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문화상 시 부문 수상작
천마문화상 시 부문 수상작
  • 영대신문
  • 승인 2013.12.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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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25시 역

 

원광대학교 중등특수교육과2 안 용 찬


역사 안은 오래된 풍경화다
즉석복권을 손톱으로 조금씩 문지르는 사내,
춘란처럼 졸음에 목이 휘고 있는 여인
때 낀 카스테라를 뜯어먹는 할머니까지
기차는 다슬기처럼 달라붙은 사람들을
어디쯤에서 풀어놓고 있을까
역장은 선로에 귀를 대고
기차의 숨결을 자근자근 세어 본다 
나는 뚜르게네프의 자서전을 읽다가
구지레한 차표를 바로 피듯 기지개를 편다 
옆에선 벙어리 소년 둘, 작은 손으로
둥글게 말고 있는 언어들이 따스하다
눈빛으로 보아 어느 먼 곳 풍경들이
차르르 쏟아져 나올 것 같지만
할 말이 많을수록 손은 더 출렁거린다  
꽃살 무늬 창문 같은 입 밖으론
말 대신 허공이 쏟아져 나온다
얼마나 많은 길들을 손으로 엮어 왔을까
해안을 감으면서 기차는 조용히 달려오고 
하나 둘씩 소독하지 않은 안개를 마시며
사람들은 가늘고 긴 길 위로 올라탄다  
청소부의 비질에 맑은 보푸라기 일어나고
대합실 안 소년들이 남긴 따뜻한 상징들을
나는 책 속에 조심히 접어 넣었다
푸른 기적소리가 산에 쌓이고 있었다

가작

눈밭 아수라장

 

영남대학교 사학과1 안 준 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두 얼굴의 아수라다. 나는 파괴하지 않는 사랑은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랑의 광경은 모두 파국이거나 수라장이다. 난장판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 나는 뿔이 난다.

 밤새 밤새 내가 모르는 곳에서 눈이 내리고 나는 애닯다 내리는 눈과 보는 눈 너머에만 있는 당신의 뺨을 손끝으로 스치고 싶다

  나는 외눈이다 당신을 볼 눈이 하나밖에 없다 왼쪽 눈의 이름은 비련 아무리 봐도 수라의 세상같기만 하다 봄이 사라졌다 겨울은 여기 있는데 당신은 어디 있는가

  생선토막처럼 엎드려 있다 잔설(殘雪)을 더듬는 왼손 겨울인지 거울인지 펑펑 폭죽처럼 내리는 눈 그대가 하지 않은 한 마디가 궁금하다 간신히 기어간다 켜켜이 쌓인 원증회고(怨憎會古) 희뜩하다

  당신에게서 눈이 내린다 눈은 생각이 없다 어디쯤 있는지 살아는 있는지 그것들이 눈으로 내리는 거다 있다면 저기쯤 있을까 해주지 못했던 말들이 눈으로 속절없이 내려

  미련이라 부를까 내가 자꾸 베이는 칼이래도 생선은 좋아한다 자기 몸을 내준다 흰 도마는 복마전 살이 까진 데가 적자색이라면 사랑이 떨어져 나간 데는 흰색

  아수라는 아수라를 사랑한다 분철로 흩어지는 눈송이들 나는 수라를 사랑하고 수라는 내 사랑을 사랑한다 시를 쓰느라 내내 초췌한 나는 수라를 사랑한다

  자꾸 구차하게 눈이 내린다 이별의 사정처럼 이불의 정사처럼 지울 수도 남길 수도 없는 전설들 그래도 눕는 건 내 간의 크기를 재려는 것 사진으로도 남길 수 없는 당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

  싸락눈이 녹아 검은 물로 변하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의 흑발로 감정을 염색하는 일

  깨어보니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어 눈을 깜빡여도, 눈을 깜빡여도

복숭아 익는 순간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2 김 지 섭


1
복숭아나무는 그해부터 키 크는 걸 멈추었다

멀어져가는 마지막 버스가 길을 회수한다 두꺼운 타이어에 둘둘 감기고 있는 길을 볼 때마다 복숭아뼈처럼 나는 점점 불거졌다 되짚어 돌아올 필요가 없는 길을 생각하며 집으로 오는 길을 되짚을 때, 내 그림자는 한 뼘씩 깜깜해지고 있었다

2
출렁거리며 복숭아씨는 결을 늘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낡은 트럭이 툴툴거리며 식어갔고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내 옆에서 식어가며 툴툴거렸다 나는 복숭아뼈처럼 돌아누웠다 타이어가 발라놓고 간 밤길을 뚫기 위해선 어른들처럼 불콰해져야 한다 다시는 기억해낼 수 없을 이야기를 게워냈을 때 아버지의 두 눈이 불콰해졌다 복숭아뼈의 이쪽과 저쪽처럼 서로의 그늘만 끌어 덮고 우리는 잠들었다

3
그렇게 복숭아는 익어갔다

꺼뜨리지 않아 잔뜩 충혈된 두 눈으로 어느 길을 밝혀주려고 했나요, 아버지, 트럭은 헤드라이트만 말짱했다 아버지를 폐차시키고 왔을 때 어머니는 마른 등으로 울었다 복숭아처럼, 나도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내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어느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복숭아가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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