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16 바다의 별이 되다
2014. 4. 16 바다의 별이 되다
  • 문희영 기자, 장보민 기자, 주은성 기자
  • 승인 2015.04.1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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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그날, 그 후 그리고 오늘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전 국민이 경악하고 슬퍼하던 그 사건이 발생한지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등 활동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날에 비해 옅어져가는 게 현실이다. 다시 돌아온 잔인한 4월을 맞아, 사건을 되짚어보고 남은 과제들을 함께 고민해 보자.

 4·16, 그 날=지난 해 4월 15일 오후 9시경 세월호가 인천여객터미널에서 출항했다.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과 교사 15명, 일반승객 등을 포함해 모두 477명이 탑승했으며 차량 150여대도 실은 채였다. 4월 16일 오전 8시 45분 전남 진도군 관매도 부근에서 사고가 발생, 52분 전남 소방본부에서 최초로 사고가 접수됐다. 8시 58분 목포 해양경찰청 상황실에도 사고가 접수됐다. 이 때는 이미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 중이었다. 9시 10분경 해양경찰청 구조본부가 가동됐다. 9시 30분 한성호(637호)외 10척이 가장 먼저 도착해 구조작업이 시작됐다. 9시 45분 중앙안전대책본부가 가동됐다. 11시 30분 중앙안전대책본부가 161명 구조, 여성 1명 사망을 발표했다. 오후 12시 50분 단원고 정차웅(18)군의 사망이 확인됐다. 오후 4시 중앙안전대책본부가 총 탑승인원 459명 중 164명 구조, 2명 사망, 293명 실종을 발표했다. 잠수부 160명, 함정 72척, 항공기 18대 투입해 사고현장을 수색했으며 오후 8시 당일 선체 수색이 중단된다.

 그 후=4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은 현장을 방문해 구조를 독려했으며, 검찰은 해경과 함께 합동수사 본부를 구성했다. 4월 18일 1시경 세월호가 완전 침몰했다. 당시 해양경찰청 관계자는 완전 침몰 시에도 수색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4월 23일 검찰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청해진해운 회장)이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다. 유병언은 세월호 최대 주주이자 실질적 오너로서 구조 변경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또한 검찰조사 도중 구원파 지도자로서 종교 단체 기부금을 개인 착복했다는 혐의도 드러나 논란이 됐다. 그리고 이날, 최초 단원고 학생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4월 30일, ‘다이빙벨’이 처음으로 투입됐지만 성과는 없었다. 5월 15일, 검찰이 이준석 선장 등 선원 15명을 전원 구속했다. 7월 22일에는 경찰이 유 전 회장 사망을 공식 발표했으며 그가 자살했는지 타살되었는지의 여부는 발견된 시신이 상당부분 부패해 확인되지 않았다.

 9월 30일,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 협상을 타결했다.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줄여서 세월호 특별법은 사건의 진상규명을 목적으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 때 세월호 특별법은 피해자 의사자 지정, 대학 특례입학 등을 담고 있어 논란이 됐으나, 정작 유가족이 제시한 특별법에는 그 두 가지 내용에 대한 요구사항이 없었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0월 27일에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이 선체 인양여부를 무기명 투표했으며 이날 검찰은 이준석 선장에게 사형, 기관사, 1등 항해사, 2등 항해사 등 3명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11월 2일에는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가 특별법 여야합의안을 수용했다. 11월 11일, 세월호 수중수색이 중단됐으며 이준석 선장이 징역 36년을 구형받았다. 이에 11월 17일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세월호 1심에 대한 검찰, 승무원이 전원 항소했다. 12월 5일에는 광주지법이 세월호 생존자가 확인됐다며 허위 인터뷰를 한 홍가혜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홍가혜는 당시 민간 잠수사라고 자칭하며 인터뷰를 통해 정부가 민간 잠수사들의 구조작업을 차단하고 있으며, 바다 속에서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은 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양경찰청은 민간 잠수사들의 구조작업을 차단한 사실이 없고 이날도 70여명이 동참하고 있었다고 해명했다. 그녀는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검거됐으나 구조작업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인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올해 3월 2일에는 ‘일간베스트’에 세월호 희생자를 어묵으로 비유해 비하한 사건이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해당 회원은 징역 1년을 구형받았다. 3월 16일에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다시, 4·16=현재 세월호는 인양되지 않은 상태이며, 아직 9명의 실종자가 남아있다. 아직 침몰의 원인 또한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해양수산부 세월호 선체처리 기술검토 전담팀에 따르면 현재 세월호 인양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며, 1년의 시간과 1600억 원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세월호를 기록하다’의 저자인 오준호 작가는 “인양은 당연히, 하루 빨리 해야 하는 부분”이라며,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선 증거가 필요한데, 증거확보에 가장 중요한 선체 현장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전했다.

 또한 최근 정부가 내놓은 특별법 시행령으로 인해 세월호 특별법으로 만들어진 특별조사위원회의 규모·권한·독립성이 약화될 것이라는 비판여론이 일고 있다. 이 시행령에 따르면 기존 특별조사위원회 인원이 125명에서 90명으로 줄었으며 사무처 역할을 파견 공무원이 당담하는 것으로 나와 있어 유가족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 하지만 처음에는 같이 슬퍼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서서히 잊어가고 있고, 심지어 유가족에 대한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서로 소통하고 공감해 이 사건을 잘 갈무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논란이 없도록, 정부는 투명하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2014년 4월 16일

 “세숫대야에 얼굴만 담그고 있어도 숨이 막히는데,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보냈다. 수장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세월호 사고 피해자인 단원고등학교 2학년 4반 故정차웅 군의 어머니 김연실 씨(48세)가 사고 당시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사고 후 자식을 보낸 아픔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채 목소리를 내기위해 거리로 나와야만 했던 유가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1년간 거실 불을 끄지 못했습니다=김권식 씨(54세)는 세월호 사고로 단원고등학교 2학년 4반에 재학 중이었던 아들 김범수 군을 떠나보냈다. 김 씨는 “우리 아들은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함께 다니면 많은 사람이 부러워했다”며, “영어도 잘하고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착한 아들이었다”며 자랑했다. 수학여행 당일 김 씨의 아들은 새로 산 헤어드라이어로 기분 좋게 머리를 말리고, 김 씨가 챙겨준 가방을 메고 떠난 뒤 사고를 당했다. 결국 김범수 군은 2014년 4월 22일 오후 7시 싸늘한 주검이 돼 김 씨의 품으로 돌아왔다. 16일 난생처음 배를 타고 친구들과 떠나는 수학여행에 신나서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김 씨가 본 아들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고가 난 지 1년이 지났지만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는 시간, 여전히 김범수 군의 집 거실 불은 꺼지지 않고 있다. 혹시나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까 하는 마음에 지난 1년 동안 단 한 번도 거실 불을 끄지 못한 것이다. 또한 아들의 영정사진은 보자기에 곱게 싸인 채로 김 씨의 차에 실려 있다. 아버지는 차마 아들의 영정사진을 가지고 아들의 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는 현실에 김 씨의 마음은 1년 전보다 훨씬 더 아프다.

 남은 9명을 포기할 수는 없어요=단원고등학교 2학년 4반 故정차웅 군은 사고 당시 본인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주고 다른 학생을 구하다 희생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의 어머니 김연실 씨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1주기라고 하지만 우리 부모들에게는 언제나 4월 16일이다”며 “지금도 아들이 옆에 있는 것 같고,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고 전했다.

 김 씨는 “사고가 나면 현장검증을 하는 것이 우선인데, 배를 인양하지 않는 것은 물속에 남은 9명을 포기하라는 것”이라며 남은 실종자 수색을 포기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어 김 씨는 “유가족들도 너무 마음 아프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더 이상 실종자 가족이 아닌 유가족이 되고 싶어한다”며 빠른 시일 내에 실종자들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냈다.

 세월호 사고 초기에는 많은 국민의 애도 물결이 이어졌으나, 해결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에 사고 초기 애도를 표하던 많은 이들이 사고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김 씨는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이유로 국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민원 신청 접수조차 일부 기관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이들도 찾아야 해 힘을 보태주겠다는 야당이나 시민단체의 손이라도 잡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정치적으로 비친 것 같다”며 사고 해결을 위한 것일 뿐 피해자 가족들은 정치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인터뷰 당일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은 광화문 행진에 나섰고, 많은 비가 내렸다. 김 씨는 “부모님들이 광화문 행진에 나설 때마다 비가 온다. 우리 아이들이 울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지금 흘리고 있는 피해자 가족의 피와 땀의 절규가 흐지부지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4‧16가족협의회, ‘진실을 밝힌다’=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들은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이하 4‧16가족협의회)’를 조직했다.

 4‧16가족협의회 故이태민 군의 어머니 문연옥 씨(44세)는 “작년 4월 16일을 똑같이 겪는 기분”이라며 1주기를 맞는 심정에 대해 말했다. 세월호 참사 후 1년이 지난 지금, 4‧16가족협의회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또 유가족들은 ‘터무니없는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싸우고 있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오랜 시간 힘겨워했다. 지금은 세월호 참사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묻으려 하는 세력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 문 씨는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등지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어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은 어떠한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처럼 유가족들은 진상조사와 세월호 선체 인양, 정당한 특별법 제정을 바랄 뿐이다.

 또한 유가족들은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놓을 수 없다. 직장에 나가면 사람들이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주변의 시선 때문에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문 씨는 “지금은 정신없이 살지만 일이 해결되고 나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내가 늙어서 얼른 저세상으로 갈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4‧16가족협의회 측은 바다에 있는 아이들이 모두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게 힘쓸 것이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또한 좋은 공간 안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싶다고 전했다.

 시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월호 참사=‘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이하 작가기록단)’은 글을 쓰는 작가와 영상작가, 사진작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사고를 기록하는 단체다. 작가기록단의 오준호 작가(40세)는 “이 사건을 정부의 눈이 아닌 시민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 참여하게 됐다”고 전했다.

 오 작가는 작가기록단 활동을 하며 현장에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국회의사당까지 도보행진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오 작가가 바라본 그들은 특례에는 무관심했고 단지 진실규명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진실의 규명에 있어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투명하고 합의와 수긍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할 때 ‘슬펐던 사건’이라는 것은 기억하겠지만 ‘무엇 때문에 슬펐는지’, ‘책임자는 누구였는지’는 잊힐 것”이라며 진상규명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말했다.

 작가기록단은 앞으로도 사건과 관련한 기록물을 저장하고 생존자들의 진술을 기록할 것이다. 또 5~6월경 이를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도 제작할 예정이다. 끝으로 오 작가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똑같이 미안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며 “사건 이후에도 변한 것이 없거나 잊어버리게 된다면 그때는 모두가 정말 미안해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세월호 사고, 그 현장을 담다

 2014년 4월 16일은 일반 사람들에게 잊혀져가고 있지만, 세월호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이에 세월호 사고의 중심 현장들을 방문해 2014년 4월 16일에 멈춘 시간을 담아봤다.

 이어지는 발길, 안산 합동분향소=지난 4일과 5일은 세월호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들의 광화문광장 집회로 인해 조문이 중단됐다. 그러나 분향소를 찾는 조문객들의 발걸음은 계속됐다. 그중 1주기를 맞아 방문한 정영아 씨(32. 작사가)는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분향소는 시간이 멈춘 것 같고, 해결된 것이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이어 그는 “끝까지 같은 편에서 응원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눈물을 훔쳤다.

 안산 합동분향소에 마련된 간이교회에 기도를 하러온 A 씨(64. 회사원)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실종자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조금이나마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또한 ‘신속한 진상규명’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1년간 보여준 유가족의 모습은 투사 아닌 투사”라며 “세상과 싸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존경스럽기도 하다”고 전했다.

 이석희 자유총연맹 안산시지회 사무국장은 지난해 4월 17일부터 매일같이 안산 합동분향소에 나와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에 대해 이 사무국장은 “유가족들은 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보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야당이나 시민단체를 따라간다는 생각이 든다”며, “하지만 이를 국민들이 부정적으로 보고, 애도의 마음이 멀어진 것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같이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원만히 해결돼 합동 영결식까지 잘 끝내고 유가족들도 생업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어느 곳보다 더 찬바람이 부는 팽목항=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1년이 돼가는 지금, 팽목항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이 찬바람을 막기 위해 시민들은 계속해서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박성만 씨(43. 목사)는 정기적으로 팽목항을 방문하고 있다. 박 씨에게 세월호 참사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식구들이 사건을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구조에도 참여했기 때문이다. 박 씨는 “빠른 선체인양과 진실규명을 바란다”며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위해 많은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위로했다.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는 김정엽 씨(47. 회사원)는 세월호 참사를 “마음속에서 잊히지 않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된다’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힌다”며 세월호 희생자 가족에게 애도를 표했다.

 시간이 멈춘 안산 단원고=2014년 4월 16일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세월호에는 476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탑승객 중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이 있었고, 이에 많은 어린 학생의 희생에 사고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현재 안산 단원고의 시계는 2014년 4월 16일에 멈춰있다. 2학년 학급이 있는 2층과 3층 복도에는 추모의 글로 빼곡했다. 그리고 교실 내 희생자들의 책상에는 꽃과 영정사진, 유품 등이 놓여있다. 꽃이 놓이지 않은 책상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이는 많은 학생이 사고로 인해 희생됐는지를 보여줬다. 故정차웅 군의 어머니 김연실 씨는 “벚꽃이 예뻐 아이들이 교생선생님과 함께 우연히 찍은 사진이 마지막 단체 사진이 됐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4․16가족협의회와 4․16기억저장소 주최로 ‘4․16 세월호 참사 기록전시회-아이들의 방’이 안산시 4․16기억전시관에서 열렸다. 이는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의 주인 없는 빈방을 찍은 사진전으로 남은 실종자를 모두 찾을 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생전 아이들이 남긴 말과 함께 방문객의 메시지가 전시회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애타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던 피해자 가족들이 진도 체육관에서 사용한 이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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