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 주은성 기자
  • 승인 2015.04.09 15: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각하는 존재? 고집하는 존재!=“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말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사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의식세계’, ‘내가 지금 생각하는 바’들은 내가 태어날 땐 분명 없던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비유컨대, ‘생각의 주머니’를 차고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엔 그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각자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다시 말해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을 통해 차차 채우게 된다. 그리고 각자는 ‘지금 생각하는 바’에 따라 살아간다. 스피노자가 강조했듯이 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에게 일상적으로 생각을 묻는데 반해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생각을 묻기는커녕 아이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을 잘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면 또 다른 “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걸 차단할 목적으로 “크면 다 알아!” “나도 몰라” “몰라도 돼!” 등으로 대꾸한다. 이렇게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서 거부당한 “왜”라는 질문을 누구에게 덜질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왜?”라는 질문을 받아줄까?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한국사회는 “왜?”라는 질문이 죽은 사회가 된다. “왜?”라는 질문이 죽은 사회에서 논리의 추구, 합리성의 추구, 토론 문화는 설자리가 없다. 


 자기 생각을 수정하려면 자기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성찰과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남들이 사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더욱 물어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갖고 있으며, 계속 고집하기 때문에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고.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이긴 하나 생각하는 바에 관해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요컨대, 내가 갖고 태어나지 않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바’들이 어떤 경로로 내 안에 들어왔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형성=내 안에 생각을 집어넣는 실제 주체인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춰 나가면서 기존에 형성된 생각을 끊임없이 수정하여 나의 주체성을 확장해야한다. “객관성이라는 것은 대부분 지배세력의 주관성이다”라는 말을 되새겨본다면, 내가 고집하는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닐 때, 지배세력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이어서 그것을 고집하며 살지만 나에게 그 의식을 갖도록 한 주체는 내가 아니라 지배세력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제도교육과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분석이 요구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간을 이해하는 눈,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은 일방적 주입의 범위를 벗어나게 해주는 폭 넓은 독서와 토론 수업, 현장 수업 없이는 갖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나의 의지와 무관하고 내 존재와 무관한 생각을 갖고 있을 수 있다면, 나라는 존재가 응당 갖고 있어야 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도 성찰적 물음이 제기되어야 한다. 내가 응당 갖고 있어야 하는데 갖고 있지 못한 생각에 대한 성찰은 내가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한 성찰보다 더 어렵다. 가령 우리는 모두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초·중·고 시절에 두루 있는 사회 과목에서 가장 중요하게 공부해야 할 내용으로 빠져선 안되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 관한 공부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에 대한 공부는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주입식 암기교육의 문제점=인문사회과학은 생각과 논리를 요구하는 학문으로서 정답이 없는 학문인데 우리의 서열화된 대학은 초·중·고 교육을 대학입시교육으로 종속시킴과 동시에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도록 요구했다. 인문사회과학을 생각과 논리가 없고 정답이 있는 ‘반(反)학문’으로 왜곡시킨 배경이다. 학생들에게 생각과 논리를 물어서는 일등부터 꼴등까지 정확하게 줄을 세울 수 없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 사물과 현상에 관해 묻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갖도록 요구하는 대신 객관적 사실에 관해 암기하도록 요구할 뿐이다. 생각과 논리의 학문이 암기과목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가령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펼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독서와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이 둘을 거의 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교실에서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인간과 사회에 관한 더욱 정교하고 풍요로운 내용의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토론이 이루어질 때, 한국의 교실에서는 학년이 올라가도 계속 객관적 사실을 암기하고 있는지만 묻는다. 간단하고 쉬운 질문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생각과 논리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한마디로, 우리 학교는 학생들을 ‘생각하는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암기하는 기계’, ‘숙지하는 로봇’으로 바라볼 뿐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인데! 


 글쓰기의 중요성=한국에서 남다른 교육 자본을 형성하여 사회 상층을 차지한 사람들은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뜨기에 있어서 올바른 생각, 풍요로우면서도 정교한 생각을 검증받은 게 아니다. 오로지 암기와 문제풀이를 잘해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인간과 사회에 관해 질문을 던질 줄 모르고 오직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암기와 숙지에 뛰어나다는 점은 그들이 기존체제나 질서를 지키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 중 대부분이 세계를 보수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배경이다. 


 한국의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이전에 독서와 글쓰기가 사라진 초·중등 학교의 암기 위주의 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 만큼 자아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에 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갖게 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인문사회과학을 암기과목으로 바꾼 탓에 학생들에게 흥미를 갖지 못하게 한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학생들은 사물과 현상에 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펼 때 공부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생각하는 주체를 위하여=다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생각하는 동물인 나는 지금 갖고 있는 내 생각을 고집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은 태어났을 땐 갖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지배할 내 생각은 어떤 경로로 내 것이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교육 경험에 맞게 보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은 다음 보기의 각 경로를 통해 얼마나 내 것이 되었을까 생각해보자. 물론 정확하게 계량할 수 없는 거친 질문이지만, 이 질문이 성찰의 계기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1) 폭넓은 독서 
2) 열린 자세의 토론 
3) 직접 견문(다양한 경험, 여행 등) 
4) 성찰 
내가 나의 생각의 세계를 형성하거나 확장하고자 할 때 참조할 대상은 사람밖에 없다. 사람처럼 생각하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폭넓은 독서’란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 중 책을 남긴 사람’의 생각을 내가 ‘주체’적으로 참조하는 것”이다. 어떤 책도 우리에게 읽을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모든 책은 닫힌 채 서가에 가만히 꽂혀 있을 뿐이다. 그 책들을 내가 펼쳐 읽는 것이다. 


 나에게 ‘열린 자세의 토론’이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생각을 열린 자세로 참조하려고 ‘주체’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또 나에게 ‘직접 견문’이란 “오감을 가진 ‘주체’로서 직접 보고 겪고 느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찰’이란 폭넓은 독서와, 열린 토론, 그리고 직접 견문을 통해 만나는 뭇 생각들이 소우주와 같은 나의 의식세계 안에서 서로 다투고 비벼지고 종합되고 정리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상의 네 과정을 통해 주체적으로 형성한 의식세계의 소유자는 자기 삶에 책임을 지며 아무리 팍팍한 세상이라도 당당할 수 있다.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위의 네 경로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인 것임에 반해, 주입식 암기와 문제풀이로 채워진 제도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주입된 생각은 주체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독서와 토론, 직접 견문과 성찰의 과정은 내가 주어로서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제도 교육과 미디어에 나는 주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객체이며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주체적으로 의식을 형성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춘다면 그만큼 문화수준이 높아지고 성숙된 사회가 될 것이다.

 

학생들과 질의응답

남들과 비교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여러 사람과 교류를 하며 살아가는데 이 비교를 잘 활용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이 친구는 이렇고, 나는 이렇다”를 인정하면 나를 좀 더 발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 아까 말한 비교는 서로 장점을 주고받는 교류 보다는, ‘내가 더 낫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려는 저급한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이런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사회 문화적 소양이 낮은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런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낮은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의 예를 들면 우리가 이주 노동자를 대할 때, 내가 그들보다는 낫다는 우쭐함을 대부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아닌, 장점을 교류할 수 있는 비교라면 당연히 긍정적인 방향입니다.


 선생님께서 풍부한 관계를 원한다면 열린 대화와 토론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남자친구와 풍부한 관계를 위해 싸울 때마다 대화로 생각을 맞춰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대화를 거부하고 짜증을 내며 대화를 단절하는데,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집요해야 합니다. 절대로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다들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런 자세가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살아가면서 느낄 것이지만, 쉽게 이뤄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말 어렵게 이뤄지는 일이 의미가 있습니다. 


 교수님 강연을 듣던 중 “우리 사회가 논리는 없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하는 모습들”에서, 현대 사회가 합리주의 사회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비합리적인 일들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확장하더라도 주변이 비합리적인 세상인데,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며 살아가야 하나요? 
자기를 지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솔직히 세상은 비관적입니다. 적어도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은 비관적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베케트의 표현을 좋아하는데, ‘실패하라, 조금 더 낫게 실패하라’입니다. 결국 어려움이 있다 해도 어려운 만큼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길이 아니고,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세가 필요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대학교 처음 들어와서 어른들에게 “어떤 책을 읽으면 좋습니까?”하는 질문을 했을 때 “고전명작을 읽어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공자의 논어나 국가론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근데 저는 이에 대해 약간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 책은 각 분야 최고 권위자 분들이 쓴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들인 저와 같은 입장에서 혼자 책을 읽어서 혼자 사유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같이 사회 초년생이 고전명작을 읽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교수님이 여러 책을 읽으시면서 “이 책은 정말 좋구나” 했던 것이 있었다면 한 권 소개 해 주십시오.


 우선 반감까지 가지지는 마시구요. 인문학 공부를 할 때에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궤도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주지 않고 단순히 하나의 책을 읽는 과정이라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거의 숙지하듯 읽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자기 삶의 궤도를 수정하거나 자기 삶에 작용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내 삶을 성찰하고 궤도를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준다면, 내 삶의 일상 자체에 용기를 준다면 그것이 인문학이고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숙지하듯 읽지 말고, 책은 책을 부르기 때문에 나한테 다가오는 책, 그 책을 중요하게 여기세요.

 책 하나 소개해 달라고 말씀하셨는데, 대한민국 국민이니 역사는 기본입니다. 전태일 평전, 대한민국사 등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 책은 16세기 프랑스 사람이 쓴 책인데『자발적 복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작은 책자인데, 프랑스에서는 마키아벨리 군주론 만큼 많이 읽히는 책입니다. 저자가 19살 때 쓴 것인데, 노예는 자기 신분상 어쩔 수 없이 복종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은 본인이 노예이면서도 노예인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엔 너무나 많은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이 있어 보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