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공포’라는 유령과 싸우기
‘경제적 공포’라는 유령과 싸우기
  • 서인석 교수(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1.11.16 2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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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 특히 대학 갬퍼스의 분위기를 맑스의 유명한 표현을 빌려 본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 같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캠퍼스를 배회하고 있다. 경제적 공포라는 유령이.” 경제적 공포! 그렇다. 대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얼마 안 가서 취직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철들고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 ‘우정’ ‘낭만’ 등의 언어에 취하여 약간의 술주정도 부려봄직한 20대 초반의 청춘이 이 유령의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은 어느새 ‘학문 공동체’로서의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시장’의 논리에 휩쓸려 가고 있다. 삶의 다양성을 키워가기보다는 시장의 쓰임새에 맞추어 자신을 획일적으로 주조해가는 시대, 젊은이들은 취직을 위한 획일적 ‘스펙’을 쌓느라 바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취직은 쉽지 않아서, ‘청년 실업 600만 시대’니 ‘88만원 시대’니 하는 말들이 나오고, 그 속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청춘들은 재학 중에 그리고 졸업 후에도 한 동안 이 ‘경제적 공포’에 시달린다. 사람들 중에는 경제가 활성화되면 고용이 증대되고 이런 경제적 공포도 완화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문제가 그리 단순해보이지 않는다.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는 어떤 일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연히 생겨나는 게 아니라 기술적인 성공의 결과로 생긴 것들이다.’라고 한 바 있다. 즉 현 상황은 ‘불황’ 내지 ‘실수’의 결과라기보다는 현 시장 경제 체제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전체 기획의 성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배태된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 혹은 글로벌 기업 중심의 시장 만능을 주장하고 모든 젊은이를 이들이 주도하는 ‘시장 경제’ 속으로 들어오라고 외치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 거대한 사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에 입성하여 풍족하게 살 수도 있고, 그런 삶도 시장 경제가 주도하는 현실에서 나름대로 의미는 있다


고 본다. 그러나 어차피 많은 젊은이들이 도태되어 ‘잉여 인간’으로 남게 되는 상황이라면, 누군가는 차라리 ‘경제적 공포’라는 유령과 싸우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싸움은 어떤 것일까?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 싸움은 ‘경제적 공포’를 주는 ‘시장 경제’의 주류 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시장 가치’가 포괄하지 못하는 다른 가치들을 추구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시장 경제가 확립되면서 인간이 ‘노동’이라는 허구적 상품으로 바뀐 것을 다시 한 번 뒤집는 유쾌한 반란이기도 하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지적했듯이, 노동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이고 ‘생명’ 즉 ‘삶’과 직결된 것으로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싸움은 어렵다. 또 다른 경제적 공포와 만날 수 있고, 주류 시장 경제의 ‘외부’를 끊임없이 창출해내는 고통도 따른다. 그리고 청춘을 뛰어 넘어 나이가 들면 어찌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혹 청춘이 지나가 생각이 바뀌면 다시 시장 경제를 기웃거릴지라도, 젊은이답게 한 번 유쾌한 반란을 꿈 꿔 볼 만하지 않은가. 수입이 좀 적더라도 의연하게 살아가는 삶. 이런 삶을 꿈꾸는 학생들이 많아지면, 입학은 환영받으나 졸업은 축복받지 못하는 이 기묘한 대학 풍경도 바뀌지 않겠는가? 낙엽이 지는 이 늦가을에,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문학도로서 몇 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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