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 눈을 외면하는 현수에게
오늘도 내 눈을 외면하는 현수에게
  • 김창수 교수(불어불문학과)
  • 승인 2010.12.03 1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늘어진 어깨 너머로 한 해가 가는 소리가 들린다. 현수야! 나는 오늘 인간의 의지와 숙명, 역사에 관해 너와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무엇인가에 대한 의지가 없을 때 현수와 나는 각자 일개 숙명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어떤 것에 대한 의지를 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일개 숙명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섭리(攝理)라고 부르는 저 하늘의 계획과 우리들 각자의 역사를 동일한 것으로 만들려는 하나의 자유로운 의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현수야! 만일 누군가가 도도하게 흐르는 어떤 강물의 한복판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강물은 틀림없이 그 사람에게 헤엄칠 것을 요구할 것이고, 헤엄치지 않으면 그는 틀림없이 익사할 것이기 때문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그는 반드시 헤엄쳐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현수야! 그 사람이 헤엄친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원하는 강변에 도달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물의 흐름도 항상 그것 고유의 권리와 의지와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 한복판에 있는 우리로서는 그것을 멈추게 할 수도, 그것의 방향을 바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현수야! 너와 내가 함께 빠져 있는 강물의 흐름은 우리가 원하는 강변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로서는 알 수 없을, 제가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 우리에게 헤엄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제멋대로 흐르는 듯 보이는 저 강물의 흐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모를 수 있고, 당장 내일 아침에조차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기 어려운 저 강물의 흐름, 그것이 바로 어떤 한 인간의 일생을 만들고, 어떤 한 국민과 인류의 역사를 만드는 하늘의 계획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수야!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하늘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떠밀어가면서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고, 우리를 일개 숙명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저 강물의 흐름 속에서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려는 강한 의지를 갖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지식과 판단력과 직관과 상상력을 동원해 강물이 흐르는 방향을 가늠해 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의 의지를 강물의 의지와, 우리의 숙명을 섭리라는 하늘의 계획과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 계획 안에서 우리의 역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수야! 어떤 인간이 강물의 흐름 속에서 의지를 가지고 헤엄친다는 것은 나날의 삶 속에서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한다는 의미일까? 나는 모든 것이 시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현수야!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 시간을 우리의 원수 중의 원수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수업시간에 배워서 현수도 알고 있는 19세기 프랑스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의 시 <시계>의 한 구절을 상기해 보기로 하자. 
   
“기억하라, 시간은 속임수를 쓰지 않고도 어김없이 이기는 탐욕스러운 노름꾼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법칙이다. 낮은 줄어들고, 밤은 늘어난다; 기억하라! 심연은 언제나 목말라 한다; 물시계는 비어간다.”

그런데 현수야! 시간이라는 원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보통 사람들은 두 가지 수단을 동원하는데, 그 중 하나는 우리를 육체적·정신적으로 소진시키는 쾌락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강화시키는 노동이다.

현수는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오래 전부터 마음에 새겨 두었던 말들을 현수에게 해 주고 싶다.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라! 현재의 순간을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간주하라! 회한과 죄의식, 정신적 고갈과 황폐감만을 가져오는 일시적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너의 의지가 집중된 나날의 노동을 너의 영속적 쾌락으로 만들어 마침내 실현된 계획의 쾌락을 맛보라!”

현수야! 나날의 조건으로 너와 내게 주어진 현재 위로 집중된 강렬한 의지와 분명한 목표와 지속적인 노동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을 미래를 믿고, 우리가 올바로 이용한 순간들의 거대한 힘을 믿자.
조건의 한계들 내에서 우리의 의지적 행동에 의해 실현된 조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유이고, 숙명이며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현수야! 그렇지만 어쩌면 너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의지가 완전히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고, 자신이 욕망하는 존재가 될 만한 역량이 자신에게는 결코 없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때는 현수야! 우리 함께 하느님께, 부처님께, 저 무심한 하늘에,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에, 지나가는 거지의 너덜거리는 신발짝에, 화장실의 봉걸레에, 아니 골목길 전봇대 아래 뒷다리를 들고 있는 똥개에게라도, “제발 내게 힘을 주소서”라고 하며 무릎 꿇고 손 모아 기도하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도조차 아니고, 심지어 신성 모독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수야! 우리의 꿈을 배반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의지가 한계에 부딪치고, 우리의 마음속에 비통하고 뜨거운 비가 내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행하는 개인적 의례(儀禮)가, 새벽 두 시에 땀과 눈물의 잔을 올리며 피우는 나만의 향불이 멱살을 잡아 끌어당길 수도 있을 그 어떤 신력(神力)으로라도 우리의 의지를 보강해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하늘의 도움이니, 신의 은총이니 하는 그것은 바로 의지와 목표로 충만한 어떤 인간이 매순간 필사의 노력과 진심어린 기도로 만들어 가는 그의 역사를 섭리의 계획된 역사와 일치시켜 주는 저 불가사의한 힘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느냐!

현수야! 너의 의지가 섭리이고, 너의 기도가 하늘이고, 너의 의지와 기도로 만드는 너의 역사가 너의 숙명이 아니겠느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