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인문학]배움의 즐거움, 공부는 왜 하는가
[스무 살의 인문학]배움의 즐거움, 공부는 왜 하는가
  • 강신애 기자, 이경희 수습기자
  • 승인 2015.06.0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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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일 진행된 ‘스무살의 인문학’ 강연에서는『동양철학의 유혹』저자 신정근 성균관대학교 교수(유학·동양학과)가 학생들과의 시간을 보냈다. 신정근 교수는 여여(如如)라는 호를 가지고 있다. 이 호는 진실과 진실, 있는 그대로, 열의, 집념, 진실을 뜻한다. 그는『동양철학의 유혹』책을 펴낸 후『싸우는 인문학』,『동양철학, 인생과 맞짱 뜨다』등의 책을 써내 주목받았다. 그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과정을 밟고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학장을 맡고 있으며 선비 정신과 풍류문화연구소 이사장, 한국철학회 연구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논어>를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동양철학에 대해 해박하다. 그에게 배움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상에서 듣기 싫은 말, “공부해”=학생들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사랑해’와 같은 말이다. 반대로 가장 듣기 싫은 소리는 아마 ‘공부해’라는 말일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공부는 왜 하는가’이다. 오늘날 배움이라고 하면 시험, 성적 등이 떠오를 것이다. 배움에 관해 고등학생에게 질문하면 대입, 대학생들은 취업을 연상한다. 우리에게 공부란 끝내야 하는 것, 싫어하는 것, 벗어나야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혀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학생과 대학의 잘못이 아니라 이 시대의 잘못이다. 우리가 시대에 안주해서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공부를 하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공부와 담을 쌓고 살 것인지 아니면 포용할 것인지 혹은 공부를 취업준비, 시험준비 하듯이 수동적으로 행할지에 따라 공부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은 시험기간에 부모님에게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고 정작 도서관에서는 자 리만 잡아놓고 다른 곳에 가는 경우가 많다. 앉아있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즉 공부하기 싫기 때문에 자리를 뜨는 것이다. 이 시대에 공부라고 하면 시험이나 대학 입시를 생각하거나 취업을 연관시키기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하라고 하면 치를 떠는 것이다. 공부하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 됐다.

 공부는 왜 고통스러운가=손톱에 박힌 가시, 설사, 공부의 공통점은 아프다는 것이다. 손톱에 가시가 들어가면 손이 아프고, 설사하면 배가 아프고 공부를 하면 머리가 아프다. 아픈 곳은 다르지만 공부를 포함한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공부가 즐겁다고 했다. 그럼 왜 공부는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원래 나에게 없던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어디라도 아프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영어단어를 외울 때 머리가 아프다. 내 머릿속에 없었던 영어단어가 머릿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므로 머리가 아픈 것이다. 이처럼 원래 없던 것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데에는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공부라고 하는 것은 첫 단계에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고통으로 인해 학생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가졌다. 서두에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원래 나에게 없던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공부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공부하기 전에 내가 가진 사소한 것 때문이다. 이 뜻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작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가 그 능력을 키우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원래 내 몸에 없던 것이 내 몸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는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공부라고 하는 것은 내가 갖춘 작은 능력을 잘할 수 있도록 키우며, 내 안에 없던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므로 고통이 따른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분이 공부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부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그렇지만 고통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좌절하는 유형이 있고 성장하는 유형이 있다. 고통이란 것은 내가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없으면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면 그 고통은 우리가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성장이라는 것은 이뤄냄으로써 나의 역량이 증가하는 것이다. 처음 실패를 겪었을 때는 걱정되고 공포를 느끼지만 그 경험이 되풀이되면 여유를 가지게 되고 느긋해지게 한다. 고통을 이겨냈다는 것은 스스로 고통을 이겨낼 힘을 길렀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부는 태생적으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아픔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픔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공부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때 그 고통이 오로지 고통이기만 하다면 단지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가학적이기만 한 것이 된다. 하지만 고통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회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원래 나에게 없었던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우리가 그 고통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좌절한다면 나에게 찾아올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부는 극복할 수 없는 좌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뤄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하는 소중한 기회인 것이다.

 인간은 각자 다른 특성을 지니며 공존한다=서양 신화와 동양 문화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면 유일신을 언급할 수 있다. 유일신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며 우리는 창조주에 의해 창조됐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피조물들은 창조주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나(피조물)를 만든 창조주의 뜻에 따라 그와 계약을 맺는다. 계약을 맺게 되면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타난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과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억울할 것이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는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으로 계약 관계가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의 문화가 있는 것이다.

 검은색 통에 5원소, 4원소, 오행과 같은 요소가 들어 있고 그곳에서 사람이 탄생한다고 치자. 어떤 사람은 목(木)의 비율이 높으며 또 다른 사람은 수(水)의 비율이 높다. 따라서 사람마다 차이가 생긴다.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는 각각 어떤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하늘의 능력이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사람이 저수지를 만든다. 사람이 저수지를 만들지 않으면 자연이 주는 홍수, 가뭄 등의 영향을 그대로 안을 수밖에 없지만 저수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재해가 주는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이라면 하늘, 땅과 마찬가지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사람이 어떤 것에 책임을 지게 되면 세상에 많은 존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괴짜인 공자=공자는 조금 괴짜인 것 같다. 子曰: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자왈: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공자는 공부가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럼 우리는 공자에게 “너도 시험을 쳐봐”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공자는 우리와 무언가가 다르기 때문에 공부가 즐겁다고 말하는 것이다. <논어>는 동아시아에서 지어졌기 때문에 첫 구절의 ‘신’은 ‘믿을 신’이 아니라 ‘배운다’는 뜻으로 통한다. 배운다고 하는 것을 전지전능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배운다고 하는 것은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내가 대학에 왔다는 것은 배울 것이 있다는 뜻이며 배워야 산다는 것은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다. 배움은 나에게 부족한 것을 충족시켜 나에게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 천 원 한 장을 주우면 기분이 좋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내 것이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또한 나에게 없던 것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그것이 공자가 ‘공부가 재미있다’고 한 이유다. 그래서 공자는 “배우고 그것을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남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된다면 즐겁지 아니한가,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쳐 앞으로 나아갈 때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그때 고통은 함께 수반된다.

학생들과 질의응답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공부를 미루고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상경대학은 장학금을 받으려면 토익시험 성적표를 제출해야 하는데 저는 토익시험도 치기 싫고, 재미없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고 싶은 공부만 하는 것에 대해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사회가 원하는 공부와 내가 원하는 공부가 상반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교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나도 공부가 하기 싫었지만 교수는 되고 싶었다.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난 사람은 1%도 되지 않는다. 뭐든지 하나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것이 풍족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무언가가 없는 상태에서 가지기 위해선 무엇인가가 없는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그 일을 해내는 능력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이 인간이다. 잘하고 싶은 것, 재미있는 것 등 생각의 꾸러미를 함께 가져야 한다. 그 중 하나의 생각만 가지고 다른 것을 배제한다면 그 사고는 빈약한 사고가 될 수밖에 없다. 

 또 문제가 생기면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해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생각을 나눠야 진전된 단계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실천하면서 남들의 의견까지 수렴한다면 얼마든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을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끝이 없고 지식은 방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방대한 걸 왜 하고 있는가 하는 허무한 생각을 할 때도 잦은데 교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상황과 상실 등을 마주했을 때 그 한계에 부 딪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 주위를 서성거리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한계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하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일을 찾는다. 한계가 있다는 것이 내가 모든 것을 그만둬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한계에 직면할 것이고 한계를 극복하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내가 그 한계를 어떻게 대면할지에 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용기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용기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용기는 여러분 생활 곳곳에 녹아들어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기 싫은데도 “일어나야지”하고 깨는 것도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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