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사랑 그리고 돈에 관하여
몸, 사랑 그리고 돈에 관하여
  • 문희영 기자, 이경희 수습기자
  • 승인 2015.05.11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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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1일 진행된 강연에서는 작가이자 인문학자인 고미숙 고전 평론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등이 꼽힌다. 그러나 책 집필 외에 다양한 강연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고전과 동양철학을 공부해 역학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다. 음양의 질서를 바탕으로 우주 만물을 해석하는 재주를 가진 고미숙 고전평론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호모미세라빌리스’가 되지 않길=봄이 피었다 끝날 때가 있다. 우리는 지금이 봄이다. 캠퍼스는 아름답고 웅장하다. 이제  지성의 향연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충만하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생이라고 하면 먼저 ‘취준생’, ‘백수 후보자’가 생각난다. 불쌍하다. ‘혼밥족(혼자 밥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좋은 캠퍼스, 터질 듯한 젊음을 갖고, 많은 친구와 스승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나?

 최근 ‘인구론’(인문학의 90%는 논다)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인문학은 놀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인문학자는 다 자유인이고 프리랜서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인문학을 해서 노는 것이 왜 창피하고 동정받는 일이 돼 버렸나? 여기서 질문이 시작돼야 한다.

 이렇게 많은 것을 누리고 있고 더 필요한 것이 없는데, 자신을 한없이 부족하다고 여겨야하는 것을 ‘호모미세라빌리스’라고 부른다. 비참하다는 뜻이다. 자기로부터 어떻게든 결핍을 찾아내서 ‘나는 너무 비참한 존재야’ 라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취업이 안 되는 것이 왜 불행한지 따져보지도 않고 그냥 너무 불안에 떨고 공포감을 느낀다. 그래서 이 충만함을 -(마이너스)로 만들어 놓고 시작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누릴 것은 누려야 한다.

 단군 이래 지금처럼 때깔나는 대학생은 없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 대학생들은 이렇게 피부가 좋지 않았다. 여드름이 엄청 많았다. 지금은 여드름 있는 대학생을 찾아 볼 수가 거의 없다. 울퉁불퉁해야 하는데 뺀질뺀질하다. 청년은 울퉁불퉁하게 생겨야 한다. 지금 영양상태가 너무 좋다. 그때는 신장이 170cm만 넘으면 킹카였다. 대학생은 가장 노티나게, 빈티가 났다. 그런데 정말 자존심으로 충만했다. 그래서 맨날 세상을 뒤집어 놓겠다고 했다. 대학 들어와서 3개월이면 최루탄 앞에서 돌 던지고 그것이 운동권이었다. 그때 기성세대가 대학생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떨리고 무서운 일이 있었다. 무슨 도전을 받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학생을 만나러 갈 때 ‘기운을 차리고 있을까?’, ‘눈을 똑바로 뜨고 있을까?’, ‘질문을 해줄까?’, ‘어떻게 도발을 해야 질문을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와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가졌는데 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다’, ‘너무 모자란다’며 자신을 아래로 떨어뜨려 놨기 때문이다.

 몸, 사랑, 돈=청년 실업자가 10%를 넘고, 우리나라 정계는 늘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것처럼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이다. 우리만 겪어야 하는 특별한 고통도 없고 우리만 빼앗긴 것이 아니다.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더 유달리 힘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약간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가 더 힘들어’ 라고 하면 그 순간 우리는 호모미세라빌리스가 된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것을 하나도 누리지 않고 결핍에서부터 시작해서 ‘일자리 안 늘어, 취업 불안해, 등록금 많아’ 라는 것을 덧붙이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지금은 대학 나와도 취업이 안 된다. 이것은 세계적 문제이고 기술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학을 다녀야 하는가. 그게 바로 우리의 몸에 있다. 인간은 어떤 갈망과 결핍이 있지만 또 하나 내가 어떤 세계 속에 살고 있는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이것을 지성이라고 한다. 대학은 지성을 충족하는 곳이다. 대학에 와서 그런 것을 누릴 수 없다면 대학생도 아니고 대학을 다닐 필요도 없다. 그것은 대학에 대한 모독이고 청춘에 대한 모독이다.

 경제적 대가가 바로 온다면 그것은 지성이 아니다. 아무 대가가 없는데 내가 왜 지성을 연마해야 하는가? 그게 바로 우리의 몸이 열렬히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학에 와서 친구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지성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취업 준비만 하다가 취업도 안 되는 이런 허접한 청춘을 보내는 것은 바로 내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 무지가 결핍을 낳고 결핍이 끊임없는 불안을 낳는다.

 그래서 인간은 가장 먼저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나를 알고자 하는 욕망과 질문으로부터 내 주변의 시간 공간에 대해, 자연·사회·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지고 결국 이것을 아는 것은 자기에게 돌아와야 한다. 인간을 몰라도 되는 직업은 세상에 없다.

 궁극적으로 지성은 존재와 세계에 대한 탐구이다. 인생과 우주에 대해서 모르면 몸은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탐구는 모든 존재에게 소명이고 특권이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모자란다고 느낀다. 계속 불안하고 그래서 상처받는다.

 우리는 몸을 굉장히 함부로 한다. 자신의 몸을 소외시키면 안 된다. 몸이 내 운명을 만들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내 몸을 결핍투성이로 만들었는데 누가 나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줄까? 사람과 사람의 소통은 몸 안의 단기능, 즉 물리적 파장으로 하는 것이다. 혼자 밥 먹다보면 독거노인이 되고 고독사(死)하게 된다.

 그런데 대학이 왜 부정적인 문화를 낳는 곳이 되었나? 여기에 저항해야 하는데 대학생들은 이런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저 왜 일자리를 주지 않느냐고 얘기한다. 기성세대는 봐주지 않는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이냐’에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지성의 향연이고 지성의 향연이 있어야 대학이 있다.

 몸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몸에 대한 탐구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모방하면 특이성을 지우는 것이다. 그러면 나만의 새로운 가치를 생성할 수 없다. 그래서 늘 부정적이고 수동적이게 된다. 남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상처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승화강’=우리의 몸에 대해 딱 한 가지만 알려주겠다. ‘수승화강’ 水(물)가 올라가고 火(불)는 내려오며 순환해야 한다. 우리 몸은 단일한 고정체가 아니다. 생명은 내가 낯설고 멀리하고 싶은 것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생명은 타자와의 마주침이다. 균을 너무 밀어내면 면역이 없어진다. 수승화강이 깨지면 망상이 많아지고 하체가 움직이지 않는다. 몸을 움직여서 심장의 물이 샘솟게 하면 뇌를 촉촉하게 적실 때 창의성과 독창성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이 되지 않으면 남학생들은 남성호르몬을 항진시키는 것(스포츠, 게임, 야동 등)을 한다. 여학생은 여성호르몬(쇼핑)을 한다. 나에게 쾌락을 주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쾌락에 길들여져서 성욕을 그렇게 쓰면 사랑을 할 수 없다. 취업 때문에 연애 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새로운 삶과 우주가 들어오는 것이다.

 니체는 ‘자기 안에 자기를 멸망시킨 태풍이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사랑이다. 더군다나 청춘의 사랑은 더 그렇다. 청춘 에로스는 이성을 향해 가장 많이 간다. 그런데 이 힘이 지성, 인생과 우주를 알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성을 통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만큼 몸이 기뻐하는 일은 없다. 더 큰 문제는 에로스가 고갈된 것이다. 사랑의 힘이 없어지면 우정도 없어진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할 때 지성과 지혜로 무장하게 된다. 사랑과 지성은 분리할 수 없다. 지성이 없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에로스가 존재의 근본이고 생명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옛날 학생들은 학교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젊은이가 어떻게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스마트폰 안에서 모든 것이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쾌락을 다 쓰면 관계를 맺는데 더 이상 쓸 것이 없다. 내가 타인과 마주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성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수승화강이 일어나지 않고, 불안이 커지면 삶에 대해서 무지해진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는 만큼 기쁨과 신체의 능동성을 누린다. 이것을 모르는데 삶이 충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정의는 호모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쿵푸스(공부하는 인간), 호모일렉투스(직립하는 인간) 등 많다. 인간만의 특징은 직립하는 것이다. 즉 창조하는 인간이다. 인간이 두 발로 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이다. 알고자 하는 기쁨이 인간을 다시 동물로 돌아가지 않게 만들었다. 그때 인간은 말하는 존재가 됐다. 말하는 것이 로고스이다. 로고스에서만이 인간적 특징이 살아난다. 다른 모든 것은 동물과 똑같다. 천지인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우리가 지성을 쓰지 않으면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을 못 느낀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지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천지인을 알 때 신체의 자유를 얻는다. 로고스가 작동하는 순간부터 커뮤니티가 시작된다. 지복 로고스가 작동하는 순간, 어느 타자와도 말할 수 있다. 인류는 문명을 계속 일구어 오면서 먹고 살만하면 바로 학교를 지었다. 대학이 이렇게 많아진 이유가 인류의 시원에서부터 가져왔던 동경과 꿈을 물질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지성과 향연을 모를 때 화폐의 노예가 되고 끝없이 결핍을 지닌 채 살 수밖에 없다.

 

학생들과 질의응답

 우리나라에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높고 타인과 비교하는 경향이 유난히 높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계속 남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과 외모를 비교하면서 고치고 끝없이 자신을 몰아내면서 상처받을 준비를 한다’고 했다. 더 이상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나 자신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마음가짐이 있다면 알고 싶다.
 청년문화가 살아나야 한다. 청년이 딱 좋은 시기이다. 대학은 성인으로의 세계로부터 거리가 있다. 하지만 너무 밀착돼 있다.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일자리 보장이 안 된다. 청년들의 커뮤니티가 살아나야 한다. 커뮤니티의 핵심은 지성이어야 한다. 또한 청년들이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디지털문명’이라는 것은 직업의 유동성이 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든지 자유인인 백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인생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은 인식과 시선이다. 이것을 청년기에 연마해야 한다. 직업을 갖는다고 해서 직업이 유지될 수는 없다.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사람과 말을 섞을 수 없을 때 삶의 의지는 없어진다. 인간과 인간끼리 소통하는 능력을 터득해야 한다. 만남을 가능하게 하려면 지혜를 일구고 책을 탐구해야 한다. 대학 때 그런 시절을 만나야 한다. 인복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인간은 연결돼 있는 존재이다. 인생은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변화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동료의 힘이다.

 강의 내내 지성에 대한 인간적인 욕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 같다. 지성 또한 실존에 관한 문제와 결부돼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이 아니라 오직 지성 그 자체만을 욕심내면 그것 또한 로고스인지 궁금하다. 또한 연사님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
 지성은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기술지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이게 내 인생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어떤 관계를 맺을까’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지혜는 죽음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무의식과 관련된 것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동시에 시작했으며 족보와 관계를 만들었다. 매장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이 신화이고 신화가 인류 최초의 과학 지성이다. 죽음에 대한 것과 지성과 지식과 지혜를 동시에 연구했다.
 스펙은 지성이 없다.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은 현장에 가서 적용할 수 없다. 양쪽이 다 문제이다.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는 의리가 있고 믿을만 하고 약속을 지킬 만한 사람이다. 관계에 대한 열망이다. 직장은 사람들이 같이 일하는 곳이다. 이제 기업은 ‘스펙으로 채용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대학생은 자기 길을 찾아야 한다. 기업에 맞게 스펙을 채우면 기술직 이상을 할 수 없다. 결국 인간과의 관계가 문제이다.
지금 대학생은 지성이 없다. 동양에서는 지성이 반드시 죽음에 대한 앎으로 연결돼야 한다. 쉽게 말하면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죽음을 종교에 맡기고 탐구하지 않는다. 죽음은 어떤 것인지 모르므로 가장 무섭다. 죽음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이런 것을 탐구해야 한다.
지금의 대학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무것도 없을 때보다 더 결핍이 늘어났다. ‘내가 배우는 전공 지식이 어떻게 내 삶과 연결되며 죽음의 이치를 알 것인가’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관계된 것이다. 전공, 기술만 익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하며 스스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죽음을 스스로의 힘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것이 곧 지성을 연마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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