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방울에 관하여
마지막 한 방울에 관하여
  • 영대신문
  • 승인 2013.12.2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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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 날의 첫 감상이며, 아마도 길 듯 할 내 이야기의 시작이다.

-1
윈센 궁성의 아름다움은 유명하다. 햇빛이 내려쬐며 부서지는 듯 한 그 황홀한 아름다움은 칭찬에 인색한 윈센의 여왕마저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그런 이야기가 전설에 가깝게 느껴질 무렵의 날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법무대신 합하를 호위할 아에곤이라고 합니다.”
리안나. 그녀의 위명은 대단했다. 일단, 그 나사가 하나쯤 빠진듯한 성격의 총리대신의 보좌관이었으니, 위명이 대단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 살짝은 긴장하고 있었다.
수려한 미모라고 하기는 아쉬운 외모였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곡선의 인상이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머리칼은 뒤로 맵시 있게 땋았고 입은 가볍게 다물려 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생각한 몇 초 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오자마자 미안한데, 이를 어쩌지?”
“네?”
“출장을 가야할 것 같은데.”
“출장이라니,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응, 남쪽 어느 지방에서 금주령을 어기고 있다는 얘기가 돌더라고.”
그녀의 얘기를 종합해보자면 이랬다. 전쟁 이후 극심한 식량난을 빨리 극복하고자, 식량을 낭비할 수밖에 없는 양조를 금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 그 법을 어기는 사악한 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아니, 뭐. 사악할 것까진 없고. 그냥 법을 어기는 사람들일 뿐이지.”
“...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보통 법을 어기는 자들이 사악한 자들 아닌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리안나는 별말 없이 돌아서더니 나에게 가방 하나를 던졌다.
“이게 뭡니까?”
“출장 가야한다니까. 바쁘니까 빨리 싸고 와.”
“알겠습니다.”
“아, 맞다. 아에곤!”
“네, 합하.”
“다음부턴 그냥 리안나라고 불러. 합하라고 불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알겠습니다, 합, ... 리안나.”
“잘 했어.”
리안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2
덜커덩, 덜커덩 거리는 익숙하진 않는 소리와 함께, 나와 리안나는 함께 들썩거리며 마차를 타고 있었다. 리안나는 아까 전부터 무엇이 좋은지 헤살거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이런 일은 충분히 다른 사람들을 시키실 수 있잖습니까. 왜 굳이 직접 움직이시는지,”
“음, 들어보라고. 윈센은 사람이 적어. 아무래도 일손이 많이 적은 편이지.”
“그렇죠.”
“그런 수준이다 보니 나 같은 고위관직도 업무 과다에 시달려 죽을 맛이란 말이야.”
“…그렇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리안나를 이번에 처음 봤다.
“이런 시국에서, 내가 땡땡이를 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나, 이 말이야. 솔직히 이만큼 부려먹었으면 하루쯤은 휴가를 줘야하지 않겠어? 이건 여태까지 열심히 국가에 봉사해온 나를 위한 선물이다, 이 말씀이지.”
“그럼, 지금 가시는 건...”
“출장이란 이름의 휴가지.”
그리 말하는 리안나의 얼굴은 너무나도 행복해보였다. 그랬기에 함부로 그녀의 선택을 나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좋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 참에 술도 진창 퍼마시고, 남자들도 잔뜩 꾀어봐야 겠군! 으하하하, 난 휴가 간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우리가 잡으러 가는 것이 불법 양조업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소거시켜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리안나는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동업자-난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인 나에게 상당시간 설파했고, 그 덕에 나는 언어의 홍수에 질식사할 뻔했다.
“자, 남자들이여, 나에게 오라!” 과연, 인텔리. 쓰는 언어마저도 고풍스러우셔라.
“음? 뭔가, 그 표정은?”
“별일 아닙니다. 가끔 그럴 때 있잖습니까,” 상사의 뒷담 같은 “생각이 갑자기 난다거나. 그런 겁니다.”
“그렇군. 생각이란 건 좋은 거지.”
혹시 윈센 궁에는 신하들의 정신을 적어도 제정신으로 유지해주는 기구라던가,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잡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리안나의 행동이 이리도 급변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곧 이 가설은 좌절됐다.
윈센 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의심케 만드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총리대신. 결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정신 질환 적- 위명은 윈센 궁의 하녀들까지 수군댈 정도로 대단했다.
아마도 리안나가 이리도 흥분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고대해왔던 휴가 덕분이리라. 나는 나와 타협을 보았다.
“망할 새끼가! 주인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것이지!”
갑작스러운 고함 소리에, 생각이 삐거덕 거렸고, 마차 또한 같이 삐거덕 거렸다.
“...... 젠장, 뭐야?”
  한참동안 자신만의 망상에서 헤엄을 치던 리안나 또한 불편한 내색을 드러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참으로 통속적인 촌극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 새끼야, 네놈 새끼가 박박 우긴다고, 어? 풀려날 것 같냐? 세 부족이 통합된 지 겨우 십몇 년이고, 시팔, 조또 모르는 새끼들이 노예 금지법을 발안한 게, 몇 년 전이고 새끼야, 여긴 그런 머리에 잉크만 가득 찬 새끼들이 올 리가 없는 곳이고, 개새끼야!”
상당히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말이 끝날 때마다 자신의 아래에 깔려있는 남자를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둔탁한 타격음이 계속 울리고, 깔려있는 남자의 신음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나서서 그 사내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뻔한, 참으로 뻔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 나, 시팔. 별 거지같은 새끼가, 하아, 귀찮게, 시팔. 뭐들 구경하고 있어, 개새끼들아! 절로 안꺼져?”
그나마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사내의 윽박지름에 모두 도망친다.
“저 남자가 누굴까?”
너무나도 서늘한 리안나의 말에 난 순간 흠칫거렸다.
“지방 귀족이었던 자 같습니다. 처리하고 올까요?”
“저 남자의 이름은 전(前) 로첸 남작 신말로다. 내가 처리하고 오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바람같이 마차를 나섰고, 나 또한 서둘러 따라나섰다. 일단, 호위기사지 않은가. 나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 숨었고, 당당히 신말로에게 걸어가는 리안나를 걱정하며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쩔 생각인걸까.
법무대신의 권한으로 구속? 화려한 언변으로 감화? 아니면 신랄한 독설로 모욕?
어느 쪽도 아니었다. 고귀했던 턱에 법무대신의 고귀한 주먹이 내리꽂혔다.

-3
마차 속에서의 밤은 사람들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 사람 중엔 분명 나도 있었고, 그 감상 덕에 나는 원래 같았으면 하지도 않을 말을 꺼내버렸다.
“정말 잘 싸우시더군요.”
“난 귀족한테는 안 져.”
리안나는 무슨 싸워 이긴 남자애마냥 배시시 웃으며 물통을 홀짝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그녀가 물통을 내민다.
“마실래?”
“아, 네 감사합니다. …수, 술이잖습니까, 이거?”
“시끄러워, 고막 터지겠네. 맞아, 술. 다르게 말하면 밀주지. 어때, 두근거리지 않아?”
“합하를 고발해도 되겠단 생각이 듭니다!”
“합하라고 부르지 말랬지, 내가. 조금 있으면 금주령을 어긴 사람들을 잡으러 가야 하는데 네가 합하, 합하 거리면 곤란해지잖아.”
“잠복근무라도 하시게요?”
“아니. 일개 조사원처럼 보일 생각이야.”
“왜, 왜입니까?”
“재밌으니까. 그리고 아에곤.”
“네?”
“투구 벗어.”
“안돼요!”
“이 멍청아! 조사원처럼 보일 생각이라니까! 조사원이 군사마냥 투구를 쓰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
“그래도 안돼요!”
이를 필두로 나와 리안나는 나의 투구에 대한 흥미로운 토론을 벌였고, 나의 투구위에 헝겊을 덮어씌운다는 것으로 이 토론은 결론이 났다.
“그리고, 아에곤.”
“또, 뭡니까.”
“칼도 숨겨라.”
“왜요!”
“지방 사람들은 칼을 차고 오는 중앙관리를 그다지 좋게는 보지 않는단 말이다.”
이제 슬슬 이런 문답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품에 칼을 숨기고 술을 들이켰다.
“켁! 크흠, 음. 독하네요.”
“그래. 한동안 오크통에 쟁여놓으니 그리 멋지구리한 황금술이 되더구나. 괜찮지?”
“차가운 불이 제 식도를 화려하게 태우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말이 술술 나오는걸 보니 태우진 않았어. 안심하라고.”
그러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들이켰다. 덜컹거리는 박자에 맞춰, 마치 자장가라도 들려오는 기분에, 스르르, 눈이 감기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호위를, 해야 하지만, 눈이, 감긴다…….
  “잘하는 짓이군. 이봐, 이봐!”
맙소사, 자고 있는데 깨우다니, 이런 악질적인 일을 할 분은 단 한분밖엔 안계시지.
“아, 예, 어머니, 조금 더 있다 일어나겠습니다.”
“허어…, 당장 일어나!”
“네, 네! 아, 합하.”
“말도 참 오지게 안 듣는군. 리안나라고 부르라고.”
“네, 리안나.”
“나 원,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군.”
“제가, 잤습니까?”
“그럼 일어나있었겠나. 잘 하는 짓이다. 겨우 한 잔 마시고 뻗어버리나.”
“술 마실 일이 잘 없어서,”
“어이없는 변명은 그만두고, 도착했어. 채비해라.”
“네, 네!”
그녀의 채근에 이기지 못해 나간 난, 상당히 충격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아침입니까?”
“놀랍군. 보통 숙취라 하더라도 하늘에 뜬 게 해인지 달인지는 맞출 수 있는 법인데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휑하니 리안나는 앞장서 가버렸다.
“가, 같이 가요!”
“네가 와야겠지?”
“…망할.”
나는 서둘러 마차 밖으로 나왔고, 그 덕에 보이지 않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가없이 펼쳐진 지평선과 그 지평선을 빼곡히 매운 수많은 밀들. 햇빛은 그 수많은 밀알에 부딪혀 자신의 파편을 날렸고, 지독스레 맑은 강이 그 사이를 유유히 흘러갔다. 윈센을 주변으로 아직까지 전쟁으로 인한 식량난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수많은 식량들이었다.
그 살 떨리는 광경에 경외감 보다 분노가 먼저 일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밀밭이로군.”
“보면, 압니다. 이 새끼들은, 이 넘쳐나는 식량을 두고, 지들끼리 술이나 퍼마시고 다닌단 얘기입니까?”
“억울한가?”
“네, 네! 당연하죠! 억울합니다!”
“이 사람들도 억울할 거야. 빨리 가지.”
“어, 억울할 거라니요? 이 이기적인 새끼들이요?”
“...... 자네, 술 좋아하나?”
“갑자기 그건 왜,”
“주정뱅이 노릇 좀 해봐.”
무슨 소리일까, 고민했고 리안나는 나에게 술포대를 들이부었다.

-4
아버지의 하품. 이게 여관이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적인 -분명 이 시는 어느 누구의 가슴도 울리지 못할 것이다.- 이름을 가진 여관에서, 리안나는 한참동안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하여, 이 친구가 말이야, 여기서 술을 마셨다고 하더라고. 응, 맞지? 젊은이?”
“아, 예. 옳으신 말씀이십지요. 전 분명히 여기서 술을 마셨습지요.”
“보라고. 이 성실한 젊은이가 증언하잖아.”
물론 나는 이런 벌건 대낮에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는 젊은이가 성실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무래도 이 아저씨들도 동감했던 모양이다.
“뭐라고? 난 저런 놈 본적 없는데?”
아무래도 ‘성실’은 인정하는 모양이다. 나의 성실한 외모에 건배.
“허어, 나이를 먹으니 그래, 아저씨. 안 그래, 젊은 친구? 넌 분명히 여기서 술을 마셨다고 했잖아?”
“아, 예, 그랬습죠! 전 분명히 여기서 술을 마셨습니다요.”
리안나는 방긋 웃으며 나의 등을 툭툭 쳤다.
“지나가다가 술이 너무 마시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응? 이 젊은 친구야 어려서 술을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알잖나? 크으, 그 맛은 잊을 수가 없지. 있으면 좀 꺼내달라고 친구. 우리 다 아는 사이끼리 왜 이러나?”
“허어, 거 참. 없다니까 그러네. 나라에서 만들지 말라는데 어쩌란 말인가?”
 “에헤이, 여기 빤히 증인이 있고만 왜 자꾸 내빼려 그래. 좋은 건 나누고, 어? 안 좋은 일도 나누고, 그러는 게 사는 거 아니겠나.”
“허어, 참!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고 저 친구가 술을 마셨다는 건 또 어떻게 아나. 응? 아무리 봐도 그냥 정신 나간 놈처럼 보이는 구만!”
저런, 성실한 게 아니라 실성한 것처럼 보이는 외모였나 보군.
“코가 있으면 좀 맡아보지 그래?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구만.”
“뭐?”
그 말에 사내는 나에게 코를 들이밀었고, 난 싫은 척도 할 수 없었다.
“흐음, 맞군. 술 냄새야.”
“보라고, 부정 못하겠지? 이봐, 쩨쩨하게 굴지 말고 좀 나눠줘.”
“근데, 이 술이 이 마을에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아나.”
 “이런 망할! 이 청년이 여기서 술을 마셨다고 증언하질 않았나!”
“그래, 했지. 근데, 그 증언은 또 어떻게 믿고? 그리고, 증언? 말하는 게 상당히 있어 보이는군? 너 뭐하는 놈이야?”
“오,”
리안나의 단말마와 함께 주위에서 조용히 물 같은걸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우리들을 쳐다보기 시작했고, 나의 심장은 신나게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마치 귓전에서 북 치듯 울렸고 머리털 사이사이로 땀이 흘렀다.
“아,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뭐, 책을 많이 읽다보면 자연스레,”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군. 책을 많이 읽는단 소리는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돈이 있단 소리고, 돈이 있으면 이런 촌구석에는 뭐 하러 왔지?”
“아, 뭐, 흐음.”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후회할 일을 해내는 것이 바로 사람의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 아니겠는가. 사내는 나를 노려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도 수상해. 술 냄새는 나지만, 취한 것 같진 않군. 마치 멀쩡한 놈이 머리에다가 술만 부운 것처럼 말이야. 게다가 난 너를 본 적이 없어. 아니, 애초에 너 같은 놈이 여기 왔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어. 말해. 너희는 뭐하는 놈들이지?”
“아, 저희는 그러니까,”
“우리? 감찰관이다. 이 자식아!”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 둘은 사람이 발에 차여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5
“끄응, 삭신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냅다 걷어 차버리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냅다 ‘나 감찰관이다!’ 라고 말하는 건 또 뭡니까?”
“응? 그거 일부러 말한 건데?”
“네? 왜요? 우리 지금 범법자 잡으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맞지.”
“그러면 최대한 정체를 숨겨야 할 것 아닙니까?”
“흐음, 생각을 해봐. 내가 감찰관인걸 알고 이 자식들은 당황해서 술을 숨기려 들겠지. 그렇게 당황했을 때가 가장 덮치기 좋을 때란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좁아터진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오면 알아채기 십상이다. 어차피 우리는 들킬 운명이었어. 우리가 선수를 친 거라, 이말 이지.”
리안나는 방긋 웃으며 자신의 계산을 읊었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녀 치곤 너무나도 허술한 계획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는 나의 상관인 것을.
“알겠습니다.”
“시원시원해서 좋네.”
리안나는 경쾌하게 발걸음을 띄었고 나도 서둘러 그녀를 따라나섰다.
“근데요, 리안나.”
“왜.”
“당신은 왜 이렇게 발걸음이 빠릅니까?”
“그런가?”
“네. 늘 당신 따라갈 때마다 힘들어서 죽겠어요. 무슨 훈련하러 온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빨리 걸어요?”
“난 직업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네?”
리안나는 그 말에 더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오, 저기 집이 있군! 이봐요!”
리안나는 순식간에 달려갔고, 나도 달려가는 수밖엔 없었다. 그녀가 쏜살같이 달려간 집에는 한 중년의 부인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상당히 아늑해 보이는 집이었고, 그런 것 따윈 상관없다는 듯 리안나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이야,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9급 감찰관에 있는 에프리아고 저 친구는 제 보안관인 아에곤라고 합니다.”
“그래서요?”
“네, 귀하의 집을 수색해도 될까요?”
“...... 안되는데요?”
“이유를 여쭐 수 되겠습니까?”
“집이 너무 지저분하거든요. 어떻게 감찰관 같은 분을 그런 더러운 곳으로 모실 수 있겠나요?”
부인은 방긋방긋 웃으며 아이를 얼렀지만, 그 모습은 지독히 부자연스러워보였고, 더군다나
“저 황금빛 물말입니다. 혹시 술 아닌가요?”
아기의 요람엔 황금빛 물이 찰랑이는 병이 솟아 있었다.
“수, 술이요? 하하! 설마요. 이건 저희 아가 먹이려고 만든 꿀물입니다. 우리 아가도 좋아해요.”
그러고는 곧바로 병뚜껑을 따 아이의 입에 들이부운 것이었다. 나와 리안나가 제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말끔하게 아이의 입으로 액체는 사라져있었고 그녀가 완강히 집안 수색을 거부하는 바람에 우리는 맥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비슷한 일들이 마을 곳곳에서 계속해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술인 것들을 숨기고, 꾸미고,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오크통에 들어있는 술들을 죄다 마셔버린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존경스러워라.) 목 바로 옆까지 도끼가 날아오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훌륭한 신고식이 아니겠는가.

“힘들지?”
“하아, 하아, 그렇군요.”
 “이 일 은근히 힘들어. 게다가, 위험하지.”
“위험하다니요?”
“뻔하지. 술이 발견되면, 감찰관을 죽이는 거야.”
목이 뻐근해졌다.
“죽…이기도 합니까?”
“당연하지. 금주령은 걸리면 사형까진 가지 않겠지만 징역 수십 년은 기본이야. 아무래도 나라를 위해 그것도 못하냐, 라는 괘씸죄까지 포함되니까. 싫지 않겠어? 게다가 이런 오지는 감찰관하나 죽여 봐야, 잘 조사도 오지 않아.”
“그렇군요.”
오금가 절로 저려왔다. 물론 법무대신이라는 고위급 인사를 호위할 때부터 어느 정도의 각오야 하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목숨이 위협당하는 일은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절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이 무슨 책임감 없는 소리인가.
“왜, 떨리나?”
“아니요. 방금 전 까진 떨렸는데, 어차피 당신 고위직이잖습니까. 당신은 어차피 늘 위험하잖아요.”
“훌륭하다. 바로 그런 정신이면 되는 거야.”
리안나는 빙긋이 웃어보였다. 그것이 진심일지 아닐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오늘은 저 집으로 마무리 하자고. 지치잖아?”
“네, 확실히 지치네요.”
리안나가 가리킨 집은 상당히 풍치가 있는 집이었다. 바로 옆에 강이 흐르고 그에 맞춰 돌아가는 물레방아. 주위에 듬성듬성 나있는 나무들이 한껏 멋을 돋웠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리안나의 숨소리가 커졌다.
“저, 긴장하셨나요?”
“멍청아. 잘 봐라. 저거 딱 양조장이잖냐.”
“네?”
“멍청아. 양조장이라고.”
그 말과 함께, 어릿한 술 냄새가 내 코에 산뜻이 닿는 듯 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이보쇼.”
  방금 전의 여관 주인이었다.
“우리 식량창고 앞에서 뭐하시오?”
“식량창고? 아무리 봐도 양조장인데?”
“그래, 한 때는 양조장이었지. 지금은 평범한 식량창고고. 궁금하면 들어가 보쇼. 밀알들이나 가득하겠지.”
“좋아, 그렇게 까지 말하는 걸 보니 들어갈 필요는 없겠네. 뭐 하러 우릴 찾아온 거야?”
“그래도 마을에 손님이 왔는데, 대접하는 게 예의가 아니겠느냐며 촌장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시더군. 나도 이러고 싶진 않은데 말이야.”
“흐음, 거기 술도 있나?”
“그래. 합법적으로 다른 마을에서 들여온 놈이 하나 있긴 있지.”
여관주인은‘합법적’을 강조했지만 리안나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6
“그러다가 그 새끼가 하는 말이, 내 아내 아닌데? 라고 하더란 말이야! 으하하! 천하의 등신 같은 놈을 위하여!”
“위하여!”
또다시 술잔이 부딪히며 요란한 웃음소리가 방을 오갔다. 참으로 웃기는 건배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여지껏 나라의 천세만세를 위했고, 촌장의 만수부강을 위했으며, 여왕을 위했고, 왕자를 위했고, 아직 어린 공주들을 위했고, 수많은 사과들을 위했고, 아랫마을 플리터 씨의 빠른 결혼을 위했고, 아낙네들이 물을 길 때 흘리지 않기를 위했으며, 열심히 모래를 옮기는 개미들을 위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더 갔다간 억만창생의 영원함을 위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생길 무렵, 촌장이 또다시 술잔을 리안나에게 건넸다. 촌장은 상당히 호쾌한 성격이었다. 우리들이 감찰관이라고 하든 뭐라고 하던 일단 마을에 온 사람은 모두가 귀한 손님들이라며 이렇게 파티를 열어준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하하, 이렇게 멀리 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많이 지치셨지?”
“감사합니다. 촌장님. 히야, 그나저나 이 술 정말 끝내주는군요. 망할 금주령만 아니었어도 진탕 마시고 놀 수 있는 건데 말입니다. 안 그런가요?”
“그렇지! 맞아! 이 친구 뭔가 말이 통하는 친굴세! 하하, 좋아한다니 나도 기쁘네. 자, 쭉쭉 들이키라고, 오늘은 누가 뭐라고 해도 손님들이 온 날 아니던가! 사일런! 왜 그리 뚱한 표정이야?”
사일런은 여관주인의 이름이었다. 그는 멍하니 술잔만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열심히 파티를 즐길지라도 그는 마치 별세계의 사람인 것 마냥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촌장님.”
“이봐, 간만에 축제인걸세. 좀 즐겨둬도 괜찮지 않겠나.”
“그렇죠, 네.”
사일런은 마지못해 술잔을 홀짝였고 나도 다시 술잔에 관심을 돌렸다.
술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나는 술의 맛을 이러쿵저러쿵 따질 만큼 술을 많이 마셔보지 못했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있어 금주령이 내려졌으니, 술을 마셔볼 일이 자주 없었다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와는 정 반대로 리안나와 촌장은 대결하듯 술잔을 신나게 들이켰다. 주위의 사람들도 제 흥에 겨워 마구잡이로 마셔대기 시작했고, 나쁘지 않은 분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이런 마을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다는 망상에 빠져 벌벌 떨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암. 그리 생각하며 나는 다시 술잔을 들어 마셨다.
땅이 순식간에 떠올랐다고 생각했다.

꽤나 축축한 침대라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축축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날 떠받치고 있던 것은 밤이슬을 잔뜩 머금은 잔디였으니까. 그 잔디들을 보며 나는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어째서, 리안나가 보이지 않는가. 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리안나!”
물론 대답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 그걸 눈치 채지 못했을 수가 있는가. 이리도 멍청할 수가! 나는 나를 욕하며 몸을 일으켰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애초에 감찰관을 그렇게 잘 반겨주는 것을 보고 알아챘어야만 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찰관을 좋아하겠는가.
나는 어깨를 풀었다. 괜찮았다. 아무래도 놈들은 내가 단순한 보좌관이니 그냥 버려놓고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겠지. 망할 것들 같으니. 서둘러 리안나를 찾아야했다. 달이 떠있는 모양새를 보니 두 시간 가량은 뻗어 있었던 듯 했다.
빨리 찾지 않으면 리안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서둘러서, 서둘러서 찾아야만 했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달렸다.
난 주위를 둘러보고는 나를 정의할 수 있었다. 등신 같은 놈. 밝은 대낮도 아닌 어두운 밤중에, 달빛에 의지하여 사람을 찾는 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망할 돌대가리 같으니. 어떻게 리안나를 찾아야 할까.
뻔한 일이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건물의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는 괴성을 질렀다.
“새끼들아! 나와!”
“뭐야, 어느 미친놈이야?”
좋은 반응이다.
“튀어 나와, 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아!”
곳곳에서 잔뜩 얼굴을 찌푸린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 파티에서 술잔을 부딪친 놈들도 몇 보였고, 정말 처음 보는 얼굴도 섞여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리안나 어디계시냐.”
“뭐야 너, 빨리 일어났네?”
“리안나 어디계시냐.”
“글쎄, 모르겠는걸. 리안나가 누구야, 네 엄마냐?”
몇몇은 피식거리며 비웃었고 또 몇몇은 묵묵하게 날 노려보았다.
“리안나 어디계시냐.”
“모르겠다고 하잖아!”
그 소리와 함께 절그렁 거리는 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곡괭이, 끌, 도리깨, 각종 농기구들이 기세 좋게 나를 노렸다. 더 이상 말을 나눌 필요조차 없다. 난 묵묵히 숨겨두었던 칼을 꺼냈다. 그에, 모두가 기겁한다.
“너, 너! 그 칼…!”
모두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지. 한명을 필두로, 모두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웃기는 짓이다. 너무 느려. 농기구들은 하늘을 날았고, 바람은 신음을 흘렸다. 모두는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야. 농기구를 들고 다시 나에게 뛰어오는 몇몇은 칼등에 맞고는 곧바로 나무에 처박혔다. 잘 여문 사과들이 우수수, 그들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그에 맞춰, 그들의 공포 또한 잘 여물어 있었다. 공포의 수확철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리안나 어디계시냐.”
“바, 바, 바, 방,”
“방?”
“방앗간! 방앗간!”
“방앗간? 아, 그 식량창고라던 곳?”
“그, 그래!”
그들은 잔뜩 겁에 질려 나를 노려보았다. 더 찔러봐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겠지. 나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공무에 협조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리며, 나중에 꼭 체포하러 올 테니 부디 뒤지지 말고 살아계셔 주시길 바랍니다.”

-7
어느새 나는 방앗간 앞에 도달해있었다. 안쪽에서는 희미하게 불빛이 반짝였다. 조용한 말소리와, 무언가 타닥거리며 타는 듯한 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그 문 앞의 경비병처럼 보이는 두 마리는 땅을 나무 작대기로 직직 그으며 무언가를 토론하고 있는 듯 했다. 땅따먹기라도 하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난 칼을 휘둘렀고,
그들은 순식간에 방앗간 안으로 처박혔다.
동시에 방앗간 안에서 일대 소란이 벌어진 듯 와글와글한 소리가 고요했던 사과나무 숲을 울렸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리안나! 리안나!”
난 그대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결코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다. 리안나는 멀쩡히 살아 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심하단 눈초리로 날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뭐.”
“사, 살아계셨습니까?”
“그럼 죽어서 네 눈앞에 나타났겠냐.”
“하,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고 자시고, 넌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리안나!”
나는 그대로 리안나에게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의 몸이 잠시 동안 움찔움찔 거리더니, 그 반응이 멈췄다.
“리안나, 난, 난, 당신을, 존경합니다.”
아니었다.
“걱정했습니다.”
아니었다.
“정말로, 정말로,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진심이었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한동안 나를 쏟아내듯 울음을 토해냈다.

화창한 봄날의 들길에서, 리안나는 흥얼거리며 앞서나가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무겁기 그지없는 마차를 끌며 따라가고 있었다. -말들은 돌아와 보니 다 도망치고 없었다.- 내 등 뒤의 술통이 계속해 출렁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요, 도대체 어떻게 그 녀석들을 설득해낸 겁니까?”
“그래, 왜 안 묻나 했지. 아에곤, 저번에 네가 말했었지. 저 사람들만 음식을 독식하는 건 억울하고 불공평한 짓이라고. 기억나나?”
“네, 기억나는 듯합니다. 그리고 합하께선,”
“리안나. 그 버릇 못 고치겠나.”
“아, 리안나 당신께선 저 사람들도 억울할 거라고 하셨지요.”
“그래, 기억하나보군. 이야기 하나 들어보겠나.”
난 그냥 어깨를 으쓱였고, 리안나는 미소 지었다.
“어느 땅에 갑자기 나라가 건국됐다고 치자. 이름은, 그래. 윈센이 괜찮겠군.”
“윈센? 설마,”
“쉿. 이야기 도중에 끼어드는 건 실례지. 하여튼 그 땅에는 원주민들이 있었어. 평범하게 농사짓고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이 말이야. 근데 갑자기 어느 망할 놈들이 이 땅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나라다. 너희는 우리나라의 국민이다, 라고 하면서 세금을 내라고 생떼를 부리는 거야. 원주민들은 당연히 반발했지.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고, 졌다. 윈센이란 망할 나라는 생각보다 강했거든.
그리고 윈센은 승자로서 패배한 원주민들에게 양심적인 세금을 물린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7할의 식량이 바로 그것이지. 정말 인도적이지 않나? 먹고 살기 위해서 이 사람들은 정말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고, 답을 찾아냈다. 밀을 술로 만드는 거야.”
“술로요?”
“그래. 술. 자네는 모르겠지만 맥주는 상당히 영양가가 높거든. 왜 달리 맥주를 흐르는 밀이라고 부르겠나. 액체로 만드니 보관도 싶고, 법에도 저촉되지 않으니 원주민들은 잔뜩 맥주를 만들었고 곧 정부는 제제에 들어갔다. 식량난이라는 명목 하에 금주령을 내려버린 거지. 그들은 분노했고, 힘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밀주를 만들기 시작한 거야. 뭐, 뻔하디 뻔한 이야기지.”
여태껏 그들을 욕해온 나는 온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런 더러운 짓을, 후세가,”
“역사서에는 당연히 이 이야기가 적히지 않을 거다. 모든 관계인도 입을 다물 테고 나도 네가 어디에 이 이야기를 적든 부인하겠지. 저들이 이 이야기를 기록해두면 그 후손들이 스스로 그 이야기를 삭제할 거다. 아에곤. 뭘 얘기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난 그저 네가 저들을 더럽고 치사한 놈들로만 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한 거다. 이해하겠지?”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녀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구름이 해를 잡아먹었고, 부서져 내리던 햇빛들이 사그라졌다. 햇빛을 받던 나뭇잎들은 잠시 허공을 떠돌다 땅에 떨어졌고 개미들은 열심히 그 나뭇잎 위를 기어가며 곤충의 시체를 옮겼다. 새들은 하늘을 날았다. 주위의 몇몇 부러진 가지들을 모아 나무 위에 새 집을 쌓았고, 그 위에는 새로운 새들이 삶을 펼쳐갈 것이다. 산딸기가 씀바귀들 사이로 수줍은 얼굴을 보였고, 곧 살쾡이가 산딸기를 잔뜩 뜯어갔다.
구름은 다시 해를 토해냈고, 그녀도 말을 토해냈다.
“그래서, 술을 가져가는 거야.”
“네?”
“공주님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술을 만들었다고 하면, 윈센도 할 말이 없잖아.”
“하지만, 공주님들은 아직 어리시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먹어 치워야지. 나도 고위 공직자거든. 공주랑 비슷한 취급 받을 만한 정도는 되지. 윈센 궁성에 박힌 사람들 다 모아서 술판 벌일 생각인데, 올래?”
나는 미소 지었다.
“당연히 갑니다.”
“좋아.”
리안나도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리안나.”
“왜,”
“이거 너무 무거운데 대신 끌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술값이라 생각해라.”
나와 리안나는 한담을 나눴고, 그 위로는 햇빛이 출렁이고 있었다.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4 한 상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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