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역사를 통해 되짚는 소통(疏通)의 의미
[특별기고] 역사를 통해 되짚는 소통(疏通)의 의미
  • 김병래(국제통상2)
  • 승인 2014.07.05 2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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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우리 대학가에서 인문학이 사라졌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진리의 상아탑’이 ‘취업의 상아탑’으로 변질되는 이러한 경향은 흔히 문·사 ·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이 급변하는 우리 시대에 대처하기에는 너무나도 정태적인 학문이라는 이유로 합리화된다. 그러나 인문학, 특히 그 중에서도 역사학(歷史學)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합리적으로 조망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미래를 바람직하게 맞이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때문에 역사를 그 자체로서 과거에 매몰된 학문으로 보는 경향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역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삶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교훈적 역할도 자처한다. 역사에서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소통(疏通)이다. 역대 왕조를 막론하고 소통에 성공한 지도자는 성공했으나 실패한 지도자는 암군의 길을 걸었다. 이상적인 리더는 소통에 능해야만 했다. 세종(世宗)과 정조(正祖)는 이러한 소통에 있어 극단의 리더십을 보인다.

 우선 세종의 경우는 민주공화정의 지도자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민심을 통찰하고 수렴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연분 9등법과 전분 6등법이다. 세종은 백성들로부터 거두는 조세의 원칙을 새롭게 정하면서 백성들의 편의를 최대한 수렴하기 위해 각 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어 새로운 조세안의 가부의 숫자를 파악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왕이 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새로이 연분법과 전분법을 확정하였다. 이렇듯 세종은 자신이 군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백성들을 위해 다양한 이들과 소통하려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에 비해 정조는 왕권을 일시적으로 강화하였으나 소통의 부재로 인해 조선의 미래와 자신의 업적을 모두 퇴색시켰다. 정조는 실록에서 자신의 학식을 과신함으로 인해 신하들과 마찰을 빚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군왕으로서의 체모만을 중시한 나머지 신하들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하고 탄압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태도에 대해서는 정조가 총애한 정약용마저 “총명한 사람이라도 어전(御殿) 지척에 돌아앉아서 여러 가지 경서를 강하도록 하니, 잘못 실패하는 때도 있어 몹시 두려운 마음에 땀이 등을 적시기도 한다. 혹 가벼운 벌이라도 받게 되면 졸렬함이 다 드러나는데, 어린애같이 때리며 생도같이 단속한다”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때문에 정조는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외척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한 이후 조선은 고스란히 정조 자신이 등용한 외척들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는다.

 이렇듯 소통은 현대 사회에 들어 갑자기 그 중요성이 증대된 덕목이 아니다. 역사상 소통에 성공한 지도자는 그 치세에 있어서도 성공했지만 그렇지 못한 채 독선에만 의존한 지도자는 비록 그 왕권이 공고할지라도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는 “역사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교훈을 얻는다”라는 말을 잘 알고 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통해 올바른 소통의 방법을 모색한다면 우리는 오늘의 사회에서 소통을 통해 바람직한 현대인의 자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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