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장보민 기자
  • 승인 2015.04.13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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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눴다. 시계로 재는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했다. 여러분들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더 알차게 즐겼으면 좋겠다. 오늘 강연에서 들려드릴 주제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이다.

 철학과 산사의 경험=철학의 기본적 정의는 지혜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지혜라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이다. 그것을 찬양하는 행로가 철학이다. 이 학문은 대단히 신비적인 효과를 얻거나 세속적 권리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가장 완성된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이 고민의 결과는 철학이지 세속적인 권리를 얻거나 신비적인 초월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음 바탕이 잡초로 뒤덮인다. 그 다음에 세상을 보는 식견이 온통 캄캄해진다. 세상이 뭔지를 모르고 마음은 잡초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대학 안에 실용을 위한 수많은 학문이 가득 차 있지만, 전통 실리 학문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노하우라 생각한다. 철학이 학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학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을 하고자 철학과에 왔더니 거기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한 학기를 버티다가 산에 들어간 적이 있다. 대학 새내기 시절의 일이다. 산속 암자의 옆방에는 주역과 점술을 공부하는 처사가 한 분 있었다. 내 방을 기웃거려 본 모양이다. “큰일났다, 학생이 사악한 기운에 씌었다.” 놀란 주지가 달려왔고, 얘기를 듣고 나는 실소했다. 내 방에는『파우스트』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악마와 영혼을 거래 운운” 하는 소리에 아마도 혼비백산한 것 같다. 그가 내 사주를 봐준 적이 있다. 금전운, 애정운, 권력운 등을 읊어 내려가고 있는 사설을 중도에 끊고 내가 물었다. “어째 이야기가 그런 것뿐이오. 다른 ‘범주’는 없소?” 내 반문에 그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아니, 그것 말고 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오.” 나는 ‘삶’에 대해서 알고 싶었고, 거기 이르는 길을 찾고 있었던 듯하다.

 의미를 묻는 이 질문은 희미하나, 사람을 붙들고 있는 가장 질긴 끈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묻는다. 보통은 잊고 산다. 대학은 이 관심에 응답하기를 접고, 교회에 전적으로 맡겨 놓았다. 대학은 학술연구에 올인하고 있고, 인문학 교수들조차 더 이상 ‘가치’를 문제 삼지 않는다. 정치적 공정성은 다양성과 다문화주의를 외치면서 가치를 언급하기를 꺼린다. ‘가치’는 권력의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스 로마의 현자들과 더불어, 동양의 지혜는 이 ‘물음’으로부터 시작하고, 거기 ‘응답’한다. 그리하여 철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삶의 기술’을 위한 노하우를 가르친다. ‘인문학’은 인간의 성장과 성숙을 다루는 지식과 노하우를 포괄적으로 일컫는다. 그 매뉴얼을 ‘고전’이라 부른다.

 나의 마음을 찾다=요컨대, ‘산업’과 ‘기술’ 너머에서 ‘인간’과 ‘가치’를 고민할 때, 그 때 전통 유교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의 욕망을 무한 충족시켜 주겠다는 근대의 ‘위대한 기획 혹은 약속’은 실현될 것인가. 오지 않는다. 온다 해도 행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 모든 욕망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의 비결은 쾌락이 아니라, 덕성에 있다! ‘덕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을 통제하는 기술을 가리킨다. 밖의 사물을 향해 취득하기보다, 안의 ‘마음’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내면의 기술이 필요하다. 사설은 접고, 그 훈련의 예시를 보여주고자 한다. 퇴계의 평생 온축이 담긴『성학십도』를 골라 보았다. 

 성학이라는 것은 성숙한 인간이 되는 기술이다. 성숙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노하우를 정리한 것이다. 그 중에 8번째는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재는 의지와 충동 감상에 대한 일반적인 보고서를 총괄하고 있는 말인데, 예전의 심학이라는 말은 이 마음을 어떻게 개관할 것이냐, 마음수련, 마음공부에 관한 가르침이다. 유교의 핵심자원으로 마음의 결과에 대한 노하우를 담고 있다.

 방심은 잃어버린 마음이라는 뜻이다. 닭이나 개가 울타리를 나서면 온 식구들을 풀어서 찾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잃어버리고서도 찾을 줄을 모른다. 개나 닭은 찾으러 나서면서도 자기 마음은 찾으러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 맹자의 말이다. 여러분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의 연령이다. 사춘기를 공식적으로 겪고 있을 나이일 것 같다. 밥 먹고 학교가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지겨워질 때쯤에 사춘기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동서양의 신자들은 누구나 사춘기를 겪는다. 우리 누구나 이런 문제를 직면한다. 사춘기는 ‘지금까지 열심히 사회와 학교에 적응하느라고 노력해 온 인생이 꼭 길이 아니다’는 회의를느끼면서 ‘이게 내가 사는 길인가?’하는. 나 자신이라는 존재와 사회 정의 사이의 괴리가 사춘기를 불러일으킨다. 이를 잘 헤쳐나가지 못하면 삶의 질이 굉장히 떨어진다.

 내가 최근에 읽은 유명한 시인의 ‘그 꽃’에 굉장히 유명한 구절이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이다. 올라갈 때는 앞에 있는 사람의 그림자만 보인다. 그러니깐 우리가 학교, 진로, 직장, 결혼 등 인생의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보이는 길은 하나밖에 안 보인다. 그런데 정상에서 내려올 때가 되면 수많은 길이 보인다. 여러분들은 지금은 앞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데, 과연 자신과 또 다른 가능성, 수많은 갈등 속에서 고민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 산다=이 훈련은, 그 자체가 보상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달리, 사후의 세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군자는 “仁이 바로 자신의 존재이며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을 구현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 실현은 오로지 전적으로 ‘나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고 했다. 그래서 그는 타인과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 추구하는 대상이 재산이나 명예, 부 등의 경쟁적 가치라면 원망과 불평이 없을 수 없지만,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불평할 대상이 없다. 이것은 ‘영웅적 기획’이다. 외면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내면성의 자발성에 전적인 힘과 책임을 부여한 철저한 ‘개인주의individuation’의 기획이다. 『중용』은 말한다.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을 사양할 수도 있고, 흰 칼날을 맨발로 밟기는 쉬워도 중용을 지키기는 정말 어렵다.”

 인간은 두 가지의 병을 앓고 있다. 첫 번째 병이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중심적 태도이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어서 새삼 증빙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면, 여학생 5~6명이 유명한 설렁탕집에 음식을 먹으러 갔다. 아저씨가 음식을 나르는데, 여학생들이 항의를 했다. ‘국물에 아저씨 손가락이 빠졌어요’ 이 때, 음식을 나르던 아저씨가 ‘괜찮습니다. 이제 달인이 되어서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여학생들은 국물에 빠진 손가락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빠진 국물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자신의 손가락을 걱정해주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태를 거의 자동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 때를 생각해봐라. 2~3시간 동안 함께 하다가도,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친구가 한 이야기를 3~4개 정도 기억해낸다면 굉장히 잘 들은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가 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독백하면서 대화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현대사회에 들어서 더 증폭됐다.

 첫 번째 문제는 누구나 자기 세계에 고착되어 있어서 밖으로 나가는 창이 닫혀있는 것이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두 번째 문제는 내세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 점령하는 데서 모든 것과 관련돼 있다. 내가 나의 자가발전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남이 시키는 데로 끌려 다니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영향을 받게끔 운명을 타고 나는데 현대에 와서 더 심각해졌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가치에 너무 깊이 매몰되어 있다. 한 정신분석학자는 이런 현대인들의 행태를 두고,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고 있다는 문구를 남겼다. 남의 욕구를 대행해주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24시간 인간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하거나 무얼 하겠다고 생각을 한다면, 이게 얼마나 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는 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나르시시즘의 고착과 타자 지향성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이 24시간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24시간 동안 어떤 사태에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보고 그 동기들을 캐보면 진정 나로부터 생겨난 사실은 드물거나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모든 현자들은 ‘지금 네 행동을 하게 하는 무의식적 동기가 무엇인지’를 읽어야 한다고 한다. SBS 방송국에서 ‘who am I’라는 방송을 하고 있다. 우리가 누구냐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냐고 묻는 것은 무엇이냐, 실제로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묻기 전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이 먼저여야 한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진정 남을 위할 줄 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타자 지향으로 오염되어 있다.” 매스컴이 대신 생각하고, 권력이 우리를 조종한다. 세평과 눈치에 아주 잘 길들여져 있다. 라캉은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대리할 뿐”이라고 통찰한 바 있다. “그럼, 너는 누구냐?” 유교는 진정, 자신의 ‘본성’에 유의하고, 그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때, 자기실현과 공동체의 참여가 바람직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진정 자신이 되는 것과, 타인에 대한 배려는 동전의 양면이다.


학생들과 질의응답


 요즘 인문학 강의 인기가 많은데, 철학이 20년 후 미래에도 지금만큼 지속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실한 상황은 아니지만, 퇴계가 이야기 한대로 인문학, 철학은 소수 변방의 학문이다. 요즘 들어 기업이나 직업 등과 관련된 실용적 학문들이 줄을 서고 있다. 하지만 일상의 24시간 안에 직업과 관련된 학문 외에 삶과 관련한 일에서는 끝없이 인문학을 환기시킨다. 역시 철학은 계속해서 읽혀질 것이라 생각한다. 20년 후에도 실용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 주류에서 자리를 차지하기는 어렵겠지만 삶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계속 살아남고 펼쳐질 것이다.

 13C 기독교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삶과 죽음의 기술을 익히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직업적 문제도 중요하지만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해답 찾기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분들도 지금 당장 취직, 결혼, 직업 때문에 여유가 없을지 모르지만 삶 속에서 철학을 첨예하게 불러일으키는 시기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이 이해가 안 되는 한계의 기로에 설 때 그 경험 속에 인문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가치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 삶을 살아라’고 말했다. 하지만 삶을 살다 보면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쉬운데, 그 두 가지의 경계가 굉장히 모호한 것 같다. 그래서 타인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주체적인 삶을 살면서도 자아를 배제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굉장히 힘든 기술인 것 같다.

 힘들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부모들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너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고 노력하고 있는데 내 자식은 몰라준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분들에게 일단 스스로 행복한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자식들은 위에서 주기만 하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낀다. 정말 진정한 부모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어야 한다. 내가 스스로 행복한 일을 찾고, 여행도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 진정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야만 자식들에게도 힘이 되고 빛이 된다. 자식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자식들에게 독이 되는 말이다. 나를 위해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간다면 그때 나에게 빛이 나는 것이다.

 남을 잘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고 한다. 직장에서 성공하려 해도 눈치가 빨라야 한다고 하지 않느냐. 하지만 진정 밝은 자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자이다. 나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혜인 것이다. 자신을 이기는 자가 진정한 강자이다. 자기 자신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한 부자이다. 자기에 충실한 자가 오래간다고 하고, 죽지 않는 자를 영원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한 자이다.

 마지막으로, 샘이 깊은 물은 밤낮을 쉬지 않고 웅덩이를 채워 태평양까지 간다.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다. 그런데 만약 뿌리가 없다면 7~8월에 비가 쏵 쏟아지면 콸콸 넘치다가 한 순간에 말라버린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거나 타인에게 통제당하는 인생은 한 순간에 빠져버린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위상이 있어도 자기 안에 추궁이 없기 때문에 한 번에 구멍으로 빠져버린다. 여러분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내 에너지로부터 벗어나는 삶을 통해서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있다. 내면에서 끌어오르는 힘과 가치를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행복한 사람으로 다가갈 수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관계가 훨씬 달라진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진정한 자신이 돼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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