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같이 살다간 이육사, 그를 만나러 가다.
불꽃같이 살다간 이육사, 그를 만나러 가다.
  • 김효은 기자
  • 승인 2012.01.3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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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문학기행을 기획하기 위해 문학관을 찾던 중 한 기사를 보게 됐다. 바로 안동영화예술학교에서 이육사의 삶을 재조명하는 영화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를 제작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영화에 이육사의 딸 이옥비 씨도 출연했다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마침 예전에 광복절 날 이육사의 ‘절정’이라는 특집 드라마가 내 뇌리에 박혔던 것이 기억에 났던 참이었다.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바로 문학관에 전화를 해 이옥비 여사의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휴대폰 번호는 이육사의 딸을 증명하듯 끝자리가 264였다.

◆문학기행 그 길 위에서 시작된 인연=안동으로 갈 준비를 끝내고, 안동으로 가기 위해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 중앙고속으로 가게 됐다. 하지만 실수투성이의 기자는 카메라를 놓고 오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학교로 돌아가 카메라를 가지고 다시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로 와서 근처에서 햄버거를 산 뒤, 12시 20분 버스표를 끊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출발하는 중이었다. 일정이 꼬이게 돼 약속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이옥비 여사님께 양해를 구하고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고, 양해를 구하던 중 전화 속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옆을 돌아보니 바로 옆자리에 이옥비 여사가 앉아계셨다. 한참을 마주보고 웃었다. 안동에 계셔야 할 분이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있는 이 기막힌 우연을 설명하긴 이야기가 너무 길다. 이렇게 이육사 문학관으로 가는 내 첫 기행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기분 좋게 시작됐다.

◆안동고속버스터미널에서 이육사문학관까지=버스를 타고 1시간 20분 정도가 지나니 안동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육사 문학관은 도산면 원천리라는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육사 문학관까지 가기 위해선 시외버스터미널 옆에서 하루 3대만 운행하는 67번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를 타고 문학관까지 가는 길은 1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만큼 문학관까지의 초행길은 멀게 느껴졌다. 실제 이육사의 고향이자 문학관이 있는 원촌마을은 한자로 ‘멀 원’을 두 번 쓴 ‘원원대’라고 불렸다. 육사의 시 청포도 중 ‘먼데 하늘이 열리고’라는 구절에서 ‘먼데’는 바로 이 고향 원촌마을을 뜻하는 것이다. 먼 곳에 있는 문학관이었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안동호수도 보며, 도산서원과 퇴계 종택과 이황 선생의 묘소를 지나오기 때문에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퇴계 이황이 이육사의 조상이기에 그의 뿌리부터 되짚어 가며 안동호 주변을 싸고 있는 아름다운 산의 전경을 구경하며 드디어 구비 진 길을 따라 문학관에 도착했다.

◆꿈에도 그리던 그의 고향과 사람=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이육사의 생애를 보여주는 자료들을 차례대로 읽어보기 시작했다. 이육사 문학관 1층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육사의 문학세계와 독립운동의 자취를 볼 수 있도록 책자와 모형이 전시돼 있다. 이곳은 생애와 문학 코너와 독립운동 코너로 나뉘는데, 실제 이육사의 자필편지와 작품, 가족사진 그리고 이육사의 상징인 동그란 뿔테안경이 전시돼 있었다. 이외에도 가족 간의 사진과 어머니 허길 여사의 회갑을 맞이해 형제들이 합심하여 쓴 병풍과 일화도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화목한 사진 속 모습에 부모의 소중한 둘째 아들이자 한 여인의 남편, 딸의 아버지 이육사도 가족들과의 일상적이며 소소한 행복을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층을 올라가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기획전시실과 생가를 그대로 복원한 육우당이었다. 기획전시실에는 평상시 좋아하던 김춘수, 박목월, 김소월, 김현승, 천상병 시인들의 시가 진열돼 있었는데, 모두 이육사 문학관에 기증해 준 것이라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이외에도 많은 문인들의 자필 시가 전시돼 있어 젊은 시절 문학소녀와 소년이었던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고된 시련과 역경 속에서 지행을 실천한 지성인=이육사 문학관의 조영일 관장님은 삶은 달걀을 하나 권하시며, 이육사 문학관 행사와 육사의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육사 선생은 시를 쓰는 것조차 행동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셨다. 시를 써서 일본보다 문학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알리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면 일본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고 믿으셨다”고 했다. 이어 “선생의 작품 총 82편 중 한시나 시조를 빼면 36편밖에 되지 않지만, 08년은 최남선의 시조 ‘해에게서 소년에게로’가 나온 지 현대 문학 1백 년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2008년 이육사 추모사업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어느 누구도 중, 고등학교 교재에 작품이 모두 실리는 문인은 없다”며 그 의의를 강조했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사건으로 24살에 첫 옥살이를 시작했으며, 독립운동 16년 간 17번의 옥살이, 체포, 구금, 감금 등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고됨을 겪었다. 조 관장은 “이육사 선생님의 삶을 한마디로 ‘지행의 삶’으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지성인으로서 아는 대로, 배운 대로 행동하는 이육사 선생의 지행합일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함께 거닐어 보는 문학로드=조 관장님과의 대화가 끝날 무렵 이옥비 여사는 “배고플 것 같은데, 김치볶음밥이 준비돼 있으니 식사를 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며 나를 육우당으로 안내했다. 주방 아주머니도 ‘이육사 문학관 주변에는 식당이 없기 때문에 든든하게 먹는 게 좋을 것’이라며 후식도 준비해 주셨다. 든든하게 먹고 이제는 문학관 주변 청포도 샘과 청포도 밭, 이육사 동상과 그 옆의 절정 시비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예전의 청포도 샘과 밭은 청포도가 심겨져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나무가 거의 죽어버려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실상은 겨울이라 추웠지만, 상상으로나마 한 여름날의 싱그러운 청포도의 모습을 떠올리니 유년기 이육사가 형제들과 동무와 어울려 노닐던 모습이 오버랩 되는 듯하다.
문학관에서 밑으로 50m정도 조금만 걸으면, 이육사의 생가 터와 청포도 시비, 목조고택을 볼 수 있다. 실제 이육사 생가 터는 사진에서 보는 시비 옆의 도로로 보면 된다. 조각된 청포도 알알들 위에 새겨진 시비를 읽는 순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구절이 누군가 잊지 못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자극하는 듯했다.

시비 바로 옆에 목재고택이 위치해 있다. 목재고택은 요금을 내면, 숙박할 수 있도록 방이 마련돼 있다. 이옥비 여사도 지난 09년부터 이곳에서 머물며, 손님들이 오시면 방을 내주고 있다. 그녀는 요즘 문학관에 오는 손님들을 위해 많을 때는 하루 16~17회 정도 왔다 갔다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며 안내하고 있다. 이육사가 잠들어 있는 묘소는 2.8km 의 청포도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다. 이육사의 주요 시상지가 된 곳은 바로 ‘절정’을 탄생시킨 왕모산 앞의 화강암 절벽 ‘갈선대’와 ‘광야’의 시상지가 된 봉우리 ‘쌍봉 윷판대’ 두 곳이다. 이육사 문학관이 위치한 원촌리를 찾아가 단순히 문학관만 보고 오기엔 너무나 아까운 절경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당일로 와서 제대로 구경하긴 힘들 듯하다. 다음달 10일 오후 2시부터 이육사 문학관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선보이고 있다. 이육사 문학축전 ‘겨울’이 열리고, 안현미 시인의 이육사 문학관 낭독회가 있다. 또한 지역명사초대 시와 추억 만들기가 준비돼 있으며, 4시에 이육사 독립영화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의 시사회가 개최된다. 이틀 정도 넉넉잡아 고택에서 하룻밤 머물며, 이육사의 시상이 된 원촌마을 곳곳을 구경해보고, 각종 행사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독립운동가 이육사
사람들은 이육사하면 ‘시인’임을 먼저 떠올리고 그가 마지막 생을 무엇을 위해 바쳤는지 잘 알지 못한다. 시인으로서 이육사가 문학계에 기여한 공로는 충분히 인정받고, 집중 조명을 받아왔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삶은 자료 부족으로 그다지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육사의 친가와 외가는 독립운동 집안으로 항일민족정신을 강조해 왔다. 그가 첫 연루된 사건은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의거로 그 당시 육사뿐만 아니라 원기(맏형), 원일, 원조 4형제가 검거돼 옥고를 치뤘다. 이때 죄수번호 264번이 이육사의 호가 돼버린 것이다. 1930년은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던 육사가 대구격문사건의 주종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후 1931년 중국에 의열단 단원을 통해 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고, 독립의 의지가 구체화됐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1932년에 의열단이 설립한 군사학교로 육사는 1기 졸업생이었다. 이곳에서 군사학, 통신학, 폭탄제조법, 피신법, 암살법 등을 배웠다고 한다. 평생 17번의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에 살이 찢기는 아픔 속에서 오로지 조국해방을 위한 일념으로 모진 고문을 이겨냈다. 하지만 결국 오랜 수감생활로 쇠약해진 몸으로 폐가 약화돼 고생을 했고 1943년에 국내 항일 조직에 도움이 되고자 무기반입을 시도했다가 귀국한 틈에 검거됐다. 북경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할 당시 얼마 남지 않은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어린 딸 옥비의 뺨을 부비며, ‘아버지 갔다 올게’라는 한마디를 남긴 뒤 다시 가족과 아내, 딸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육사의 문학사적 의의
이위발 사무국장은 현 문학 교육에 대해 “시인들이 어떤 경향에 의해 시를 쓴 것이 다가 아닌데, 그런 것으로만 치부할 때 혹은 학생들이 시어 속에 있는 함축적 의미마저 하나의 의미로 획일화하는 공부를 할 때, 그런 점이 아쉽다”고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제 이육사 선생님의 시 청포도에서 ‘내 고장 칠월은...’와 ‘먼데 하늘이 꿈꾸며’에서 ‘내 고장’과 ‘먼데’ 라는 시어를 ‘조국’의 의미로 배웠다. 허나 ‘조국’의 의미도 있지만, 분명 ‘먼먼데’라고 불렸던 이육사 선생의 고향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무국장은 “문학은 독자가 읽을 때마다 느낌과 감정이 다른데,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는 것과 해석을 한쪽으로만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안타까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고 했다. 이육사 선생님의 모든 시를 저항시로 못 박아버려서 ‘청포도’ 같은 인간적인 삶을 노래한 시를 저항시로만 해석하는 것은 뭔가 부족한 면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청포도’는 떠돌이 생활을 했던 이육사의 몸은 타국에 있지만 몸에 베여 있는 고향, 가슴 속에 세겨져 있는 고향을 보여주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청포도’를 읽었을 때 느껴지는 첫 감정은 싱그러움과 정갈함이었다. 눈을 감고 ‘청포도’ 시를 그 자체로 음미해 보길 추천한다. ‘청포도’는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노래를 들으면 ‘청포도’ 알알들의 색깔과 ‘하늘’과 ‘바다’의 맑은 색과 ‘흰 돛단배’ 그리고 ‘은쟁반’, 이 시어들의 이미지가 하나의 영상으로 당신의 머릿속에 펼쳐지지 않을까?
이육사 선생님의 시어에 나타나는 특징을 들자면 한자 시어 활용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 사무국장은 “한자 시어 활용이 뛰어나다는 것은 ‘광야’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모든 산맥이...’에서 ‘맥’을 ‘줄기 맥’으로 표기되고 있으나 그는 ‘마주볼 맥’을 사용했다. 이는 뒤에 구절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에서 바다를 연모할 수 있는 것은 산맥들이 마주봐야 가능한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원전에 어긋난 오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이육사는 4세에 한학을 배웠기에 시에 한자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자 시어와 같이 한자평론, 사회평론, 엽서 등을 보아도 한자가 다수 포함돼 있다.
이처럼 육사의 시는 한자를 이용해 모든 작품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었으며 또한 가볍지 않게 쓰여 질 수 있었다. 이위발 사무국장은 “육사 선생님이 쓴 작품 36편 중 한자시가 아닌 유일한 시가 조선일보 1930년 신년 시로 발표된 ‘말’이라는 시이다. 이 시는 평소 사회평론을 작명 ‘이활’로 썼던 것으로 발표되면서 이육사 선생의 시로 편입됐다. 하지만 이육사 선생은 1930년 신석초 시인과 같이 등단하면서 그 전에 발표된 ‘말’이라는 시가 그 당시 알려지지 않았고, 여러 요인들에 의해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작품이다”고 했다. 앞으로 ‘말’이라는 작품에 대해 진위를 확실히 보여 줄 결정적 증거가 나올 경우 편입된 작품이 다시 제외될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 이육사를 재조명하고자! 딸 이옥비

기름질 ‘옥’에 아닐 ‘비’, 옥비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선물이다. 원래는 언니와 오빠가 있었는데, 홍역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결혼한 지 20년 정도 되던 해 내가 태어나고 경사로 여겨 삼촌들이 서로 이름을 지어주려 했으나 아버지가 직접 지으시겠다며, 100일 됐을 때 욕심 없이 살라는 뜻에서 가족들 앞에서 발표하신 이름이다. 사춘기 때는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이것저것 계속 이야기 하시는 것을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이렇게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오시는 분들께 아버지 얘기를 해 줄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Q. 아버지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이 있으신가요?
A.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의상을 독특하게 입으셨다는 것과 4살 때 북경으로 압송되실 때 손이 묶인 채 얼굴은 용수를 쓰고 계셨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왜 얼굴에 무언가를 쓴 채 압송됐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대구교도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용수를 쓴 한 사람을 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보리색 양복과 노란넥타이가 기억에 난다. 아버지는 지금 생각해도 멋쟁이였다.    
Q.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요?
A. 어머니는 아버지로 인해 고생을 많이 하셨다. 궁중요리를 전수받은 어머니는 음식솜씨 있으신 분이었고, 시어머니를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할 만큼 극진히 모셨던 분이었다. 어머니를 78세가 되기까지 오랜 기간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었다고 하셨는데, 아버지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렇게 바느질을 하시면서 생활을 꾸려나가셨다.
Q. ‘절정’에 보면 난초를 그리신 뒤 ‘이육사’라는 이름을 적을 때, ‘죽일 육’‘역사 사’를 쓰시는 것을 보고 이름을 고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요?
A. 광복절 특집날 방영된 ‘절정’은 아버지의 일생을 사실에 근접하게 담은 드라마인데, 이는 작가들이 목조고택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계속 얘기를 나누고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 본명은 이원록이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실 때 수인번호를 따 지은 호가 이육사인데 이때 한자로 ‘살육 육’자를 쓰셨는데, 어른들이 이름에 살기가 돋는다고 바꾸라고 하셨고, 이에 ‘대륙 육’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Q. 영화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의 내용과 출연동기가 어떻게 되시나요?
A. 내용은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가 현재를 내려다보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나는 딸로, 문학관 이위발 사무국장은 이육사의 동생 원조 역으로 같이 출연했다. 연기라고 하기도 부끄럽지만 출연하게 됐고 영상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 외에도 이육사 가무 뮤지컬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오디션을 한다며, 내년 28일 처음 공연하고 각 도시로 돌아가며 공연한다고 한다.  
Q. 이육사 문학관을 운영하시면서 어려운 점과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되시나요?
A. 아버지는 문학적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점은 부각되지 않고 있다. 문학사뿐만 아니라 독립사의 측면에서 아버지를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자료가 많이 필요한데, 자료를 찾기가 너무 힘들다. 아버지가 순국하신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의 마지막 기록인 조서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서류를 일본인이 소유하거나 전쟁을 겪으면서 소실, 누락 된 것이 많아 상세히 알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아버지가 무기를 공급하셨던 부분도 기밀이었기에 상세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독립사적으로 아버지가 이루신 큰 덩어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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