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문화상 가작-영화평론] 핑계
[천마문화상 가작-영화평론] 핑계
  • 신성철(법학2)
  • 승인 2014.12.04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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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의 메시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독이 영화를 통하여 관객에게 주는 ‘영향’을 기준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즉, 심오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힘을 빌려 관객에게 문제제기를 하고 교훈을 주어, 영화가 끝난 뒤에 그들을 ‘생각’ 하도록 만드는 요소가 바로 ‘영화에서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나에게 항상 고민을 안겨주는 장애물이 하나있으니, 그것이 바로 ‘메시지’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메시지는 중요하다. 이것이 담겨져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는 영화에 큰 가치를 두려하지 않는다. 재미와 문제의식을 모두 담은 영화는 보통 대중들과 평론가들에게 큰 칭송을 받으며 ‘명화’의 반열에 오른다. 메시지는 어느새 명화가 지녀야할 필수요소가 되어버린 듯하다.

하지만 창작하는 입장에서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재미에 치중하면 진중함이 부족한 듯하고, 메시지에 치중하면 재미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사실 메시지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해석하기 나름’이어서, 일단 이야기를 모두 풀어낸 뒤 나름의 의미부여를 해내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나의 경험상, 가장 졸작은 이런 태도를 지녔을 때 탄생하였다.

그렇게 나에게 탄생한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반드시 메시지를 담아야 좋은 영화인가?’ ‘메시지를 담지 않은 영화는 좋지 않은 영화인가?’ 지금부터 나에게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할 영화들은 ‘메시지를 담지 않은’ 영화들이다. 그 중에서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 거친녀석들’에 대한 평을 중심으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는 ‘B급’의 색채를 짙게 가지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메시지’란 찾을 수가 없다. 일전에 타란티노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펄프 픽션’에 대한 한 평론에서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는 ‘비(非)도덕적’이 아니라 ‘무(無)도덕적’이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정말로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화 속에서 사람을 하나 죽이는 일은 길바닥에 침을 뱉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에서 메시지를 찾으려는 시도는 어쩌면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단순 오락 영화 그 이상이며, 수많은 작품들이 명작으로서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의 폭력 일색 영화들을 명작으로 만들어 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타란티노 감독만의 일관된 ‘개성’일 것이다. 타란티노 감독은 항상 자신만의 표현 기법을 모든 영화에 담아내어서, 그를 이미 알고있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어느 대목에서 보기 시작하더라도 단숨에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구나’하고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든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기법은 바로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를 듬뿍 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 중에 등장인물들이 먹는 ‘음식’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 담길 수 있는 평범한 요소로 보이지만, 그의 영화에서 대화와 음식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능과 의미를 지닌다. 타란티노 감독은 ‘식당 종업원에게 팁을 왜 주는가’ ‘보스의 아내에게 발 마사지를 해주는 것은 불륜인가’하는 시시콜콜한 주제로 등장인물이 열변을 토하는데 10분을 넘게 할애한다. 또 인물들이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눌 때면 단순히 입에 음식을 넣고 먹는 것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핫케잌에 겹겹이 시럽을 바르는 것부터 커피에 설탕을 몇 스푼 넣는지까지 보여주기도 한다.

타란티노 감독은 이런 기법들을 무슨 생각으로 영화에 담아낸 것일까? 단순히 인지를 쉽게하기 위해서일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로 타란티노 감독은 인물 간의 대화가 진정한 극의 묘미를 만들어내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의 영화 속 배우들의 열띈 대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에너지와 몰입감은, 지나치게 영상미에만 치중한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둘째, 타란티노 감독은 ‘음식’을 먹을 때가 인간이 긴장을 내려놓는 가장 순수한 순간이라 생각했다. 그의 생각대로, 쉴새없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해 다른 어떠한 예측도 배제하고 그들의 대화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사소하게 느껴지는 그의 이런 기법들에는, 엄청난 영화광이었던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철학이 십분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는 늘어지는 듯 하면서도 강하게 몰입감을 주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이 매력의 극치를 담아낸 작품이 바로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이다.

‘바스터즈’는 히틀러의 나치군과 그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크게 세가지의 이야기를 섞어 놓았다. 타란티노 감독은 자신의 특기인 옴니버스 형식을 빌려 유태인으로 구성된 미군 소속의 ‘바스터즈 특공대’와 어린 시절 나치에게 가족을 여의고 홀로 극장을 운영하는 ‘쇼산나’, 이중첩자 ‘본 하멜스마크’와 그를 접선하는 영국군 소속 ‘히치콕’ 소위에 대한 세가지 이야기를 엮어놓았다. 하지만 앞서 강조하였던 ‘타란티노 식 대화의 극치’는 나치군 인물들로부터 유발된다. 그 주역들은 바로 비밀경찰 ‘한스 란다’ 대령과 ‘헬스트롬’ 소령이다. 이 둘을 통하여 타란티노 감독은 ‘바스터즈’라는 작품에 이전부터 계승되어온 기법들을 충실히 담아내는 동시에 이전과는 또 다른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 속 한스 란다 대령과 헬스트롬 소령이 맡고있는 비밀경찰 이라는 직책은 나치군 주둔지에서 활동하는 ‘첩자’를 잡아내는 것이 주 임무인데, 이러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들은 ‘알면서 모르는척 속아주는’ 방식으로 주인공들을 상대하며 기나긴 대화 속에 지루할 틈이 없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한스 란다 대령은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한다. 란다 대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한 농가에 들어가고, 집의 주인인 농부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는 얼마 뒤 농가의 바닥 아래 유태인 가족이 입을 막고 숨어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한스 란다라는 인물이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하고, 그의 상냥한 표정과 말투는 숨어있는 자들에 대한 ‘선처’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유도 한 잔 따라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여유롭게 심문을 하던 란다 대령은 농부에게서 유태인 가족을 집에 숨기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만다. 그렇게 그의 부하들에 의해 쇼산나의 가족들은 모두 총살되고, 홀로 살아남아 도망치고 있는 어린 쇼산나에게 란다 대령은 밝은 미소로 ‘또 보자’고 외친다. 이렇게 영화의 시작에 한스 란다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밝혀진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스 란다 대령과 쇼산나가 다시 조우한 장면에서 더욱 극적인 서스펜스가 만들어진다.

한스 란다 대령과 쇼산나가 다시 만나게 된 배경은 이렇다. 나치는 전쟁 영웅 ‘프레드릭 졸레’의 실화를 담은 ‘국가의 자랑’이라는 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히틀러를 포함한 수많은 나치 중역들을 초대하여 시사회를 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실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프레드릭 졸레 본인으로, 이 자는 쇼산나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던 인물이다. 영화의 개봉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영화 개봉 장소를 쇼산나의 영화관으로 변경한다는 명분으로 영화의 감독이자 나치의 2인자인 ‘괴벨스’가 있는 식사 장소에 졸레가 쇼산나를 초대한다. 헬스트롬 소령에 의해 강제적으로 레스토랑에 끌려온 쇼산나는 여기서 한스 란다 대령을 맞닥뜨리게 된다. 쇼산나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겁을 먹지만, 란다 대령은 ‘못보던 아가씨네’하는 표정으로 내려보다가 이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이 악의 없어 보이는 행동이, 다시끔 란다 대령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상기시킨다. 이후 보안 담당으로서 쇼산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야겠다며 란다 대령은 쇼산나와 단 둘이 레스토랑에 남게된다. 그렇게 원수와 적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곧 음식이 등장한다. 란다 대령이 친절하게 주문해준 ‘스트루델’이라는 디저트이다. 여기서부터 란다 대령이라는 캐릭터와 극적인 상황 설정이 맞물려 란다 대령의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 모두 관객의 경계심을 유발하는 작용을 한다. 이 장면에서는 란다 대령의 대사나 행동이 직관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떠오르게 하여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부분이 있고, 특별한 의미가 없는 말과 행동임에도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부분이 있다. 전자의 경우를 예를 들자면 란다 대령이 쇼산나에게 ‘우유’를 주문해주는 대목이 있다. 우유는 쇼산나의 가족이 피살 되었던 농가를 직관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상징물이다. 이 상징물은 쇼산나의 정체를 란다 대령이 이미 파악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추측하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의 예는 긴장한 쇼산나가 급히 디저트를 먹으려하자 란다 대령이 ‘크림이 나올때까지 기다리라’고 막는 부분이 있다. 이 대목에서는 란다 대령이 쇼산나가 긴장하는 모습을 즐기는 듯한 기분을 들게하여 긴장감이 유발된다. 전자와 후자의 중간 정도의 뉘앙스를 지니는 대목도 있다. 바로 대화의 마지막이다. 대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스 대령은 먹다 남은 디저트에 몇 모금 빨아들이지 않은 담배를 끈다. 이전까지 심문을 하며 매우 맛있게 먹던 디저트를 ‘더 먹지 못하는 상태’로 만드는 행위는 관객에게 어떠한 공격성이 내포된 것으로 다가온다. 즉, 이 행위를 통해 심문이 끝났음에도 란다 대령이 쇼산나의 정체를 이미 파악했을 가능성을 관객이 끝까지 놓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의 두 장면을 포함하여 란다 대령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등장해 주인공들을 괴롭힌다면, 헬스트롬 소령은 영화에서 딱 두 장면만 등장한다. 그 중 한 장면도 앞서 묘사했던 레스토랑 씬에 잠시 등장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나머지 한 장면 속의 헬스트롬 소령은 내가 꼽는 ‘바스터즈’의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바로 ‘키노 작전’ 씬이다. 독일에서는 유명 배우로, 영국에서는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는 이중첩자 본 하멜스마크는 ‘키노 작전’을 위한 접선장소로 파리 외곽의 한 변두리 지하 술집을 선택한다. 두 명의 바스터즈 특공대원과 히콕스 중위는 하멜스마크와 오랜만에 재회한 나치군 장교 친구로 위장하여 술집에 들어선다. 그러나 옆 테이블에 독일군 사병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도 모자라 한 병사가 술이 잔뜩 취하여 히콕스 중위에게 주정을 부리게 된다. 곧 히콕스 중위는 병사를 혼내지만, 여기서 발음을 듣고 의심을 품은 헬스트롬 소령이 어디선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멜스마크 일행과 헬스트롬 소령 간의 신경전이 시작된다.

 

헬스트롬 소령은 란다 대령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지니는 인물이다. 두 인물 모두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방식은 일맥상통하지만, 대화를 이어가는 어투나 표정은 상반된다. 란다 대령이 차분하고 공손한 태도로 속마음을 알 수 없게 하여 긴장감을 유발해낸다면, 헬스트롬 소령은 시작부터 공격적인 태도로 의중을 드러내며 긴장감을 만든다. 그런데 ‘술집’이라는 공간은 이 공격적인 태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 장면에서 하멜스마크 일행은 헬스트롬 소령에게 심문을 받는 것 아니라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장된 듯한 너스레를 떠는 하멜스마크 일행과 이들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은근히 약을 올리는 헬스트롬 소령 간에 오고가는 아슬아슬한 농담 속에 긴장감은 계속해서 상승한다. 헬스트롬 소령이 자신의 목적을 잠시 뒤로두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의도는 헬스트롬 소령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되는 ‘인물 맞히기 게임’에서 비유적으로 드러난다. 이 장면 속 ‘인물 맞히기 게임’이란 카드에 서로 특정 캐릭터나 인물을 적주고 돌린 뒤, 내용을 보지않고 각자의 이마에 붙여 무엇이 쓰여있는지 모두에게 질문을 해가며 카드 속 인물을 맞추는 게임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시작한 헬스트롬 소령은 몇 번 묻지도 않고 자신의 카드 내용을 예상해낸다. 그리고 ‘바로 맞추면 재미없으니 조금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영화가 이 대목을 통하여 얻는 효과는 세가지다. 첫째는 헬스트롬 소령의 추리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둘째는 ‘적과 술을 마신다’는 불편한 상황을 ‘술자리 게임’이라는 역설적인 행위로 더욱 극단적이게 만드는 것, 마지막으로 셋째는 헬스트롬 소령이 진작에 하멜스마크 일행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이다. 헬스트롬 소령이 합석하는 순간부터 히치콕 중위의 부담감은 이중적이게 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나치 장교로서의 자신과 작전 상황을 설명받아야 하는 영국군으로서의 자신에게 모두 불편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영화 속 최고의 서스펜스를 유발해내는 것이다.

 

타란티노 감독이 이전까지 영화 속에 담아낸 대화들은 ‘극의 묘미’를 살리는 효과에 그쳤다면 ‘바스터즈’에서의 타란티노식 대화는 점점 상승해가는 ‘서스펜스’를 부여하는 효과까지 만들어냈다. 이전 작들과의 차이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상당히 복합적일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대사도 훌륭했다. 또한 대화가 독일어나 프랑스어로 이루어져 ‘낯선 느낌’을 자아낸 것이 원인일 수도 있고, 연륜이 생긴 타란티노 감독이 더욱 진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역사극’이라는 장르가 주는 ‘진중한 분위기’ 또한 큰 몫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스터즈’ 이전까지의 필모그래피 상으로 타란티노 감독에게 ‘2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재는 매우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전쟁 상황이라는 어두운 배경이 주는 무게감과 긴장감이 그의 ‘B급 색채’와 만나 상호 보완하며 우리가 미처 예상치못한 큰 시너지가 발휘된 것이다.

그렇다면 ‘바스터즈’에서는 타란티노의 종전 영화들과 다르게 어떠한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하지만 ‘바스터즈’ 역시 감독의 기존 노선과 다르지않다. 영화를 평하는데 있어 메시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바스터즈’는 굉장히 낮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타란티노 감독이 항상 그래왔듯 ‘바스터즈’ 역시 무언가를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치의 잔혹함’과 같은 메시지를 애써 연결지어볼 수 있겠지만, 사실 그러한 것들은 타란티노 감독에게 영화의 극을 살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메시지를 담은 영화가 관객들에게 영화 외적인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는 관객들을 영화 자체로 끌어들인다. 타란티노 감독은 자신의 개성을 영화 속에 일관된 자세로 담아내어 메시지가 담겨있지 않아도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낸다. ‘바스터즈’는 그 중 ‘좋은 예시’일 뿐이다. 나는 타란티노 감독을 통해서 ‘반드시 메시지를 담아야 좋은 영화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해답은, 심오한 무언가를 담아내지 않더라도 영화 자체에 대한 고민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갖춘다면 충분히 명작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해답의 실마리를 조금 더 명확하게 해줄 영화가 있다. 바로 가이 리치 감독의 ‘스내치’이다. ‘스내치’는 수많은 범죄자들이 다이아몬드와 불법 복싱의 승부 조작을 두고 복잡하게 얽히는 이야기를 담아내었다. 주인공들만해도 ‘터키쉬’와 ‘토미’, ‘네 손가락 프랭키’, ‘총알이빨 토니’, ‘브릭 탑’, ‘믹키’, ‘솔’ 패거리, ‘칼날 보리스’ 등으로 굉장히 많지만 가이 리치 감독은 이들 모두의 이야기를 전혀 복잡하지 않게 모아 놓았다.

가이 리치 감독이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개별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굉장히 명쾌하게 샷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동차 추돌 씬’이다. ‘스내치’ 속 주인공들이 영화 내에서 다함께 모이는 장면은 없다. 그러나 가장 많은 주인공들이 한 공간에 모인 장면이 바로 자동차 추돌 씬이다. 그러니까, 터키쉬가 우유를 먹자 토미는 뜬금없이 우유는 더러운 음식이라며 창 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그 우유가 토니와 아비가 타고있는 차로 떨어지면서 그들의 차가 차단봉에 추돌하게 된다. 이 때 뒷좌석에서 긴 칼을 빼들고 구경하던 아비의 부하가 죽게된다. 또 이 때 솔 패거리는 모조품 총을 시험해 보다가 차 안에서 공포탄을 쏘게되고, 토니의 차 트렁크에 실려있던 보리스가 얼굴에 헝겊이 씌인 채로 탈출해 두리번거리다가 그들의 차에 치이게 된다. 이 장면은 영화 내에서 어떤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복잡해질 수도 있었을 이들의 ‘잠깐의 만남’을, 가이 리치 감독이 10분 이 채 안돼는 장면에서 적절히 시간 순서를 바꾸어가며 명쾌하고도 재기발랄하게 구성해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스내치’는 옴니버스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가이 리치 감독은 등장인물 각각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템포로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그리고 이 빠른 전개를 위하여 약간의 개연성은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더그와 토니, 아비가 더그의 가게에서 ‘칼날 보리스’라는 인물의 행적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때 마침 보리스가 곧장 가게에 들어온다. 이처럼 ‘누군가를 찾겠다’하면 우연의 일치로 그 인물을 즉시 등장 시키는 식으로 전개를 빨리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스내치’에서는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도 가이 리치 감독의 재치있는 ‘편집력’에 주목해야 한다. 가이 리치 감독의 위트 넘치는 편집력은 영화를 ‘명랑하다’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소개, 효과음, 화면전환, 대사 하나하나 모두 재치가 넘친다. 둘이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을 한 명은 앞을 비추고, 뒤통수를 비춘 다른 한명은 CCTV에 얼굴이 나오게 함으로써 동시에 두 얼굴을 보여주는 방식, 집시 토미가 불법 복싱에서 예정된 승부를 하지 않고 상대를 때려 눕혔을 때의 클로즈업과 같은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기도 한 수화기, 여권, 비행기, 택시의 샷을 빠르게 넘겨 보여주며 런던과 뉴욕을 오고가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 등 모두 열거하기가 힘들만큼 ‘스내치’에는 곳곳에 감독의 재치있는 편집력이 담겨있으며 이것들이 바로 ‘스내치’의 명랑함을 만들어낸다.

사실, ‘스내치’에서는 타란티노 감독과 유사한 기법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브래드 피트가 두 영화 모두에서 특이한 악센트의 영어를 구사한다는 점은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앞서 묘사했던 ‘마주보고 대화하는 장면’과 영화의 도입부에 위장한 강도들이 가톨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사무실로 올라가는 장면, 토미가 동물성 음식을 지저분한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장면은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이라는 작품에서 굉장히 유사한 씬을 찾아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둘의 스타일이 유사하기는 하지만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감독들인지라 차이점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타란티노 감독이 둘 이상이 ‘주고받는’ 대화를 표현 기법으로 사용했다면, 가이 리치 감독은 혼자 ‘일방적으로’ 말하는 방식을 ‘스내치’에서 즐겨 사용하였다. 자기소개 대신 ‘시체를 돼지에게 밥으로 주어 처리하는 방법’을 누런 이빨을 보이며 구구절절 설명하는 브릭 탑, 자신에게 총을 들이대고 있는 솔 패거리에게 그들이 자신을 해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토니의 모습 등과 같은 ‘일방적 대사’는 쉴틈없는 전개의 ‘스내치’에서 쉼표와 같은 기능을 하는 동시에 엄청난 몰입감을 관객에게 부여한다.

‘스내치’ 역시 영화 속에 ‘메시지’를 담아낸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범죄극이라는 장르의 영향 탓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전반적으로 ‘바스터즈’ 보다 더욱 가벼운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내치’ 역시 가이 리치 감독 고유의 재치와 개성을 영화 속에 쉴새없이 담아냈기 때문에 가히 명작이라 불릴만한 작품이 된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가이 리치 감독의 ‘스내치’ 이후의 행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스내치’는 가이 리치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이 작품은 첫 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의 재기발랄함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계승한 작품이다. 또한 감독 자신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하였으며, 2000년 작이지만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항상 거론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정말 딱 여기까지였다. 이렇게 훌륭한 개성을 지녔던 감독이 그것을 잃으면서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매우 혹평을 받았던 ‘스웹트 어웨이’를 거쳐 그 다음 작으로, 그리 풍부하지 않은 가이 리치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간에 자리잡은 ‘리볼버’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로 가이 리치 감독의 작품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창기 그의 스타일을 대부분 잃은 모습이었다. 물론 어떤 감독이 소기의 개성을 잃었다고해서 모두 나쁜 영화를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이 리치 감독은 ‘잘할 수 없는’ 방향으로 너무 나아가고 말았다. ‘리볼버’라는 영화 자체는 꽤 인상깊은 명장면을 가진, 나쁘지 않은 영화이다. 그러나 ‘가이 리치’ 감독의 영화로서는 ‘괴작’이라 불릴 수준의 작품이다. ‘리볼버’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지나치게 심오하려 하였다’다는 것이다. 지루한 분위기를 이어가면서 ‘인간 심리의 허점’에 대한 메시지를 심오하게 담아내려 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영화에 함축된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을때 그 어떤 감흥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식’을 놓친 탓에 시원찮은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가이 리치 감독 스스로도 문제를 느꼈던 것인지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부터는 다시끔 그의 명랑한 색채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초창기만큼의 임팩트는 느끼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이 리치의 감독의 경우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일까? 바로 ‘메시지’를 부여하기 위해 자신의 개성을 잃는 것은 곧 작품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경우는 어떠한지 생각해보자. ‘바스터즈’는 타란티노 감독의 필모그래피상 후기 작품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감독의 이전 영화들보다 진보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바로 타란티노 감독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일관된 개성, 즉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을 고수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바스터즈’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그리고 ‘스내치’와 가이 리치 감독의 행보까지 일부 살펴봄으로써 ‘반드시 메시지를 담아야 좋은 영화인가?’라는 의문에 나는 어느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충분히 고민하고 단련한, 연출자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든 영’라면 굳이 메시지가 담겨있지 않아도 명화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바스터즈’는 나의 칭찬일색의 평과는 달리 종합적인 면에서 본다면 부족한 점이 상당부분 존재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나의 의문을 기준으로, 즉 메시지가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인지 여부로만 판단한다면 ‘바스터즈’와 ‘스내치’는 메시지를 담는 것이 영화에서 필수적이지 않다는 대답의 표본이 된다.

내가 내린 결론은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다. 사실 완벽에 가까운 정답은 따로있다. 바로 ‘재미와 메시지’를 적절한 비율로 모두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율을 어느정도까지 조율해야 하는지는 곧 현대상업예술 전반의 고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나의 평론 하나로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에 ‘메시지’를 담기위해 고심하고 있는 창작자라면, 일단 ‘자신이 가장 잘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독보적인’ 표현기법을 지니기 위한 탐색과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자세로 발전해 나간다면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보게되는 영화가 아닌 ‘영화 자체를 한번 더 느끼기 위해서’ 다시 보게되는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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