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로 보는 현대사회-미술의 사회적 역할
현대미술로 보는 현대사회-미술의 사회적 역할
  • 박소영 씨(미학미술사학과 박사과정)
  • 승인 2011.11.16 2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벽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감상한 기억을 떠올려보자. 작품은 당연히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니 우리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오직 ‘망막’에 의존해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 한 후,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음 작품으로 이동한다. 흔히 관객은 작가가 보여주는 작품을 일방적이고 수동적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이때 작가와 관객과의 관계는 수직적 위계관계로 설정된다. 이는 모더니즘 미술의 관람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잭슨 폴록, Number 5, 1948년

모더니즘 미술이 추구하는 것은 예술의 ‘순수성’이다. 무엇으로부터 순수성을 가진다는 것일까. 그것은 미술이 우리의 현실에 대한 탐구, 정치적 내러티브를 담고 있어서는 안 되며, 순수한 형과 색의 조형적 잠재성을 탐구해야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 미술가를 대표하는 잭슨 폴록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걸쭉한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뿌려서 제작한 폴록의 추상화에서 물감은 그저 물감 그 자체로 캔버스 위에 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폴록의 추상화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중첩된 색색의 물감 덩어리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작품들을 보며 그저 정신적 고양을 얻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미술은 그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그러한 의문은 늘 품게 되며, 미술사 공부에 대한 회의를 느낄 때도 있다. 한 가지 경험을 얘기하자면, 몇 해 전 수업 발표 준비를 할 때의 일이다.
내가 맡은 작가는 빛과 색채의 관계에 집중하여 일찍이 추상화와도 같은 그림을 그린 윌리엄 터너였다. 발표준비를 거의 끝내고 마지막으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비교적 단순한 작업이라 TV를 보며 하고 있었는데, 그때 TV 화면에서 너무도 강렬하게 증오의 눈빛을 던지는 어린 여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이름은 루빠. 루빠의 얼굴에는 흔히 8살 난 여자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해맑음은 없었다. 루빠는 네팔의 수드라 계급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이 모여 사는 강가의 천막촌에 살면서 강가에서 캔 큰 돌을 잘게 부수어 그것을 팔아서 살아가는 아이였다. 눈을 뜨면 돌을 깨기 시작해서 잠들 때까지 돌을 깨서 버는 돈은 고작 70원 정도이다. 그 70원의 대부분도 빚을 갚는 데 쓰인다. 돌을 깨지 않으면 하루 두 끼의 죽을 먹을 수 없다. 그러니 학교를 가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루빠는 돌을 깨다가 서러움에 북받쳐 간혹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루빠와 같은 아이들은 강가를 따라 셀 수 없이 많았다. 아이들의 부모는 있지만 그들 역시 어려서부터 돌 깨는 일을 했고, 제대로 먹지 못해 온통 아픈 사람들뿐이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살아가는 루빠에게도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 양쪽 팔이 없는 동생과 병으로 고생하는 천막촌 사람들을 고쳐주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가슴 아픈 것은 네팔의 사회적 구조에서는 루빠의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터너의 작품들을 정리하던 나는 루빠를 보며 스스로 비참함을 느꼈다. 현실이 저러한데 내가 터너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회의가 느껴졌다.
모더니즘 미술은 내용, 주제, 이념을 배제하면서도 형식 그 자체, 이를테면 시각적인 효과, 색채나 형태, 물감의 질감, 화면 내에서 그것들의 조화만으로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모더니즘 미술을 부정하고 반기를 들며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다. 모더니즘의 형식성에 반대하여 작품에 내용(내러티브)이 들어가고 순수성에 반하여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추구하며, 독창성(originality)에 반하여 차용이 들어간다.
미술이 사회적 이슈에 개입하고 정치성을 드러내는 것은 모더니즘 이후의 다양한 미술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현대미술 작품은 눈으로만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작가와 관객과의 수직적 위계관계도 깨어진다. 많은 현대미술가들은 관객을 능동적인 참여자로 인식하고, 작품의 의미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끊임없이 유도한다.

곤잘레스-토레스, Untitled(Death by Gun), 1990년

쿠바출신의 미국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1957-1996)의 작품 <Untitled(Death by Gun)>(1990년)은 1989년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의 일주일 사이 미국 내에서 총기사고로 죽은 464명을 주제로 다룬 작업이다. <무제(총기사망)>은 오프셋 인쇄로 프린트된 수 백 장의 종이가 적당한 높이로 쌓여 있고, 관객은 그것을 가져갈 수 있다. 관객이 어느 정도 가져가면, 프린트 된 종이는 적당한 높이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채워진다. 이 작품은 당시 총기사건을 보도한 타임지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여 희생자들의 사진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데, 곤잘레스-토레스는 사진과 함께 이들의 이름, 나이, 성별, 살았던 곳,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담았다. 그 사진들의 배열방식은 위계적 질서 없이 그리고 인종, 성별, 계급, 나이, 죽음의 상황(자살과 타살)에 대한 어떠한 위계적인 배열을 고려하지 않고 구성됐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은 그저 ‘지난 일주일 동안 총기사고로 460여 명이 죽었다’라는 식의 숫자로 처리 되어 익명으로 사라져버린 464명의 개인들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준다. 또한 이 작품은 군수산업의 막대한 이익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미국의 총기규제 완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죽음들이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를 자신의 오프셋 인쇄 작품을 관객이 가져가도록 하는 방식으로 널리 환기시킨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은 사회와 괴리되어 있는 예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돈 있는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특별한 오브제로서의 예술작품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바이러스처럼 사회 속에 침투하기를 원한다.”라고 한 그의 말과 같이 곤잘레스-토레스의 사회적 관심은 작품 안에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는 주요소가 된다.
사회적 역할의 측면에서 보면, 예술의 힘은 그 어떤 사회적, 정치적 활동보다 강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은 현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그 어떤 사회, 정치적 활동보다도 감성적으로 내밀하고도 깊게 스며들 수 있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