노 담화 발표=“두 번의 조사 끝에 다른 나라에서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동원했다는 증거가 나온다. 그렇지만 고노 담화에선 강제동원이란 이야기가 빠지고 일본군이 ‘위안부’ 문제에 있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일본의 입장은 '강제동원의 자료는 있지만, 조선인을 강제 연행했다는 자료가 없었다'는 것이다”

 1992년 7월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 1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직접 관여를 공식 인정했으나 강제연행 사실은 부인했다. 연이은 2차 조사에선 외국에서 강제동원한 사실을 나타내는 자료를 발견한다. 이에 일본군 관원이 강제동원에서 직·간접적으로 가담했음을 인정한다.

 다음 해 8월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고노담화)’를 발표한다. 주요 내용은 위안소는 일본군의 요청으로 설치됐으며 위안소의 설치와 관리, ‘위안부’의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적 책임에 있어서는 이미 종결됐다는 입장을 보였다.

 1996년 4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채택=“‘위안부’가 한국과 일본 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 속 인권침해사건이라는 것이 명백히 밝혀졌고,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됐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채택한다. 보고서는 ‘위안소가 국제법 위반임을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질 것’ 등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정부가 시행해야 할 여섯 가지 사항을 제시한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유엔에서 채택된 최초의 보고서이며 보고 내용에 일본 정부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어 유엔 인권위원회는 1998년 8월 ‘맥두걸 보고서’를 채택한다. 이는 위안소 제도가 성노예 제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등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보다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인권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국제기구의 권고에도 일본 정부는 응답하지 않았다.

 1998년 4월, ‘시모노세키재판’=“‘위안부’피해자의 피해사실이 구체적으로 다뤄졌고, 일본이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로 일본 사법부에서 인정한 굉장히 중요한 재판이다”

 ‘시모노세키 재판’이라 알려진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정신대 공식사죄 청구소송’이 열렸다. 1심 판결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특별배상입법을 해야 할 의무를 위법하게 게을리 한 데 따른 정신적 손해배상금 각 30만 엔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난다. 2심에서는 원고청구기각 판결이 내려졌지만,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큰 용기를 준 재판이며 이전의 재판과 달리 피해사실이 구체적으로 다뤄졌다는 의미가 있다.

 2000년 12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다수의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이야기했고, 민간법정이었지만 일본 천황이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재판이다”

 세기의 재판이라 불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이 열렸다. 법정에는 한국, 네덜란드, 타이완 등 8개국에서 64명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또한 2명의 ‘위안부’ 가해자가 출석해 가해사실을 증언했으며 당시 법정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참석했다. 본 법정은 ‘일왕 히로히토 및 일본은 강간 및 성노예 제도를 통해 인도(人道)를 어긴 죄로 유죄’라 판결했다.

 2007년 3월, ‘고노담화’ 부정=“아베정부의 발언에 이어 아사히신문사에서 그간 보도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오보라고 인정하면서 일본 내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수적 성향이 확산됐다. 이후 이뤄진 고노담화 검증은 한국과 더 이상은 외교로써 이 문제를 풀지 않겠다, ‘위안부’ 문제를 끝내겠다는 아베의 입장을 보여준다”

 아베 총리는 “미국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더라도 사죄할 의향은 없다”는 등 고노담화를 부정하는 발언을 한다. 이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는다. 강제성을 부인한 발언에 대해선 “지금까지의 정부 견해를 말한 것”이라는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2014년 일본 정부는 고노담화의 작성과정을 검증하겠다며 흠집 내기에 들어간다. 이에 우리 정부 측은 “고노담화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담아 발표한 일본 정부의 문서로, 피해자의 증언이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다”며 반박한다.

 2007년 7월, 위안부 결의안 제121호 채택=“우리가 자각해야 할 것은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감해주는 것은 맞지만, 여성인권·전시 성폭력의 문제라는 측면에서만 공감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 역시 이에 대해선 사과하고 있지만 당시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발생했던 조선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았다”

 미 연방하원 본회의에서 마이크 혼다 의원(민주당)에 의해 위안부 결의안 제121호가 채택된다. 결의안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확실하고 분명한 태도로 공식 인정하며 사과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미 하원에 이어 호주 상원, 네덜란드 하원 등 다른 나라에서도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된다. 결의안 통과는 일본 아베 정부에게 외교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으며,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로부터 더욱 큰 관심을 얻는 계기가 됐다.

 내가 왜 너희를 울려야 하는가=‘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현재 대구 달서구에 거주하고 있으며 여성인권운동가로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발히 활동 중인 이용수 할머니(87)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용수 할머니는 1944년 16세의 나이로 대만 신주의 가미카제 부대로 끌려갔다. 군인방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반항하면 전기고문을 당했고, 이는 고스란히 상처가 됐다. 위안소에 끌려가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수면 위에 떠올랐고 이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군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이불로 얼굴을 감싸고 신문사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기를 여러 번한 끝에, 그는 1992년 6월 한국일보가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그 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앉아 일본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외치며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해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볼 땐 이용수 할머니는 ‘내가 왜 너희를 울려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이용수 할머니에게 있어 ‘위안부’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임에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겪은 민 족의 수난을 후손들이 겪게 하지 않겠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용수 할머니는 “먼저 간 할머니들에게 내가 해결하고 왔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고 했다. 이어 그는 “대한민국 학생은 어느 나라 학생보다 똑똑하고 힘이 있다. 그 힘을 빌리고 싶다. 학생들이 나서면 반드시 해결될 것”이라고 전했다.

▲ 지난달 14일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진행된 이용수 할머니 소녀상 제막식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자신의 소녀상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사진 영대신문

할머니, 저희가 힘이 될게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 각 계층에서는 활발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를 비롯해 ‘희움 서포터즈’, ‘평화나비서포터즈’ 등 다양한 시민단체와 대학생 서포터즈가 활동하고 있다. 그 중 대구와 경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내가 죽어도 억울하게 당한 일을 잊지 말아 달라=1990년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위안부’가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각 지역에서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지원활동이 이어졌다.

 1997년 대구시에서도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으며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뵙기 시작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는 올바른 역사의식 확립을 위한 증언활동, 역사기록, 평화인권캠프 등을 진행하고 있다. 故 김순악 할머니는 살아 생전 “내가 죽어도 억울하게 당한 일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김 할머니의 말을 따라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확립하기 위해 이 같은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송현주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관계자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실 때 가장 힘들다”며 “시기에 따라 잠깐 대두되고 사라지지 않도록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위안부’ 인식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수준으로 평가했다. 송 씨는 “할머니들의 잃어버린 명예와 인권을 찾을 수 있도록 학생들의 힘이 필요하고 긍정적인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모두 노력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우리 대학교에 ‘평화 나비’가 날아오르다=“이 땅에 평화를, 할머니들께 명예와 인권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평화나비 서포터즈’가 우리 대학교에도 발을 내디뎠다. 우리 대학교에서도 ‘평화나비 서포터즈’ 모집이 시작됐다.

 ‘평화나비 서포터즈’는 평화나비네트워크의 주최로 이뤄지는 ‘위안부’ 기림일을 알리고 행동하는 대학생 단체다. 서포터즈 모집이 완료되면 교내 ‘위안부’ 역사 바로 알기 설명회, 모금 운동, 자체 역사 스터디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교외에서는 대구와 경산 지역에 있는 ‘평화나비 서포터즈’가 모여 플래시몹, 집회, 평화나비 콘서트 진행 등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이규석 ‘영남대 평화나비’ 지부장(경제금융2)은 “‘위안부’문제는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사안인데, 이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종종 보여 걱정이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이어 “할머니들이 살아계신 한 최선을 다하고 싶고 일본 측의 사과를 반드시 받아 낼 것”이라며 의지를 다졌다.
 

지난해 겨울, 뉴욕 시티컬리지에서 연극을 공부하는 20대 한국인 유학생이 강제 ‘위안부’를 소재로 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뿐만 아니라 18회 공연 중 16회 공연이 전석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는데, 그 주인공인 김현준 ‘컴포트 우먼’ 감독을 만나봤다.

 ‘컴포트 우먼’ 뮤지컬을 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미국에는 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서양의 인권문제에 대해 알고 있으나 정작 미국인들은 우리나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싫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만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사건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시작했다.

 극중 나비가 가지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나비는 몇 안 되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곤충 중 하나이다. 번데기에서 변태과정을 거쳐 나비가 되는 것을 모티브로 할머니들의 지나온 생활을 비유했다. 번데기로서의 나비는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어 계셨던 할머니들의 모습이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것은 할머니들의 원한이 풀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위안부’ 인식도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많은 사람이 알고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는 정치적으로나 사익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위안부’의 의미에 집중하는 것 같다. 공익을 위해 힘쓰는 단체도 많지만 그 중에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급급한 단체들도 있는 듯하다. 이처럼 할머니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본인들이 이슈화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안타깝다. 국민도 ‘단체나 사회가 알아서 하겠지’하며 방관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심을 쏟아야 할 때이다.

 외국 사람들의 ‘위안부’ 인지도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모른다. 우리도 신문에서 타국의 성노예 문제나 난민 등의 소식을 접하면 뉴스에 보도된 정보에만 그치지 그 속사정을 알아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미국인들도 ‘위안부’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안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떻게 연행됐는지 하는 것은 모른다. 뮤지컬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그러한 내용을 전달해 다행으로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선은 ‘위안부’뿐만 아니라 역사 문제 자체가 아시아 정세에 큰 걸림돌이 된 것 같다. 이 걸림돌을 뽑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이 공연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각국에서 모인 팀원들이 한데 어울리지 못하고 무리가 나뉠까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이번 기회를 통해 팀 내에서도 서로 다른 역사관이 합쳐진 것 같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조금이나마 엉켜있던 역사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한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이 나아가 일본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아시아 전체적으로 세계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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