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의 잊혀진 애국지사 박희광
대구·경북의 잊혀진 애국지사 박희광
  • 남상권(대구한의대학교 한국어문학부 초빙교수)
  • 승인 2011.03.0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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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의용군 제 5중대의 남만철로연선의 친왜배 토벌대에 선발대장 김광추, 박상만(본명, 희광), 김병현 삼씨는 지난 6월 1일에 무순에 출장하야 그곳 왜(친일)계 민회(친일집단) 서기로 있으면서 친왜적 행동을 하던 정갑주(27)와 그의 처자를 총살하고 그 부근 광고판에 앞의 정(갑주)을 사형한 이유와 자기네는 5중대에 출장원임을 선명하고 종적을 감추었다(‘무순, 봉천 등지에 있는 친왜배를 토벌’, 「독립신문」, 1924.7.26; 현대 표기 및 필자 주)

지난 달 22일 우리 대학교 졸업식 관련 소식 가운데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2007년에 만학도로 본교에 입학한 박정용 씨의 졸업 소식이었다. 2007년 봄 비 내리는 날 저녁 무렵 후배의 소개로 종합강의동 현관에서 그를 잠시 만난 적이 있다. 후배는 필자가 항일운동 관련 인물을 발굴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박정용 씨를 소개한 것 같다. 그날 박정용 씨는 필자에게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려고 한 듯하다. 하지만 다른 약속 시간 때문에 이 만학도 분의 말씀을 충분히 듣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야했다. 엊그제 신문사로부터 박정용 씨 부친 박희광 선생(이하 존칭 생략)에 대한 글을 요청받았을 때, 사 년 전 이 분의 얼굴에 어린 여운이 새삼 떠올랐다.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는 독립운동가 박희광(일명 박상만)의 흉상이 있다. 구미 금오산 도립공원에도 박희광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대구와 구미의 양쪽에서 향토 독립운동가로 기념되고 있음이 이채롭다.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안창호 선생, 김좌진 장군, 유관순 열사,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은 폭넓은 조명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이다. 이만도,  김흥락, 김도화, 정환직, 허위, 이상정, 김동삼, 유인식, 김창숙 같은 분은 당대에도 이름난 영남지역 선비였기 때문에 활동기록을 상당히 남기고 있어 관련 연구자에 의해 여러 방면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에 비해 박희광에 대한 기록물은 유족의 증언 외엔 동아일보에 게재된 재판관련 기사 몇뿐이다. 
열여덟 살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박희광은 임시정부의 정규독립군인 통의부 소속 특공대원이 되었다. 만주 일대의 일본 군경 및 일제의 간섭을 받는 중국 군벌과 싸웠던 전투요원으로 특수 임무를 띠고 암살 및 폭파 활동을 하였다. 1924년 그는 봉천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실패한 후 추격하는 중국 경찰과 접전 끝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넘겨졌다. 박희광은 일경으로부터 악랄한 고문을 받았고 일본 관할의 만주 관동청 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고등법원 2심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했던 중국 뤼순(旅順) 형무소에 갇혔다. 박희광은 체포로부터 재판받는 기간을 포함해 만 20년을 여순 형무소에서 보낸 뒤 1943년에야 석방되었다.
1943년은 중일전쟁으로 일본군에 밀린 중국정부를 따라 임시정부도 내륙 깊숙이 이동하였던 시기다. 박희광은 독립운동단체와 연락이 어려워지자 1944년 봄 고향인 구미로 돌아왔고 이듬해 해방을 맞이했다. 김용만은 귀국 후의 박희광의 생애를 동아일보 기사와 유족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44세의 만혼으로 문화유씨(文化柳氏)를 맞아 가정을 꾸렸으나 생활은 매우 궁핍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들이 속속 귀국하자 죽첨장(竹添莊)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더니 위로금으로 2000원을 주면서 정부 수립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1949년 김구가 암살되자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었고 너도 나도 애국자였다고 나서던 때였으나 박희광 만은 묵묵히 옥중에서 익힌 재봉 기술로 양복 수선을 생업으로 살았다. 생활고와 심신의 괴로움을 달랠 길 없어 처가가 있는 왜관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한때 천주교에 귀의하여 왜관성당에서 ‘시메온’이란 세례명으로 영세까지 받았으나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상처하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후일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 기록이 게재된 1924년 9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동아일보 부산지국에서 발견되어 박희광의 행적이 입증됨으로써 뒤늦게 훈장이 수여되어 노후에 다소 보탬이 되었으나, 1970년 l월 22일 71세를 일기로 서울 원호병원에서 타계하였다.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 1984.8.15)

망명지에서, 감옥에서 청년기를 모두 보냈던 박희광은 현 구미시 봉곡리에서 아버지 박윤하와 어머니 장희중 사이의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 마을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부윤까지 오른 박수홍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동네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한 직후 박희광의 부친 박윤하는 전 가족을 이끌고 구미에서 만주로 갔다.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박희광이 8세 때라고 한다. 박윤하가 만주로 가게 된 동기를 유족들도 잘 모른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일가의 고단했던 삶이 가족사적 진실마저 전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하였고 친인척 간에도 오랫동안 단절되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들 박희광의 독립운동 행적과 관련 지어보면 박윤하 역시 의병운동과 관련된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김동삼 역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안동지역민 다수를 이끌고 통화현 삼원보로 갔기 때문이다.
박윤하의 처가가 의병운동의 사상적 거점인 안동에 있었고, 일제가 작성한 <독립운동자금모집사건>에 대한 첩보자료에서 박윤하라는 이름이 김동삼과 함께 나타나는 점에서 신빙성은 있다. 대개 경상도 지역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은 학연과 혈연이 동원되어 있다. 구미시 임은리 출신 의병장 허위의 경우 학연과 혈연이 모두 퇴계와 연결되어 있다. 허위는 구미지역을 대표하는 선비집안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허위의 항일운동은 친가가 있는 구미권과 처가가 있는 안동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일제하에 항일운동으로 친가, 처가, 외가 등이 함께 몰락한 까닭은 학연과 혈연이 하나로 뭉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허위는 1908년 13도 창의군 1만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실패하여 순국한 인물이다. 허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민족시인 이육사의 외가쪽 할아버지뻘이 된다.
허위의 집안 형제와 후손들 역시 일제 강점기에 만주와 러시아로 뿔뿔이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독립운동사에서 거의 무명인사인 박윤하의 행적도 이와 관련지어 볼만하다. 만주의 안동, 환인, 통화 등은 이회영, 이시영 형제 일가가 망명 전에 미리 답사하고 물색했던 독립운동 근거지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망명객들이 몰려들어 무장독립운동이 전개되었고 촌락들이 만들졌다. 부친을 따라 만주로 온 후 박희광이 봉천 남성자학교에서 공부를 했다고 전한다. 남성자는 부여의 왕성이 있던 곳이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주몽의 실제 고향이다. 16살에 남성자학교를 졸업한 박희광은 18살 되던 해에 전사로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졌다. 그가 살아온 길은 지금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험난하고 보상조차 기대할 수 없는 길이었다.
박희광은 해외로 망명한 망국민으로서, 독립투사로서 일본군과 중국 군벌로부터 쫓기면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조국독립이었을 것이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외면 받고 잊혀진 삶이 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지금 우리가 뚜렷이 알고 기념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국내외로 무대를 옮겨가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인고의 날들을 보냈지만 역사적 무대에서는 대부분이 무명으로 남아 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신채호의 후손과 허위의 후손들이 최근에야 국적을 회복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간에 우리가 근대사에 대한 배움이 부족했음과 독립운동가와 그분들의 가족에 대해 지나친 무관심이 이와 같은 부끄러운 현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남상권(대구한의대학교 한국어문학부, 초빙교수)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약력(1901~1970)

본 명 : 박희광(朴喜光)  일명 : 상만(相萬)
 1901.02.15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 출생
 1916년 만주 봉천성 청원현 남성자학교 졸업 
1919년18세 때 임시정부 조선독립단통의부 특공대원활약
 1919~1924년 상해임시정부 지령에 따라 만철연선에서 수차례 걸쳐 일본군공격작전참가
 1923년 이등박문의 수양녀 매국의 요화 배정자 암살실행을 하였으나 실패
 1923.06.01무순(撫順)방면의 고등계첩자이며 조선인회서기인 민족반역자 정갑주 부자 주살
 1924.06.07 만주에서 가장악명 높은 일제앞잡이인 매국단체 일진회 및 보민단 회장 최정규의 집을 습격 족 암살 “임시정부지령에 의하여”
 동년 07.22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투척 
동년 대서관(大西關)의 일본요정 금정관에 침입 군자금 징수 일본군경과 총격전 중 피체, 증거물(권총 3자루, 탄알 160발, 폭탄 1개, (민족반역자에 대한)사형선고문 수매) 
1924년 관동청 지방법원1심 사형, 2심무기형 언도
 1924~1943년 중국 뤼순(旅順) 형무소에서 20여 년간 복역 후 출옥(1943.03.24)
 1968.03.01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 서훈
 1970.01.22. 70세에 일제고문후유증재발로 서울보훈병원에서 입원진료 중 별세(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부인문화 유씨와 합장)
 1973.03.01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愛國志士 朴喜光 先生之像” 친필휘호와 하사금 “일백만원”받아 동상(흉상)주조
 1984.12.28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동상(입상)건립제막(구미 금오산 도립공원 경내)
 1997.08.15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동상 “통일염원태극횃불조각상”건립여막(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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