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행동으로 옮겨라
지금 이 순간, 행동으로 옮겨라
  • 남경순 명예기자
  • 승인 2007.04.11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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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을 앞둔 염홍경 교수(독어독문학)과의 인터뷰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 예상치 못한 전날의 밤샘작업으로 준비한 인터뷰 내용을 다 이끌어내지 못한 아쉬움에 하루 종일 시달려야만 했다.
 염 교수님을 처음 만난 건 3년 전(2003년) 천마문화상(영대신문 주최) 심사와 문학 강연자 선정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공지영이라는 걸쭉한 문학인을 초청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당시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3년이 지나 다시 만난 교수님(2006년). 예전보다 살이 빠지신 것 같기도 하고, 더 여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창작과 비평>의 발행인과 편집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라는 화려한 활동에 이어 최근 ‘6·15문학인협회’ 남측 회장까지 맡고 있는 등 세상에 대한 애정과 열정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보낸 질문지가 도착하지 않았어. 네 탓이 아니야.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 어떤 사람이 학과 홈페이지를 만들었는지 이메일 주소를 만들었으면 나한테 연락해야 할 것 아냐. 준비 안 된 숙제를 어떻게 하나. 아이고, 모르겠다. 그냥 편안하게 하지” 만나자 마자 교수님이 하소연 하듯 이야기를 풀어내신다.
 요즘 교수님은 학교를 오는 횟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날씨가 추워서이기도 하지만, 조금씩 학교를 떠나는 작별 연습을 하기 위해 적응훈련을 하는 거란다.

신자유주의 세상 … 그래도 ‘대학’만큼은 저항해야
‘불안’을 안고 사는 학생들 … ‘안쓰럽고 안타까워’
사회 변화의 희망 … 공직자들의 ‘희생’

‘영남대학교와 나’에 대한 질문

△ 정년퇴임을 앞둔 심정

 “영남대학에서 생활한 지 27년이 지났어. 사실, 교수직을 그만둔 건 후련해. 오늘날 우리 대학은 대학이 아니야. 늘 나로서는 학생들을 속여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사회전체가 세계화니 신자유주의로 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학문공동체라고 하는 대학만큼은 거기에 저항을 해야 하잖아. 하지만 오늘날 우리 대학사회라고 하는 것은 시장논리를 앞장서서 추종하고 있어. 여기를 떠나는 게 아주 후련해” 후련하다는 교수님의 표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30년 가까운 시간을 대학에서 보내면서 변화된 모습에 느끼는 것도 많으리라. “학생들의 수준이 점점 저하되고 있어. 사회 전체 수준이 저하되고 있는 거야. 가령, 수업시간 학생들에게 ‘니체를 알아요?’라고 물으면 독문과 학생인데도 대부분 몰라. 이게 학생 탓이 아니야. 이 물질만능, 아파트 광풍이라는 사회가 학생들을 이렇게 만든 거야. 내가 졸업을 했던 64년에도 요즘처럼 어려웠어. 직장도 별로 없고 국민 소득은 백 달러이상을 넘기기 어려웠지. 그래도 그때는 절망적이지 않았어. 요즘에는 먹을 것도 많고 경제규모도 이렇게 성장했는데, 다들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아. 알 수 없는 자신의 미래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안의 감정을 항상 갖고 있는 것 같아. 학생들이 참 안됐어. 세상 흐름을 거스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라고 권유할 수도 없고, 반대로 이 세상의 물결을 앞장서서 경쟁에서 이기라고만 하기도 어렵고 말이지. 이건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해. 세상의 구조를 바꿔야 해. 6,70년 군사정부 때 보다 훨씬 어렵고 근본적인 싸움이 필요한 거야.”

△ 교수기간 아쉬웠던 점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했다는 점이야. 나는 70년대 서울 덕성여대 교수로 있다가 76년 초 처음 제정된 교수 재임용법에 적용되어 해직 됐어. 그러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었고 민주화 분위기가 살아났지. 해직됐던 교수들에게 복직에 허용 됐지만, 난 70년 대 민주화 운동으로 못했던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던 사이에 어떤 인연으로 영남대학에 오게 됐지. 대구에 와서 공부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광주항쟁이 일어났지. 차분하게 책을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어. 술로 많은 시간을 보냈어. 80, 90년대 세상을 향한 불만에 가득 차서 공부를 잘 못한 게 후회되고 안타까워. 정년퇴임을 하는 교수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공부뿐만 아니라 모든 게 때가 있어. 여행이든 공부든 돈벌이든 연애든 뭔가 해보고 싶은 사람은 때를 놓치지 말고 해야 돼. 나이를 들어보니깐 공부를 하고 싶어도 체력이 안 돼서 문제가 생겨.”

△ 교수시절의 문학인으로서 삶은

 “내 경우는 학교 교수직에 있으면서도 문학 활동을 꾸준히 해왔잖아. 그 중 1993년부터 3년 동안 한국민족예술총연합(이하 민예총) 회장직을 맡은 적이 있어. 당시 민예총은 임의 단체였는데,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단법인화로 승격시켜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 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되면서 2004년에는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어. 제일 큰 업적은 작년 10월 분단 사상 처음으로 남북의 문인 200여명을 만나게 한 거야. 당시 합의 사항으로 금년 11월 29일 금강산에서 ‘6·15민족문학인협회’ 결성식을 가졌어. 이것은 문학사에서도 획기적인 일이고 통일운동사에서도 처음이야. “


우리사회에 대한 소감
△ 대구 활동에서의 어려움


 젊었을 적 누이가 결혼해 대구에서 살았다는 교수님은 그런 점에서 대구가 자신에게 낯선 도시는 아니라고 했다. 대구에서 활동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이 편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구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야. 30년 가까이 영남대학에서 교수로 생활하는데 아직도 나를 안 끼어줘. 외지인 취급을 하는 거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것 같고 ‘저 사람 언젠가 떠나겠지’ 하고 생각 하는 것 같아. 그래서 여러 제약이 있었지.”

△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방법은?

 “사회 문제는 마치 그물코처럼 코와 코가 연결되어 있어. 한 군데가 잘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야. 나는 기본적으로 공직자라고 생각하지. 공무원들, 지식인들, 종교인, 어떤 의미에서 사립대학 교수도 공직자야. 이런 사람들이 나서서 책임을 져야해. 책임을 진다는 건 손해를 봐야 된다는 거야.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돼. 돌을 쌓아 만든 담을 부수자면 누군가가 또 다른 돌을 빼내어야 해. 자기희생이라는 게 빼내는 역할이거든. 그런데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구조는 절대 불변이야.”


앞으로의 활동 계획


얼마 전, 염 교수님은 ‘6ㆍ15 남북작가협회’의 대표뿐 아니라 세종대학 총장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퇴임 후 교수님의 문인, 사회, 교육 등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내 자신 다시 학교로 복귀할 계획이 없어. 정말 떨어지길 잘했지, 금년 초에 세종대 총장이 됐다면 건강이 유지됐을지 몰라. 요즘에는 6ㆍ15민족문화협회 남측 회장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 퇴직 이후 여건이 된다면, 5,6개월쯤 한국 사회를 떠나 독일에서 책도 보고 머리도 식히고 싶어. 책으로 보던 독일 문학과 사회를 직접 봤으면 하는데, 이 사회가 나를 놓아줄지 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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