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고함]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차선’인 ‘최선’
[청춘고함]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차선’인 ‘최선’
  • 박세정(작곡4)
  • 승인 2014.07.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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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정(작곡4)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전전긍긍할 때에, 혹은 꼭 위기에 맞닥뜨리지 않더라도 일상 중에 아무런 의도나 의미 없이 손톱을 물어뜯는 사람들이 있다. 손톱을 물어뜯는다는 것은 입에다 손을 가져다 댄다는 것으로 미관상 청결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그 행위를 보는 사람들에게까지 초조함의 싹을 틔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득 될 것 없는 이 행동은 어떠한 시간이나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행해진다.

 손톱 물어뜯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게끔 하는 아주 당연하고도 이미 잘 알려진 메커니즘이 손톱에 있다. 바로 손톱이 계속해서 자란다는 사실이다. 만약 손톱이 한번 손상되었을 경우에 더는 자라나지 않는다면, 최초의 행동이 지속될 수 없어 ‘습관’으로 변할 가능성은 적어진다. 계속 손톱이 자람으로써 행동을 반복할 의도를 가졌던 가지지 않았든 간에 습관으로 변할 빌미가 결국에는 제공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손톱을 물어뜯는 행위가 ‘불안’에 맞선 근본적인 해결책이기보다 일시적으로 ‘불안’에 대응하는 행동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건 없이 계속해서 자라는 손톱은 닥친 문제를 회피하는 식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지속하게끔 한다.

 우리가 ‘숙제거리’와 같은 것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는 계속해서 자라나는‘손톱’과 같은 것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먼저 막연한 ‘두려움’이다. 문제를 대할 때 지레 겁먹게 되는 이유는 앞으로 닥칠 경제적, 정신적 소모에 대한 것이리라. 우리는 그 해결 과정이 때로는 녹록지 않았음을 경험했거나 혹은 그럴 것이라 예상될 때가 있다. 그 과정 끝에 얻어지는 ‘결과물’이 기대치에 못 미쳤을 경우 감당해야 할 좌절감 혹은 무력감 또한 문제에 당당히 맞서고자 하는 용기를 좀먹게 한다. ‘욕심’또한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자라는 ‘손톱’이다. 보다 많은 부를 취하기 위한 혹은 남들보다 우위에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욕심이 과해지고 곧 이러한 욕심은 추악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는 ‘나’혹은 ‘우리’에게만 집중하게 되는 이기심을 발현시키고 최소한의 정의나 의미 없는 행동을 끊임없이 지속시킬 원동력이 되기에 이른다. 
이는 아주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원인이며, 대한민국을 온통 슬픔과 분노로 물들인 ‘세월호’참사가 그 하나이다. 소중한 302명의 우리네 부모님, 자식, 그리고 동생들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생사를 오가는 사투를 벌이게 되었던 최초의 원인이 그랬고 그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지독하리만큼 혼란스러웠던 경과가 그러했다.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끊임없이 뒤엉켜 드러나는 추잡한 이해관계,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쁜 무능한 정부와 그 관계 처들, 분명 선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 대처방안들이 바로 ‘손톱’이 만들어낸 무의식의 행동반응과도 같은 것들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 힘을 쓰는 동시에 또 다른 이들이 똑같은 상처를 입지 않도록 분명 변화해야 한다. 두려움이나 욕심이 이끄는 상황에 익숙해져 악순환의 연속을 만들어 내는 어리석은 행동은 과감히 지양해야함은 우리 모두가 이미 깨닫고 있다. 국가가 그러한 길을 또 밟으려 하지 않는지 국민의 이름으로 철저하고도 끈기 있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며 또 이번 참사로 인해 강요되는 것이 아닌 혹은 일시적으로 그치지 않는 개개인의 내면적 고민이 지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번 ‘세월호’희생자들과 그 가족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차선’에 밖에 그칠 수 없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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