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회 천마문화상 소설부문 우수작-이태호
제 42회 천마문화상 소설부문 우수작-이태호
  • 편집국
  • 승인 2012.01.3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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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지로 들어서면서 차들은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서행으로 달리던 차들은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를 바라보며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라디오에선 간단한 사연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핸들에서 잠시 손을 떼어내곤 좌석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업무로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학창시절에는 하루만 푹 자도 말끔히 없어지던 피로도 나이가 들수록 며칠이고 지속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눈자위를 지그시 눌렀다. 희뿌연 잔상들이 가지를 치며 떠다녔다.
현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나야,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자, 아내가 문을 열었다. 음식냄새가 열린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아내의 몸엔 고양이 캐릭터그림이 프린팅된 앞치마가 둘러 있었다. 나보다 네 살 어린 아내도 내년이면 서른여섯이다. 입을 한껏 벌린 채 웃고 있는 고양이 캐릭터 그림이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소파에 앉았다. 아내가 끓인 된장찌개는 조갯살을 듬뿍 넣은 탓에 국물 맛이 담백했다. 아내는 거실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선 내일 입을 와이셔츠를 다림질했다. 다리미가 와이셔츠 위를 지날 때마다 옷소매는 매끄럽게 펴졌다.
아내는 빨래바구니에 속옷과 양말이 차기도 전에 매일매일 손빨래를 했다. 한번 욕실에 들어간 아내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고, 물 흐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나는 언젠가부터 욕실만 바라보면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채널을 9시 뉴스에 맞추었다. 다림질을 마친 아내는 수건으로 시작해서 양말, 속옷, 티셔츠들을 가지런히 개어 수납장에 차례차례 포개 넣었다. 집안일을 마친 아내도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내는 뉴스거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우리 둘은 그저 묵묵히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뉴스에선 화재로 전소된 집안을 비춰주고 있었다.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나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평온해보였다. 아내의 볼에도 살이 조금 오른 것 같았다. 예전에 비해 아내의 말수는 줄었다. 하지만 우리의 사이는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기억도 차츰 잊혀져가는 것 같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부재중이란 문구가 떠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있었다. 집안 곳곳에 놓인 물건들이 어둠 속에서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전화번호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왠지 익숙하게 다가왔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뚜렷이 얼굴을 드러내진 않았다. 나는 불 꺼진 거실을 서성였다.
움직이는 공간을 조금씩 넓혀갔다. 나는 집안 둘레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때 발바닥으로 묵직한 물체가 느껴졌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형광등을 켰다. 어둠속에서 빛은 한순간에 폭발하듯 실내를 가득 메웠다. 눈이 따가워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바닥에는 식빵처럼 두툼하고 뭉툭한 장난감이 놓여있었다. 나는 장난감을 들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어딘가 깊숙이 숨어 있던 지우의 장난감이었다.
지우는 아내의 뱃속에서 검붉은 피와 함께 세상에 나왔을 땐, 이미 죽어있었다. 의사가 지우의 엉덩이를 몇 차례 때려보고 응급조치를 해보았지만, 지우는 끝내 울지 않았다. 일정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기계들은 지우의 죽음을 보채는 것 같았다. 나는 지우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한 검붉은 핏줄들이 온몸을 수놓고 있었다. 지우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평온해 보여 마치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의사는 의료용 마스크를 벗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의료용 가위가 천조각 위해서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아내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채 여물지 않은 인간이 어딘가로 옮겨가고 있었다. 땀으로 뒤엉킨 머리카락과 벌겋게 달아오른 아내의 얼굴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나와 의사를 번갈아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힘껏 잡았다. 아내의 몸은 들썩였다. 그리고 아내는 조용히 기절했다. 분만실은 온통 죽은 것들로 가득차보였다.
회사를 마치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는 거실에 걸려있는 달력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나는 그날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달력을 바라보며 아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생각해보았다.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그리고 사사롭게 선물한 물건들은 이미 많은 터라 마땅한 선물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결혼기념일은 계절처럼 찾아왔다. 목덜미에서 옅게 배어난 땀이 와이셔츠 깃을 적실 때쯤 나는 습관처럼 결혼기념일을 떠올렸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의 결혼기념일을 종종대하면서도 나는 이상하게도 결혼기념일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선물을 살 때면 점원은 웃음을 지으며 사모님 좋아하시겠어요, 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점원의 말을 들으며 선물의 주인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 나에게 물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감정이었고, 터무니없는 물음이었다. 식탁위에 차려진 음식들과 아내의 모습에서 나는 비로소 결혼기념일이 실질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건네준 선물을 받고 아내는 기뻐했고, 나는 서류들을 음독하듯 무미건조하게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나를 안으며 당신도 감정표현을 좀 해요, 라고 말했다. 아내에게 나는 그저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지만, 왠지 아내의 결혼기념일처럼 느껴졌다.
아내의 얼굴에서 잔주름이 퍼져나가는 동안 나는 부장으로 승진했고, 아파트를 샀고, 신차를 장만했다. 아내의 권유로 우리는 전국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를 찾아다녔다. 그때 산 기념품들은 집안 곳곳에 놓여있었다. 기념품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볼품없이 보였고, 책상이나 선반에서 떨어져 한쪽 모퉁이가 부서지거나 칠이 벗겨져나갔다.
회사일은 해가 거듭할수록 바빠졌다. 나는 ‘다음에’ 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아내와의 여행을 차일피일로 미루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내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아내는 조금씩 부지런해졌고, 항상 바쁘게 몸을 놀렸다. 이미 닦은 바닥을 재차 닦았고 붙박이장을 열어 옷을 다시 정리했다. 집안은 포장지에서 막 꺼낸 물건처럼 윤기가 나는 것 같았다.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아내를 볼 때면 집안에 한기가 맴도는 것 같았는데, 마치 벽 모퉁이마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구멍을 내어 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어제도 걸려 왔던 번호였다. 시끄러운 빗소리가 전화너머로 들려왔다.
“나야.”
나는 단박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L이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전화번호의 주인이 내 얼굴 앞까지 얼굴을 내미는 것 같았다. 아무런 대답을 없자, 그녀가 말을 재촉했다.
“저기 혹시?”
그 몇 초 사이에 그녀와 보냈던 시절이 빠른 속도로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이상하게도 그 기억들은 좋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나는 말을 더듬으면서 천천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랜만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 놀란 것보다, 잠시 옛 추억에 빠져있었던 탓이었다. 나는 조용한 곳을 찾아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잘 지냈어?”
그녀가 나의 근황에 대해서 물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느릿한 말투는 여전했다.
“그렇지 뭐.”
“결혼했겠네?”
짤막한 대화들이 오가고 그녀는 또 연락할게, 라는 말을 남기고 끊어버렸다. 나는 벽에 기댄 채 멍하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한손에 막대사탕을 쥔 여자아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향해 빙긋 웃었고 나는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백화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아내의 선물을 사지 못한 채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작년 결혼기념일에 나는 회사업무로 타지에 있었다. 업무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이 났고, 부랴부랴 짐을 꾸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혼자 술을 마셨는지 취해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고속도로는 텅 빈 것처럼 조용했고, 차들이 간간히 빠른 속도로 내 차를 추월해나갔다. 내 차의 속도계는 칠십을 넘지 않았다. 뻥 뚫려 있는 고속도로 한가운데 짙은 어둠이 가로막고 서있는 것 같았다. 나는 왠지 그 어둠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아내에게 자지 말란 말을 남겼지만, 마땅히 뭘 해야 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미리 선물이라도 준비해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결혼기념일은 자정과 동시에 과거 속으로 한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식탁에는 아내가 비운 술병들과 과일이 놓여있었다. 아내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며칠 안 본 사이 아내의 몸은 조금 야윈 것 같았는데, 마치 둘둘 말아 놓은 마른수건 같았다. 나는 편의점에서 산 케이크를 화장대위에 놓았다. 불을 켜고 간소하게나마 파티를 하기엔 아내는 이미 깊은 잠에 든 것 같았다. 밀려오는 피곤함에 옷을 대충 벗으며 나는 아내의 옆에 몸을 뉘었다. 꿈을 꾸는지 아내는 간간히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함께해준 아내에게 불현듯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의 볼을 쓰다듬었다. 마른 손바닥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아내는 멀어져가는 누군가를 부르듯 입술을 웅얼거렸다. 
비가 내렸는지 도로는 젖어 있었다. 느닷없이 내린 비를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머리카락이나 옷에 스며든 빗물을 털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L은 대학을 졸업하고 몇 개월 후 느닷없이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얼마 후 결혼을 했다. 밤이 새도록 내 잘못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세계를 떠나고 싶었다. 나는 어딘가로 떠날 거야, 라고 중얼거리고 다녔다. 친구들은 혹시나 내가 자살을 할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죽을 용기도, 그녀를 다시 만날 용기도 없었다. 다만 나는 전혀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곳이 어디가 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어디도 가지 못한 채 조용히 나이를 먹어갔다. 사회에 적응해 내갔지만, 낙인처럼 그녀는 내 몸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정지신호를 미처 보지 못한 나는 정지선을 넘어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차를 급정거했다. 아스팔트 바닥과 바퀴가 맞물리면서 굉음을 냈다.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다말고 일제히 선채로 내차를 바라보았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았다. 그저 입을 살짝 벌린 채 횡단보도 중앙을 응시했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한 아이가 웅크린 채 차 앞에서 떨고 있었다. 맞은편의 엄마를 보고 신호가 녹색불로 바뀌자 부리나케 뛰어간 것이었다. 횡단보도는 그리 길지 않았고 아이의 달음박질은 빨랐다. 맞은편에 서있던 여인이 아이에게 달려갔다. 인어공주그림이 그려진 가방을 가슴팍 깊숙이 묻은 아이는 울지도 않고 입만 뻥긋거리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긴장감이 횡단보도 한가운데 맴돌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으며 실성하듯 나를 몰아세웠고, 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빗물에 적은 머리카락,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나는 그 순간 아내를 떠올렸다. 분만실 안에서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던 아내. 지우도 세상에 나와 힘껏 울음을 터트렸다면, 아마 저 아이의 모습이 아닐까. 사람들은 나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고 나에게 욕을 하며 사라졌다. 신호가 바뀌었지만 나는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요란한 경적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식탁위에는 갓 튀겨낸 돈까스가 김을 내며 놓여있었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돈가스를 보아도 전혀 식욕이 돋지 않았다. 베게에 얼굴을 깊숙이 묻고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다. 아내는 나에게 샤워는 나중에 하고 음식이 식기 전에 먹으라고 했다. 나는 식탁 앞에 무르춤하게 선 채 넥타이를 천천히 풀었다. 내가 앉을 자리의 의자를 뺀 아내는 나를 재촉했다.
접시에는 아내가 보기 좋게 잘라놓은 복숭아가 비슷한 크기로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적당히 무른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자, 끈적한 과즙이 입꼬리를 따라 목으로 흘러내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이 목을 스칠 때마다 과즙 자국에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아내는 냅킨 한 장을 뽑아 내 입 주변을 훔쳤다. 나는 멍한 시선으로 입안에 든 복숭아를 천천히 씹었다. 과즙은 입꼬리에 맺혀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결혼생활은 순조로웠다. 알뜰한 아내 덕분에 통장에는 돈이 조금씩 쌓여갔다. 아내는 나와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를테면 함께 음악을 듣거나, 가까운 시장에서 장을 보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아내는 아파트 인근 포장마차에서 파는 닭꼬치를 좋아했는데,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마른 입술을 혀로 훔쳤다. 가격이 오른 섬유유연제하나로 아내는 몇 십 분이고 재잘거렸다. 내가 텔레비전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아내는 내 팔뚝을 살짝 꼬집으며 반응을 살폈다. 나는 간간이 ‘그래’ 라는 말에 억양을 바꿔가며 아내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문제될 것도 없었고, 문제가 될만한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풀어놓는 아내는 나의 과거에 대해선 전혀 묻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내 휴대폰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렸다.
아내는 우리의 아이를 갖자고 말했다. ‘우리’라는 말엔 애틋함과 막막함이 배여 있었다. 나는 아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내와 몸을 나눌 땐 조심스러우리만큼 피임에 신경을 썼다. 아내는 신혼 때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뒤로 거의 5년 만이었다. 나에게 아내의 말은 한여름에 툭 떨어진 눈처럼 느닷없이 느껴졌다. 나는 그 눈이 조금씩 쌓이기 전에 얼른 치우고 싶었다. 아내는 간절하게 아이를 원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오디오의 음량을 높였다. 아내는 말없이 잔을 들었고, 와인을 두병쯤 비우고서야 몸을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식탁에 앉아 나는 L을 떠올렸다. 그녀는 나와 결혼을 할 것이며 나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나를 닮은 아이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쯤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충실히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지금 나의 결혼생활은 한쪽모서리가 부서진 케이크처럼 어딘가 부실해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제법 취기가 오른 나는 아내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내의 배는 달이 바뀔수록 눈에 보이게 부풀어갔다. 아내의 몸동작은 느려졌고 조심스러웠다. 입덧이 심한 아내는 양념이 들어간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아내는 키위나 오렌지같은 과일만 좋아했다. 특히나 갈아놓은 주스를 잘 마셨다. 믹서기에 과일을 갈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집안 가득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썩은 음식이 있나 싶어 선반을 열어보았다. 냄새가 날만한 음식은 없었다. 개수대 하수구에 악취제거제를 듬뿍 뿌렸지만, 비릿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코를 킁킁대며 부엌을 뒤졌다. 아내는 부른 배를 만지며 아내는 지우의 이름을 살갑게 불렀다. 나는 코를 의심하며 주스를 컵에 따라 그녀에게 가져갔다.
“이상한 냄새 안나?”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아내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대꾸했다. 나는 확실히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냄새는 점점 선명해졌고 지독해졌다. 나는 인상을 구기며 손으로 코를 막으려고 하자, 아내는 내 손을 끌어다 자신의 배위에 놓았다. 뱃속의 아이는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맞은편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앞 동과의 거리는 30미터정도에 불과했다.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 탓에 대부분의 집들은 베란다를 활짝 열어놓았다. 같은 7층이었지만 앞 동은 무릎을 살짝 굽힌 것처럼 높이가 조금 낮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들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거나, 와이셔츠를 다리거나, 옷을 개고 있었다. 앞 동의 세집이 똑같은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휴대폰에는 그녀가 보낸 문자가 와있었다. 내일 여덟시까지 강남역 4번 출구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저녁시간이었지만, 정확히 시간이날지도 몰랐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아내의 선물을 사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답장을 하려고 휴대폰을 들었지만, 답장버튼에 손이 가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무심히 앞 동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강남역 4번 출구, 여덟시. 나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산부인과에서 돌아온 아내는 방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었다. 퇴근을 하고 방문을 열 때면 불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아내는 출근할 때 보았던 모습그대로 숨죽이고 있었다. 쌀죽을 들고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 때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쌀죽을 머리맡에 놓으며 아내를 위로했다. 하지만, 나의 위로는 아내의 귀에 닿기 전에 산산이 조각나 방안 어딘가에 맴돌다 사라졌다. 침대에선 지린내가 났다. 이불을 들추자, 아내의 아랫도리가 흥건히 젖어있었다. 아내는 자신이 오줌을 쌌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침대보를 갈고 이불을 새로 까는 동안에도 아내는 탁자에 앉아 창 너머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우가 아내의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부터 그 아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우의 발길질은 자신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거부한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더 이상 집안에서 풍기던 비릿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세 달이 지났을까. 아내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떨어뜨렸다. 머리를 질끈 묶은 아내의 볼은 푹 패여 있었고, 어깨에 걸친 앞치마가 자꾸만 흘러내려 아내는 연신 앞치마 끈을 올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아내의 모습에 나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아내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를 잡으며 내가 말했다.
“뭐가 고맙다는 거예요?”
아내는 느물거리는 해파리를 썰며 말했다.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누가요?”
“…….”
칼질을 하던 아내의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흰 도마 위에서 유유히 번져나갔다. 아내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도마와 칼날이 부딪히면서 생생한 소리를 냈다. 나는 아내의 어깨를 힘껏 부여잡았다. 가스레인지위에 올려둔 냄비에선 물이 펄펄 끓어 넘치고 있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로 지하철입구는 북적거렸다. 입간판은 호객행위를 하듯 인도에 줄지어 서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는 마치 표피가 투명한 곤충 같았고, 그 뱃속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약속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다도록 L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괜한 발걸음을 했나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외제차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나타났다. L이었다. 차문을 열자 그녀는 조수석 자리에 놓아둔 핸드백을 치웠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귓불을 스칠 듯 짧아있었고, 검은색 원피스로 가린 몸에선 진한 향수 냄새가 났다. 핸들을 잡은 팔이나 어깨엔 군살하나 없이 매끈해보였고, 목에는 그 흔한 주름하나 보이지 않았는데, 오히려 조금은 촌스럽던 예전에 비해 한층 더 세련되고 젊어보였다. 지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눈동자뿐이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첫마디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춤거리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시절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내 삶이 차안에 응집되어 있는 것 같았다. 차는 어느새 도심지 한 귀퉁이에 위치한 모텔로 향하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차안에서와 달리 조심스러워보였다.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두리번거렸다. 열린 창문 사이로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다. 나는 창가에 서서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환희 불을 밝힌 도시의 가로등은 우주를 떠돌다 지구로 떨어진 별처럼 애매한 위치에 허망하게 떠있었다. 오토바이를 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굉음을 내며 도심을 질주하고 있었다. 꽤 시끄러운 소리에 나는 창문을 닫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옷을 벗겼고, 살갗에 엷게 배어난 땀이 마르기도 전에 몇 번이고 몸을  나눴다. 내 허리는 그녀의 배 위에서 들썩였고, 그녀는 두 팔을 뻗어 내 등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나를 밀치고 내 몸 위로 올라왔다. 천장을 덮고 있는 거울에 L의 등이 비췄다. 그녀의 등허리에 새겨진 나비문신이 날갯짓을 하듯 비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다리를 꼬고 익숙한 동작으로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모습은 꽤 낯설었다.
“한 대 피울래?”
“아니야, 끊었어.”
“싱겁긴.”
샐쭉 웃는 L의 입사이로 담배연기가 흘러나왔다. 
“나비네?”
나는 그녀의 등허리에 새겨진 문신을 만지며 말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비로 환생한데, 나는 다시 태어난 거야. 그 지긋지긋한 놈 손에서 벗어나게 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나비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어.”
“그래? 내 생각 안 났어?”
그녀는 담배를 비벼 끄며 다시 내 품을 파고들었다.  
“나는 너랑 다시 잘해보고 싶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 무미건조했다. 적어도 몇 분간 틈을 주거나, 나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건 아닐까. 지금의 상황도 믿기지 않았지만, 어떤 상황이든 당당한 그녀의 모습은 변한 게 없어보였다.
벨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휴대폰을 보았다. 아내였다. L은 등을 돌리고 누워 베개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지금 이 순간에 걸려온 아내의 전화가 방해꾼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히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화는 서너 차례 더 걸려왔다. 나는 끝내 받지 않았다. 내 얼굴에 그녀는 바투 다가와 말했다
“넌 착해서 좋아.”
그녀는 이혼을 했고, 위자료로 받은 돈으로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를 차렸다고 했다. 그녀는 대단한 미모는 아니었지만,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간접 조명과 바 내부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은 그녀를 더욱 매력적인 여인으로 포장해주었다. 개업 후 반년이 지나자, 단골들도 제법 생겼다. 개중에 몇 명은 작은 상자에 귀걸이나 반지 따위를 넣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그때 사는 게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남자들은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준 그 주변 분위기에를 사랑한 것이었다. L은 더욱 외로워졌고 고독해졌으리라.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내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넥타이를 풀며 욕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며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녀의 흔적으로 보이는 자국은 없었다. 다만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가 미미하게 몸에 배여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비누로 몸을 칠하고 샤워타월로 몸을 박박 문질러댔다. 그녀의 입술이 머물렀던 자리가 조금 아렸다.
물기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욕실에서 나왔다. 아내는 빨래를 개고 있었다. 아내의 손등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나는 거실을 어슬렁거리며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좀 바빴어.”
아내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마치 거실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운 아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위에 올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건전지가 다된 탁상시계는 열 시 사십 이 분에 맞춰진 채 초침만 틱틱거리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L의 등허리에 새겨진 나비가 파닥거리며 머릿속을 비집고 다녔다. 쉽게 잠이 오질 않을 것 같았다.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
아내의 느닷없는 물음에 나비는 사라져버렸다.
“그럼.”
“무슨 날이야?”
“결혼기념일.”
아내도, 나도 말투에 힘이 없었다.
“그거 말고.”
아내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었다. 침대가 살짝 울렁거렸지만, 아내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는 아내가 미련스럽게 보였다.
“내가 무슨 짓이라고 했다는 거야?”
무심코 말을 내뱉고 나서 나는 후회했다. 그러나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아내의 의심을 살 것 같았다.
“요즘 회사일로 정신없는 데 꼭 그렇게 티를 내야겠어?”
아내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나는 방문을 거세게 닫으며 거실로 나갔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단숨에 마셨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아내에게 화가 났다.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L과의 만남도 믿기지 않았고, 아내에게 화를 낸 것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사과를 할까 싶었지만, 내일은 결혼기념일이다. 그럴듯한 결혼기념일을 보낸다면 오늘의 일은 다 잊힐 터였다. L을 더 이상 만나지 않으면 해결될 것 같았다. 나는 달력을 바라보며 제법 호기롭게 다짐했다.
들떴던 주말의 마지막 밤은 조용했다. 차들은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콘솔박스를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자줏빛 비로드로 안감을 댄 케이스 속에서 다이아몬드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카드결제를 할 때 조금 무리하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반지를 보고 환희 웃을 아내를 생각하자 잘한 것 같았다. 점심시간 때 퀵서비스로 보낸 장미꽃이 아내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아내는 붉은 장미꽃을 좋아했다. 아내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때 싫든 좋든 지금쯤 결혼기념일을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해놓았을 것이다. 아내는 유독 결혼기념일에 신경을 썼다. 한껏 멋을 내기 위해 아내는 특별한 날만 입는 원피스를 붙박이장에서 꺼냈을 것이고, 촛불이 켜진 식탁위로 잔잔한 음악이 흐를 것이다. 나는 어서 빨리 현관문을 열고 싶었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더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현관 열쇠를 꺼냈다. 아내는 나를 놀라게 할 심상인 것 같았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철커덕거리며 잠겨있던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음식 냄새도, 음악 소리도,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소파 위에는 장미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군데군데 검붉게 시든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이 가다 서기를 반복했고, 끝내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안 어디에도 아내는 없었다. 집안은 늘 그렇듯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가구며 전자제품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집안은 평소보다 더욱 커보였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내는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싶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내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나는 음성메시지를 남길까하다가 그만두었다. 결혼기념일을 그리도 중요하게 여기던 아내로써 지금의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는 달력을 보며 결혼기념일을 재차 확인했다. 분명히 오늘은 결혼기념일이었다.


눈을 감고 눈자위를 지그시 눌렀다. 희뿌연 잔상은 뭉쳐지면서 점차 나비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나비는 허공 속에서 흐느적거리다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눈을 뜨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 오늘은 L의 생일이었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의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신체기관들이 일제히 운동을 멈추는 것 같았다. 아내는 어디로 갔을까. 집안을 둘러보았다. 집안은 마치 전소된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반지를 매만졌다. 반지는 손끝에서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열린 베란다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베란다로 걸어갔다. 앞 동의 사람들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거나, 와이셔츠를 다리거나, 옷을 개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투명한 나비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나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계명대·문예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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