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장커(賈樟柯) 영화론
지아장커(賈樟柯) 영화론
  • 영대신문
  • 승인 2013.12.2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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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양에서 출발해 산샤를 거쳐 다시 펀양으로 돌아온 지아장커 <소무>와 <무용>사이의 어떤 간극, <스틸라이프>라는 ‘플랫폼’

<소무>를 비롯한‘고향삼부곡’과 <무용>(2007) 이후 일군의 다큐멘터리들 사이에는 결코 작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을 가장 표면적인 부분에서 파악할 때, 그것은 장르나 내러티브 형식상의 간극이 될 것이다. 지아장커는 <무용>을 기점으로 해서 극영화의 길을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극영화와 다큐의 경계를 모호하게 지워 놓은 듯한) 다큐멘터리 양식을 확립하여 거기에 충실히 따랐다. 그런데 이 괄목할 만한 형식의 변화와 동시에 발생한 또 다른 하나의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아장커가 중국의 지나간 시간, 혹은 좌절하던 순간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보다 중국의 미래를 좌우할 인민들의 긍정적 모습, 구체적으로는 노동과 연대의식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인민의 의지에 대해 좀 더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전자에는 <소무>부터 <세계>(2004)까지를, 후자에는 <무용>을 포함시킬 수 있다면, <스틸라이프>는 전자에서 후자로 가기 위한 변곡점이자 ‘플랫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십여 년에 걸쳐 이행된 지아장커 영화들의 흐름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소무>, <스틸라이프>, <무용>이라는 세 작품을 논의의 중심 대상으로 삼는다면, 특히 그 안에서의 가족(또는 유사가족) 양태 변화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어떤 유의미한 차이들을 포착할 수 있다. 세 작품에서 인물들은 언제나 가족 단위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속해있는 가족의 모양과 특성은 계속해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무>의 가족은 소통이 단절되어 해체되고 와해된 가족인데 반해, <무용>에 이르러서는 비교적 하나로 응집된 가족이 보이게 되었다는 차이가 그것이다. 그리고 ‘플랫폼’의 위치에 있는 작품 <스틸라이프>는 그 개별적이고 와해되어버린 비정상적 가족 양상이 결집된 가족 양상으로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를 보여준다.
우선 <소무>의 경우에 엄밀히 말하자면 주인공은 두세 가지 종류의 가족 단위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지만(1. 소무의 진짜 가족 2. 소무와 똘마니들로 구성된 유사가족 3. 소무와 메이메이와 그녀의 유사어머니인 가라오케 주인), 여기에서는 소무를 중심으로 ‘일 하는’ 집단인 소무와 똘마니 유사가족의 양태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양소무와 똘마니들은 행인들의 지갑을 소매치기하여 돈을 버는 작은 범죄 집단인데, 단단히 뭉쳐서 행동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언제나 삐거덕거린다. 소무네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소무는 똘마니 중 한 명인 동동을 찾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 가족의 일원인 동동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어 보인다. 얼마 후 소무는 또 다른 부하 싼투가 조직 일에 가담하지 않고 여자 친구와 어울려 다니고 있었음을 알고 실망한다. 한마디로 소무의 유사가족은 서로가 그다지 유대감을 갖고 있지도 않고, 그래서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영화의 말미에 가서 소무는 자신이 경찰에 잡혀 있는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심지어 소무가 구속되었음을 알리는 인터뷰 방송에서는 소무 가족의 일원이었던 싼투가 버젓이 나와 소무를 두고‘없애 버려야 할 성가신 인간’이라 욕한다.
홀로 배신당하고 좌절하는 인물, 혹은 온전하게 굴러가지 못하여 해산되고 마는 가족의 일원은 <스틸라이프>에서도 산밍과 셴홍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산밍과 셴홍은 오래전에 연락이 두절된 각자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 산샤를 찾아든 이들이다. 그들은 수소문 끝에 기어이 자신들의 배우자를 찾지만, 셴홍의 남편은 이미 누군가와 살림을 차린지 오래고, 산밍의 아내는 선주에게 저당 잡혀있다. 그런데 <스틸라이프>에는 이 두 가족을 제외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가족이 존재한다. 바로 산밍이 산샤로 오게 되면서 합류한 건설현장의 노동자 무리이다. 산밍은 아내와 당장 결합하지 못하지만, 대신에 자신이 새로이 속하게 된 유사 가족과 함께 무리지어 떠나고자 한다. 산시로 떠나고자 하는 산밍의 선택은 무너진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의지로서의 선택이다. 산밍과 함께 담배를 나누는 다른 노동자들의 사정 역시 산밍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무>에서든 <스틸라이프>에서든 인물들의 삶이 비루하고 힘든 것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스틸라이프>에 이르러서 새로운 가족의 양상이 등장했고, 그 하나 된 가족의 모습은 그들의 미래가 아주 낙관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그것이 허무하고 좌절스럽기만한 것은 아닐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산시의 탄광촌으로 떠나기 위한 발걸음을 옮기는 산샤 노동자 가족의 모습은 구정물과 땀에 전 몸과 비루한 차림으로 너무나 초라한 행색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비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착하게 될 새로운 근거지는 물론 그들에게 현재보다 나은 물질적 보상을 제공할 것이며, 무너진 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테지만, 동시에 그곳은 너무나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 산밍네들이 선택한 길을 중국이 앞으로 가야할 길에 비유한다면, 인민들의 미래가 밝을 지 어두울지는 모르지만, 또 하루하루의 삶이 줄타기를 하는 듯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의지와 역량이 있다.
산시로 향한 '대장정'의 주역이 깨어진 가족의 일원이 아닌 노동자 무리라는 것은, 곧 지아장커가 중국의 긍정적 미래는 개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 즉 인민들의 일체성과 연대의식에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인민의 다부진 몸과 노동에서 출발한다고 지아장커는 <무용>에 이르러 마침내 결론지은 것 같다. <스틸라이프>의 바로 다음 자리에 위치한 영화 <무용>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광둥 화남의류공업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을 담았고, 2부는 세계적 의류디자이너 마커의 프레타포르테에 관한 것이며, 3부는 펀양의 재단사와 광부들의 삶의 현장을 보여준다. 1부와 2부의 내용은 일종의 변증법적 대립을 통해 3부라는 합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세 부분 중에서 지아장커의 전언은 최종적으로 1부도 2부도 아닌 3부에 담겨있을 것이다.
3부에 등장하는 가족은 재단 일을 했지만 생계 문제로 인해 남편이 광부로 일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영화 전체를 통틀어 3부의 가족이야말로 가장 너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데, 1부와 2부의 이야기가 내포하던 부정적 뉘앙스가 오히려 그들에게서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지아장커는 2부에서 예외(exception) 그리고 개별성이라는 특성에 극단적으로 치우침으로써‘무용한’옷인 마커의 프레타포르테를 비춘 다음, 3부에서는 한 가족의 옷을 다시 한 번 전시한다. 마커의 프레타포르테 전시는 마치 따로 떨어진 섬 위에 익명의 인민들이 외로이 서 있는 듯한 광경인데, 이 전시와 3부의 전시가 대립함으로써(이 때 사용되는 음악 역시 그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무용>은 개별성이 아닌 일체성에 좀 더 의미를 두기 시작한다. 이어서 지아장커는 광부들의 목욕 장면에 꽤 긴 시간을 할애한다. 이는 1부의 노동자들에게 볼 수 없었던 다부진 육체가 그들에게는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무용>에 앞서 <동>(2006)과 <스틸라이프>에서도 노동자들의 다부진(고된 노동으로 검게 그을렸지만 굳세고 생명력이 있는) 몸을 보았다. 단순히 같은 장소에서 함께 일한다고 해서 연대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펀양의 그들이 가난하지만 정말로 잘 사는 것은, 불행하고 좌절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삶을 그들이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펀양의 부부와 소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은 지아장커가 자신의 영화에서 부연하고자 하는 어떤 주관성이 개입된 흔적이기도 하다. 3부의 배경이 되는 펀양은 <소무>에서 중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소무>에서 지아장커는 홍콩 누아르의 잡음들과 갖가지의 대중가요들을 동시녹음이라는 절묘한 방법으로 계속해서 흘려 내보냄으로써, 펀양이 반영하고 있는 중국의 사회 현실들을‘전혀 필터링하지 않은 듯한 방식’- 사실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현실을 묘사하여 비참한 사회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해내려는, 그것은 네오리얼리즘 영화와 유사한 방식이다 - 으로 그대로 재현해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면, <무용>에 이르러 지아장커는‘’이라는 가요를 내재적으로 삽입하면서, 더 이상 펀양의 어두운 현실을 재현하고 폭로하기보다, 이제는 그 현실을 꿋꿋이 인내하는 인민들의 모습을 바라보고자하는 자신의 주관적 바람을 강하게 첨언하였다. 그렇게 해서 지아장커가 바라보고자하는 펀양은 더 이상 자본주의라는 현실에 지체된 젊은이들의 좌절만을 품은 도시가 아니라,‘사랑의 노동자'가 있는, 비가(elegy) 대신 찬가가 흘러나오는 도시이며, 그럼으로써 지아장커의 영화는 비로소 위험한 세상을 온 몸으로 견뎌내는 인민을 위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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