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굴욕을 넘어서는 굴욕
[독자기고]굴욕을 넘어서는 굴욕
  • 박진규 씨(정치외교 석사 2기)
  • 승인 2011.09.15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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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안 우리 대학교가 불명예에 시달렸다. 한 교수가 자신의 학생을 성폭행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이 중앙언론에 보도될 정도였고 아직도 주요 포털에 우리 학교명의 연관검색어로 명시될 정도이니 심한 불명예임에 틀림이 없다. 학교 성원들의 분노도 지속되고 있다. 방학 내내 많은 학우들이 학교 누리집 자유게시판을 통해 분노감을 분출했던 한편, 영대신문 역시 지난 호 1면 톱기사로 이 사안을 다루었고 이와 관련하여 분노감 가득한 한 학우의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 설파한 네크라소프의 시구를 감히 빌린다면, 지금의 분노감 역시 학교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려스러운 점은 많은 성원들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대학교 내외 언론에서 전해지는 보도내용도 사실관계를 파악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내용이었다.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거나 이를 명확히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결여한 채 “영남대 성폭행”이라는 단 여섯 글자 정도를 가지고 이처럼 무자비한 분노감을 표출하는 것은 인민재판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런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다. 정치학자인 공진성은 폭력의 폭력성을 규정하는 것은 폭력의 사용자가 아닌 폭력의 대상에게 달려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폭력을 당한 사람이 폭력을 당했다고 여긴다면, 폭력이 폭력성을 지닌 것이 된다. 이 같은 논리가 실제 성범죄 성립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흔히 사용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피해자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이 같은 사안에서는 폭력이 발생한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있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 당사자가 아니니 실체적 진실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반면에 지금 우리네들이 표출하는 반응들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대로다. 예컨대 한 학우가 지난 호 본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미 성폭행설과 관련해 모든 결론이 난 것처럼 한 교수를 성범죄자로 상정하고 글을 전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유게시판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많은 이들 역시 가해자로 지칭되는 그를 만나면 침을 뱉어 줄 것처럼,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먼발치에서 욕지거리라도 해줄듯이 분노하고 있다.
실체적 진실을 알 수 없다고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앞에 벌어진 불의에 대해 분노하고 또 분노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학교의 불명예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학교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더욱이 권력의 우위를 이용하여 어떤 불의를 저지르는 이가 있다면 더 거세게 분노해야 하는 것은 학교 내외에서는 시민으로서 학교 내에서는 학생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분노는 성급한 예단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명확한 사실에 대한 확인이 선행된 이후 행해져야만 한다. 또한 ‘모든 국민은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이전에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사회적 약속으로 정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 더더욱 성폭행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이들이, 인권을 옹호한다고 자부하고 권력을 비판하기를 즐기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지금 그렇게 행동하면서, 또 다른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권력에게 준법을 요구하고 인권을 이야기하겠는가? 지금까지 흐름으로 볼 때, 성추행 의혹이 사실로 판명되고 징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관계를 넘어서는 성급한 비판은 삼가야 한다. 또한 별론으로, 사실관계가 더욱 명확해지도록 노력할 책임이 학내 주요언론인 영대신문에 요구되기도 한다. 성추행 의혹 자체로도 굴욕적인 일이지만, 성급한 편견과 예단에 사로잡힌 지금의 여론재판은 더욱 굴욕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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