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인은 참으로 위대하다
독서인은 참으로 위대하다
  • 편집국
  • 승인 2011.06.0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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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안경을 끼면 사물이 붉게 보인다. 토마스 S 쿤에 의하면 ‘붉은 안경’은 패러다임에 해당한다. 어느 시대에나 가치판단의 틀인 패러다임이 존재했고, 패러다임과 패러다임 간에는 상반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허균의 경우는 그 좋은 예이다. 조선 중기에는 허균을 ‘괴물’이라 평가했고 오늘날에는 허균을 ‘선각자’라 평가한다. 조선 중기에는 중세 보편주의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했고 오늘날에는 개성주의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패러다임이 허균을 괴물로도 만들고 선각자로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미루어 가면 패러다임이 대상의 본질까지도 다르게 인식하도록 한다는 언급이 가능하다.
패러다임은 장단점을 모두 지닌다. 장점은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패러다임이 관점과 범주의 보편 원리이므로 이에 기대면 참으로 편리하다. 힘들이지 않고 문제를 풀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한편, 단점은 대상의 본질을 가려버리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패러다임은 특정 시대의 소산이므로, 특정 시대가 요구하는 부분만 긍정적으로 평가하게끔 추동한다. 시대가 바뀌면 긍정적인 부분이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통시적인 측면에서는 준거가 유동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패러다임이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니는 한, 패러다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패러다임이 왕성한 곳에 대상의 본질이 보이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퇴계 독서법의 교훈은 특정 패러다임을 허용하지 않는다. 특정 패러다임으로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크고 넓고 높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퇴계 독서법의 기조는 이(理)의 발(發)이다. 심(心)의 영역인 도심(道心)과 성(性)의 영역인 본연지성(本然之性)과 존재겢瑛㎱?영역인 소이연(所以然)겮年玲?所當然)과 정(情)의 영역인 사단(四端)을 이의 발로 설명했기 때문에 이런 지적이 가능하다. 퇴계가 주장한 이의 발은 주자보다는 한결 뚜렷한 편이다. 주자는 이의 발을 인정하기도 하고 인정하지 않기도 함으로써 논점을 채 정비하지 못한 인상을 준다(『주자어류』권53). 이가 발한다고 했다가 무조작(無造作)·무정의(無情意)라고 하는 데서 이런 지적을 할 수 있다. 퇴계는 고봉과의 사칠논변 이후부터 줄곧 독서법에서 이의 발을 주장했으니, 한결같이 이의 발을 주장했다고 할 만하다.
이(理)의 발(發)이 사물을 해석하기 위한 기본 틀이라고 할 때, 이런 기본 틀이 독서법에 왜 필요한지가 관심사이다. 퇴계는 문집 곳곳에서 독서인에게 순선무악한 세계로 나가라고 촉구한다. 성현의 의취가 사단 혹은 이의 구현이라고 하면서, 독서인으로 하여금 사단 혹은 이를 구현함으로써 순선무악한 세계를 보존·확충하라고 하므로 이렇게 볼 수 있다. 순선무악한 세계란 일상생활의 모습이 아니고 독서인의 이상적 목표라는 점에서,‘있어야 할 것’의 당위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상대방이 누구든지 거론의 정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퇴계가 소망하는 바는 불변이다. 독서인이 독서법의 지침에 따라‘있어야 할 것’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의 과업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바란다는 점이 그것이다.
퇴계가 부여하는 과업은 인간 능력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한다. 인간의 사유능력과 실천 능력이 미약하다고 느꼈다면 우주론적 과업을 부여하지 않았을 터이다. 인간의 무한한 능력과 우주론적 과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퇴계 독서법은 초시대적·초역사적인 교훈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교훈의 내용이 많이 와 닿거나 적게 와 닿을 수는 있어도 전무한 경우는 결코 없으리라고 본다. 시공을 초월해서 영향을 미치는 교훈이라면 패러다임의 범주를 넘어선다. 오늘날 실용적 차원의 패러다임으로 퇴계 독서법을 폄하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전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퇴계 독서법은‘생명을 잃은’독서법이 아니다. 독서인에게 우주론적인 의미의‘있어야 할 것’으로 나아가게 하므로‘살아 있는’독서법이라고 해야 옳다. 독서인은 참으로 위대하다. 퇴계에 의하면 우주의 선의지를 읽어내고 우주론적인 과업에 동참하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독서인의 삶은 짧고 과업은 끝이 없다는 점을 들어, 독서인의 위대성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각 시대의 독서인이 분담해서 우주론적 과업을 완성해 나가므로 어느 시대의 독서인이든 위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퇴계 독서법이 독서인의 위대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현대인 모두가 독서인의 위치에서 그런 교훈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교훈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우주론적 과업에 동참할 자격을 얻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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