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사회를 위하여
소통하는 사회를 위하여
  • 영대신문
  • 승인 2014.07.0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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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 역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 김명민이 남파 간첩으로 출연한 영화 ‘간첩’은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 영화는 잃어버린 10년을 청산한다던 전직 대통령이 임기를 마친 뒤, 현직 대통령의 선거 본부장에 의해 고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의 국방위원장에게 북방한계선을 포기한다고 약속했다는 거짓말을 유포시킨 해에 개봉되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친북과 친미, 친노와 친박이라는 망국적 정치 프레임으로 온 국민들을 나누던 바로 2012년에 용감하게 ‘간첩’이라는 ‘불온한’이름을 내세우며 이 영화는 등장했다.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오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에서 그 권력의 원 소유자인 국민의 절반을 빨갱이로 낙인찍는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상황에서 오천만 국민 중에 남파간첩이 득실거릴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이 영화가 코미디를 자처했으니 황당한 느낌마저 든다.

 보편적 복지를 이야기하거나 4대강 사업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천안함이 좌초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차분히 토론하려 하기 보다는, 그 사람들을 친북 인사 심지어는 빨갱이로 낙인찍었던 사람들은 ‘간첩’이라는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간첩이 아들과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희생하려는 숭고함을 가질 수 있고,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과 함께 살아갈 날을 꿈꾸며 부지런히 일하는 갸륵함을 보이며, 이미 유부녀가 돼 버린 여인을 일심단편으로 사랑하는 순정을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이 빨갱이를 미화한다며 분개했을까? 우리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똑같은 사람들이 간첩일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잘 보며주었다면서 환영했을까?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간첩들은 전직 공무원이고 현재 탑골공원 단골 노인이거나 전세금 인상에 힘겨워 하는 가장이거나 부동산 중개인 또는 귀농 청년들로 지극히 평범하다. 이들이 귀순한 북한의 고위 인사를 암살하려고 작전을 벌이는 모습이 어색하게 보일 정도로 이들은 평범한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이 간첩인 것은 오로지 영화에서 이들을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빨갱이란 말은 사회주의자와 다른 말이다. 빨갱이는 법의 보호를 받을 가치조차 없는 암적 존재이자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됐다. 좌우가 격렬히 대립하던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법적 절차 없이 즉결처분됐는지 우리는 현대사를 통해서 잘 안다. 반동이나 빨갱이란 이름으로. 영화 ‘간첩’에서처럼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빨갱이일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남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들을 빨갱이라고 설정했기 때문은 아닐까? 일단 빨갱이라고 설정되면 이들이 아무리 평범하게 살더라도 이 평범함이 오히려 빨갱이란 실체를 위장하는 빨갱이의 무서운 연기로 받아들여지고 결국 이들의 평범함이 오히려 이들이 빨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던 것은 아닐까?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도 자신들의 거짓말에 대해서 사과하거나 처벌받은 사람들이 없다.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어도 이 분이 빨갱이의 혐의를 벗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얼마 전 유우성·유가려 남매가 간첩이라는 증거 서류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국가정보원 스스로가 밝히며 사죄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남매 역시 여전히 빨갱이라는 혐의를 벗지 못했다. 일단 빨갱이로 설정되면 그 설정을 벗어나기가 너무나 힘든 것이 현실이다. 수백 년 전 유럽과 미국 땅에서 마녀라고 설정되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그래서 수만 명의 억울한 죽음을 낳았던 역사와 그것은 섬뜩하게도 닮아있다.

 구조조정과 정원감축의 칼바람이 한국의 대학 그 중에서도 특히 서울 지방 이외의 지방 대학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우리 대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생존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 다른 모든 가치들이 후순위로 밀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살벌한 때에 대학이 대학답기 위해서는 주도권을 가진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무엇’으로 설정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상황이 엄중할수록 함께 상황을 헤쳐 나갈 사람들과 더 긴밀히 대화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무엇’으로 낙인찍고 이성적인 소통 자체를 포기한다면 대학 생존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들이 결국 생존할 가치조차 없는 대학을 만드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분명 지금 대학은 위기이다. 하지만 위기는 곧 훌륭한 기회일 수도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일은 우리가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다. 이 위기를 소통의 기회로 삼자고 제안한다. 위기 앞에서 허둥대며 경거망동하지 말고 이 위기를 함께 이겨나가야 할 대학 구성원들끼리 마음을 열고 이성적으로 소통하는 기회로 삼자. 합리적으로 소통하는 사회를 압량벌에 만들어 가는 것이 위기를 극복할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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