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대신문」으로 보는 우리 대학교 축제의 역사
「영대신문」으로 보는 우리 대학교 축제의 역사
  • 박예희, 이수정 기자
  • 승인 2011.05.18 16: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월 25일부터 대동제가 열린다. 최근 우리대학의 축제는 주막과 인기가수들의 행사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 대학교 축제의 모습을 70·80년대부터 90년대, 2000년대까지 살펴본다. 또한 그 시대를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할 대학축제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다양한 문화를 가진 70년대 축제
◆우리 대학교 축제의 시작은‘천마축전’=70년대 우리 대학교의 축제는‘천마축전’이라는 행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행사는 개교기념행사와 함께 개최됐다. 천마축전은 종합체육제전, 교수학생바둑대회, 종합예술제, 단막극경연대회 등으로 구성되었다. 종합예술제는 1부와 2부로 나눠져 피아노, 바이올린 연주와 합창, 부채춤에 이어 연극부의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종합체육제전은 육상경기, 구기 종목 경기 등 종목이 다양했다.
◆대학의 구성원이 모두 참가하는 축제=특히 천마축전의 마지막 날에는 매년‘모정에 젖는 밤’이라는 행사를 진행했다. 이는 총학생회의 여학생부가 주최하고 우리 대학교 학생과 학부모가 참가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행사에서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노래자랑이 진행돼 학부모 역시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또한 교수학생바둑대회를 통해 교수가 축제에 직접 참가했다. 현재 대학교의 축제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것으로 70년대의 축제와 요즘의 축제는 서로 상반된 분위기를 보여준다. 70년대의 대학교 축제는 학생, 교수, 학부모가 대학교 축제에 직접 참가하면서 대학 구성원 모두가 축제의 분위기를 나눴다는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학술적 성격의 행사 많아= 천마축전은 1974년에 열린 7번째 축제 때 이름을 ‘천마축제’로 변경했다. 또한 이때부터 지·덕·체를 갖춘 교내 행사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4년 5월 14일에 발행된 영대신문 제237호에서 정대규 씨(사범대4)는 천마축제와 같은 큰 행사일수록 세심한 주의를 기우려 영대인으로서 대학생활에 바람직한 행사를 만들자는 의견을 투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개교30년 기념 축제는 취미전시회와 교수미전, 음악경연대회, 학술토론대회 등과 같은 학술적인 성격의 행사가 많이 열렸다. 이렇듯 축제 기간 동안 학술행사를 진행함에 있어 학술을 통한 대화를 진작시킴과 동시에 면학분위기를 진작시킬 수 있었다. 그 후로도 학술적 성격의 행사는 70년대 천마축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단대, 과별 특색 살린 행사 없어=그러나 단과대나 과별로 특색을 살 린 행사가 없어 1978년 5월 10일에 발행된 영대신문 제913호에서는 이에대해 안타까워하는 기사가 보인다. 또한 축제 프로그램에 대한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축제라는 분위기에만 휩쓸리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민족적 정서를 느낄 수 있는 80년대 축제


◆축제의 대부분은 체육대회=8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 대학교 축제는 ‘천마축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천마축제는 천마체전을 필두로 써클(동아리), 각 단과대학의 행사로 이루어졌다. 천마체전에서는 요즘 대학교 축제에서 보기 힘든 마라톤이나 400m계주, 단체 줄넘기, 단체 줄다리기와 같은 체육대회로 구성됐다. 천마축제의 프로그램 중에는 학생회관 로비, 인문관 복도 등 학생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소에 동아리 전시회가 열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와 같이 80년대의 축제는 단과 대학의 학부생이나 써클의 참여가 축제의 주를 이루었다.
◆80년대 시대적 상황이 충분히 반영돼=특히 80년대에는 민족정서를 드러내는 행사가 많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대표적인 예가‘민속제’이다. 이 행사에서 우리 대학교 학생들은 봉산탈춤, 하회별신굿, 차전놀이, 지신밟기, 씨름 등과 같은 민속놀이를 즐겼다. 더불어 8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우리 대학교 축제에서는 김지하의 작품을 마당극으로 각색해 공연하거나 광주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한 상황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축제 이름, 천마대동제로 변경=1987년에는‘천마축제’에서‘천마대동제’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초청강연회나 천마가요제, 인근 7천여 명이 함께하는 영산대동놀이 등 다양한 행사로 축제를 꾸렸다. 80년대의 대학교 축제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대동제에 대한 고민=하지만 이 시대에도 대학교 축제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었다. 영대신문 1981년 5월 20일에 발행된 제999호에는“천마축제는 모든 구성원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한다. 또한 학생 행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됐다. 또한 축제에는 양희은이나 윤형주, 김민기와 같은 기성가수들의 무대가 꾸려지기도 했다. 이에‘대학교의 축제가 대중문화적인 성격에 젖어있다’는 의견과 함께‘축제를 통한 대학생의 의식함양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1983년 5월 25일에 발행된 영대신문 제1045호에 실려 80년대에 도 지금과 같은 고민이 나타난다. 허창덕 교수(사회학과)는 80년대 중, 후반 우리 대학교 사회학과에 진학해 우리 대학교의 축제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람 중 한명이다. 허 교수는“당시 대학교의 축제는 우리 민족 역사와 전통문화 위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또한 현재 천마로에서 단체 줄넘기나 농악, 사물놀이 같은 행사가 많이 열렸고 몇 명 학생은 한복을 직접 입기도 했다며 그 당시 축제의 분위기를 회상했다. 허 교수는 현재 우리 대학교의 축제에 대해 많이 아쉬워했다. 예전과는 달리 교수나 교직원과 같은 교내 구성원과 함께 하는 축제보다는 학생들만을 위한 축제 행사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더불어“대학생이 주체적 인식을 가지고 다양한 대학문화를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문제가 반영됐던 90년대 축제
◆퇴폐지향적인 축제=90년대의 축제는 축제 기간 동안 학교 안은 시내의 술집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요란한 음악을 틀고, 현란한 불빛으로 꾸며진 주막으로 채워졌다. 천마로에서는 학생들이 담배갑을 던져 담배를 따가는 등의 노름행위를 즐겼다. 물풍선 터트리기 놀이는 물풍선에 여자의 나체가 그려지기도 해 타락한 문화의 단면을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총학생회에서는‘민주포졸’이라는 단속반을 만들었다. 이들은 축제기간동안 술주정, 집단폭력 등 대동제의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행동에 대한 단속을 실시했다.
◆축제의 주제는 주로‘통일’=90년대 축제에는 주제가 있었다. 축제의 주제는 주로 통일과 관련 된 것으로‘통일 대동 한마당’‘, 통일 아리랑’과 같은 기치를 내걸고 행사가 진행됐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주제가 그 당시에는 보편적인것이었다. 90년대 축제는 학생들의 이념과 가치를 구현하는 장이었다.


◆축제의 목적은 분명해=특히 이 시기의 축제는 날마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행사가 이뤄졌다. 예를 들면‘열사 추모의 날’‘, 천마인 통일단결의 날’같이 특정한 목적을 두고 학생들이 사회 사안에 대해 한 번 더생각 해 볼 시간을 만든 것이다. 또 천마로에서는 거대한 행사가 이뤄졌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재인‘영산 줄다리기’를 시도한 것이다.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에 옹기종기 붙어 줄다리기를 하면서 구성원들의 단결된 힘을 느낄 수 있는 장이 됐다‘. 촌극 공연대회’라는 새로운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이 행사는‘개인이 가진 문제의식을 집단의 문제로 확산한다’ 는 목표 아래 진행됐다. 촌극에서는 학과생활의 활성화 등이 다뤄졌다.
◆생각하는 대동제=축제에서‘5.6공 모의청문회’가 천마로 가설무대에서 개최됐다. 청문회의 주제로는‘MBC파업사태’‘, 페놀 식수오염’건에 대한 것으로 가상 노태우, 손석희 씨 등을 증언대에 세우는 등의 형식으로 이뤄졌다. 단순히 놀기 위한 축제가 아니라 수업시간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해보는 자리가 마련되기도 한 것이다.


◆술 문화 중심의 행사로 변질돼=하지만 이 당시 축제는 개최에 대한 뚜렷한 목적이 있고, 유익한 행사가 많았던 것에 비해 학생들의 참여가 부족하고, 술 중심의 놀이문화라는 한계를 남겼다. 90년대 후반부에는 각 단대와 자치기구별로 문제점을 파악해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으나 학생들의 관심을 그리 끌지는 못했다.

술 문화가 중심이 된 2000년대 축제
◆축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주막촌=2000년대 들어서 축제하면‘주막’이라는 큰 요소가 학생들의 인식 속에 깊이 자리하게 됐다. 오죽하면 이 때의 축제를‘주(酒)동제’라고 불렀을까. 2009년 6월 1일자 신문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학생들이 가장 만족한 프로그램과 만족하지 못한 프로그램은 모두 주막이었다. 이는 축제에서 학생들에게 주막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보여준다.
◆새롭고 다양한 프로그램 마련돼=따라서 축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부족 현상을 해소하고, 모든 학생들이 함께 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칵테일 쇼’‘, 사주카페’‘. 얼짱 선발대회’와 같은 흥미다운 코너들이 많이 생겨난 것이다. 이 같은 행사를 통해 준비 주체자들만의 자기만족적 행사가 아닌 공동체 문화 형성을 위한 자리를 만들게 됐다.


◆39인의 대동제를 준비하는 사람들=2006년 5월 22일자 영대신문 제1503호에 따르면‘일반학우들도 참여해 대동제를 기획해 보자’는 뜻으로 축제 기획단이 탄생됐다. 이 기획단은 부정부패 정치, 타락한 정치가,귀족주의적 정치가를 비판하고, 한-미 FTA로 인한 농업-교육 개방 등의 문제들을 뒤집어보자는 의미의‘뒤집기’라는 기치를 내걸고 많은 활동을 했다. 축제 기간에 우리밀을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우리 음식경연대회 행사를 개최했고, 모니터링단을 구성하여 주막에 대한 평가를 하기도 했다.
◆인기가수에 대한 뜨거운 관심=우리 대학교 축제의 열기는 어느 순간부터 초청 가수에 따라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축제 때 학술회나 강연회를 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인기 가수가 올수록 학생들이 축제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가수 출연료로 한 회에 수 천만 원씩 쓰는 것은 지나친 낭비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1년에 한 번 뿐인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는 출연료가 아깝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따라서 어느 한쪽만을 옳다고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7개 대학이 연합하여 만드는 축제

최근 대학 축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제의 다양화에서 한층 더 발전했다. 대학끼리의 연합을 통해 기존 거리 축제를 하나의 대학 축제로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서울 7개 대학 연합체가 개최하는‘우리가Green신촌 場暖(장난)’이다. 
지난 12일 서울 신촌에서 7개 대학 연합이‘우리가Green신촌場暖(장난)’행사를 개최했다. 이 축제의 주최를 맡은 단체는 대학 연합체인‘우리가 그린 신촌’과‘연세대동아리연합회’이다. 대학생들이 주최가 되어 구청과 함께 축제를 연다는 것이 흔히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신촌은 1991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거리축제가 열린 장소이다. 하지만 대부분 서대문구나 상인연합회가 주도했다. 따라서 거리축제의 진정한 의미인 다양한 구성원의 참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는 이 거리축제가 연세대와 이화여대, 추계예술대,명지대, 경기대, 서강대, 홍익대 등으로 구성된 7개 대학 연합 대학생에게 주최를 맡겼다. 이로써 신촌은 대학가로서의 성격이 분명해짐과 동시에 신촌의 거리문화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번 행사는‘심장(心場)’‘, 놀장(놀場)’‘, 볼장(볼場)’3개의 무대로 나누어져서 진행된다. 심장의 무대는 인디가수나 교내 밴드등 10여개 팀의 공연으로 채워진다. 놀장의 무대는 노천카페, 캐리커쳐, 전기자동차 시승행사와 같은 학생들이 직접 체험할 수있는 행사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볼장의 무대는 학생들의 그린 작품과 색소폰 연주, 락 공연 등이 진행됐다.
이 축제는 대학생들의 참여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위해‘거리공연존’을 만들어 대학생들만의 축제가 아닌 지역민과 함께하는 축제로 나아갔다. 거리공연존에서는 서대문구 관내 자치회관 주민들의 에어로빅, 웰빙댄스 등을 볼수 있었다. 이와 같이‘우리가Green신촌 場暖(장난)’과 같은 축제는 대학 축제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