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라
  • 천정우 기자, 주은성 기자
  • 승인 2015.03.1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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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철학자 강신주가 천마아트센터 챔버홀에서 ‘자기로의 여정’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사진 주은성 기자

 대학 강단에 서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집필과 대중 강연으로 너무나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당시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파릇파릇한 대학생들, 그것도 신입생들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니 어쩌면 시샘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인생이라도 펼쳐질 수 있는 그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부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자신의 폭발적인 잠재성을 별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일부 대학생들은 고등학교 시절의 연장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이래서야 어떻게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것, 교재가 원서로 바뀐 것, 그리고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강의를 듣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대학 신입생들은 대학이 고등학교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럴까, 과연 그럴까? 오히려 변하지 않았던 것은 교육 기관이 아니라 신입생들 자신 아니었을까.

 

 안타까움에서 나는 첫 강의를 다음과 같은 화두로 시작하곤 했다. “여러분들은 20살로 살 것인가, 아니면 1살로 살 것인가.” 당연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학생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사실 나의 화두는 지금까지 부모님과 선생님, 그러니까 사회가 원하는 것을 자신의 꿈인 양 살아왔다는 사실을 자각하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하긴 스스로 독립할 수 없었던 나약한 유년기와 청년기에 우리가 어떻게 부모님과 선생님의 꿈을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정신분석학자 라캉도 말했던 것이다.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이다. 정확히 말해 나를 돌보아주고 있는 타자가 원하는 것을 우리는 원할 수밖에 없고, 그가 금지하는 것을 금기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나 선생님이 높은 성적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높은 성적 얻기를 욕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이 집이나 교실을 어지럽히는 것을 싫어한다면, 우리는 더러워짐을 금기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욕망을 실현하고 그들의 금기를 따른다면, 그들로부터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분명해지지 않은가. 이제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지금까지 억압했던 자신의 욕망을 되찾아야 할 때이다. 그래서 20살로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타자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라면, 1살로 산다는 것은 드디어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분명 20살로 사는 것이 1살로 사는 것보다 편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20년 동안 익숙했던 걸음걸이로 걷는 것이 새로운 걸음걸이로 아장아장 위태롭게 걷는 것보다 더 안전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젊은이들이 20살의 안락함을 버리고 1살의 위태로움을 살아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기 위함이다. 타자가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러니까 타자의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기보다 타자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노예로서 삶을 잘 영위한다면, 행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주인이지 우리가 아닐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주인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그러니까 첫 강의 시간에 던진 나의 화두는 자신의 삶을 노예로서 영위할 것인가, 아니면 주인으로서 영위할 것인가를 결단하라는 시급한 요구였던 셈이다.

 싯다르타가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제자들은 몹시도 슬퍼했다. 스승이 없어지니 자신의 갈 길이 막막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제자들에게 싯다르타는 마지막 사자후를 남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개나리는 개나리로 만개하고, 히아신스는 히아신스로 만개하고, 장미는 장미로 만개할 뿐이다. 그러니 히아신스가 장미를, 장미가 개나리를, 개나리가 히아신스를 모방할 일이 아니다. 물론 아직 자기만의 꽃을 피우지 못한 제자들, 다시 말해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가 자신의 이상형으로 보일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아는가. 이 세상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존귀하다는 선언은 싯다르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 나아가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직 자신이 존귀하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들은 안데르센의 동화에 등장하는 미운 오리 새끼일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모르니, 멋진 오리가 되려고 욕망할 수밖에. 이럴 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가르침은 너무나 절절한 것이다.

 자신의 잠재성을 긍정하고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 바로 주인의 삶이다. 아니면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주인의 삶이라고 해도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나만의 욕망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사실 나만의 욕망이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나만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각인된 욕망인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금 나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나만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까? 혹시 나만의 욕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주인의 삶을 영위하려고 시작하자마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의문들이 눈사태처럼 몰려올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신만의 욕망을 되찾을 수 있을까? 혹은 자신만의 잠재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 별다른 방법이 있을 수가 없다. 그저 무엇이든지 직접 스스로 부딪히고 느끼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욕망할 때 가장 행복한지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할 테니까 말이다.

 대학에서 정해준 일정, 학생회에서 개최하는 행사만으로 나의 욕망을 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 어떻게 술이나 게임에 취해있고, 그리고 치기만만한 행동에 아무 생각 없이 휩싸일 여유가 있다는 말인가. 지금과는 완전히 새로운 것, 지금까지의 삶에서 감히 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에 기꺼이 몸을 던져야 한다. 아마도 그런 것들은 부모나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 것, 혹은 세상이 자신의 삶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이 하지 않은 것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번지점프를 하지 않은 사람만이 번지점프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법이다. 최소한 번지점프대에서 서너 번 뛰어내린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번지점프는 내게 맞지 않는다”고 말이다. 물론 많은 경우 나의 욕망을 찾기보다는 피로와 환멸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피로와 환멸마저도 부정적이나마 나의 욕망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법이다. 최소한 내게 피로와 환멸을 가져다주는 것은 내가 욕망하는 것이 결코 아닐 테니까 말이다. 결국 나 자신을 찾는, 나만의 욕망을 찾아가는 여정은 너무나 힘들고 위태로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처음만 그렇다. 1살의 걸음이니 어떻게 좌충우돌하는 위태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생각해보라.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2살이 될 것이고, 3살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0년 뒤 10살이 될 것이다.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주변 사람들은 타인의 욕망대로 30살이 되어있을 때, 우리는 당당히 주인으로 10살의 걸음, 자기만의 걸음을 걸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최재목 교수(철학과)

스무 살의 인문학, 청춘에게 길을 묻다

 최재목 교수(철학과)가 개설한 이번 강좌는 매주 각계각층의 인문학 관련 명사들의 강의가 13주 동안 릴레이로 진행된다. 지명도 높은 석학급 인문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지역대학에서는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재목 교수를 만나 이번 강좌를 개설한 이유에 대해 들어봤다.

 스무 살의 인문학은 어떤 강좌인가?
 이 강좌는 영남대학교 학생들이 대학 시절에 꼭 거쳐야만 할 ‘명품 교양과목 만들기’의 일환으로 구상된 과목이다. 보다 창의적이고 희망적인 길을 학생들 스스로가 본인에게 묻도록 유도하고, 명사들과 소통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20대의 청춘들이 좌절, 절망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창의적으로 이끌어가는 역량을 기르기 위한 수업이다.

 이 강좌는 20대 청춘들이 가장 관심 있 는 주제들을 13주 동안 다룰 예정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모색하고, 개척하는 능력을 함양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고, 어떻게 살 것인가, 돈은 왜 벌어야 하는가, 성공한 삶은 무엇인가, 방황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등에 대해 고뇌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인문학 관련 강좌를 개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문학 강좌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정작 대학 내에는 조용하다. 또한 학생 수도 감소하는 등 대학이 어려운 시기에, 취업난도 겪고 있는 학생들이 사회에 굴하지 않고 자유롭게 본인의 인생을 넓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개설했다.
이번 강좌의 경우 경산시, 대구광역시 등 여러 기관에서 벤치마킹하러 오고 있다. 이 강좌가 영남대학교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강인원이 한정돼 있어 못 듣는 학생들도 많다.
수강꾸러미 때 840명이 강좌신청을 했다. 아쉽지만 공간의 문제, 학생관리의 문제, 강의실 대여료 문제 등으로 많은 학생들이 듣지는 못하고 있다. 대신 이번에 못들은 학생들을 위해 강연내용은 학교 홍보실과 협조해 학교 홈페이지에 올려놓을 예정이다.
앞으로 김제동과 같은 유명인사도 초청할 예정인데, 그때는 천마아트센터 그랜드홀을 빌려서 강연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들을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할 생각도 하고 있다.
 

 다음 학기에도 이 강의가 진행되는가?
 다음 학기엔 자연과학과 예술 분야의 다양한 명사들로 구성해서 이번과 유사한 강좌를 만들 예정이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도 부를 생각이다. 일체 외부강의를 안하는 분들이 많아 힘들긴 하지만, 압량벌에 앉아서 국제적인 가치, 값어치 있는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외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헤르만 헤세가『데미안』의 앞머리에서 말한 내용이 있다. “인간의 일생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다다르기 위한 여정, 아니 그러한 길을 찾아내려는 실험이며 그러한 오솔길의 암시이다.”,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깊이를 지닌 어떤 실험이며, 자기 운명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존재이다.” 대학생들은 옆 걸음으로 돌아다니시는 횡행거사인 꽃게가 자신의 걸음걸이를 뽐내듯이, 스무 살 젊은 시기부터 ‘남의 흉내’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걸음걸이를 익혀나갔으면 한다.

 또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이번 강좌를 통해 얻었으면 좋겠다. 쫄지 말고 도전해서 내가 누군지를 알고, 원하는 것을 찾아가길 바란다. 일류 회사의 취직이 아니더라도, 나를 펼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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