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천마문화상 평론부문 우수작
제41회 천마문화상 평론부문 우수작
  • 편집국
  • 승인 2010.12.0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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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사용과 변주 그리고 진화 -진은영 시집「우리는 매일매일」,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원보람(서울과학기술대·문예창작4)

 

 파란 손수건이 물에 흠뻑 젖었다. 힘껏 물을 짜내고 탁탁 털어보지만 순식간에 마르지는 않는다. 손수건이 물에 빠지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단지 보는 것만으로 파란 손수건이 젖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저 진한 파란색의 수건이려니 생각한다. 그러나 서서히 햇볕에 수건이 말라가고, 조금씩 얼룩덜룩 마르는 부분이 드러나면……, 그때 깨닫는 것이다. 아, 수건이 젖어있었구나.

사물이나 주변의 무언가가 새삼스러워지는 고유의 순간이 있다. 진은영 시인의 시는 이러한 새삼스런 발견에 대해 이야기 한다. 파란 손수건이 물에 젖었는지 눈물에 젖었는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상태를 새삼스레 알게 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을 전달하는데 이미지를 사용한다. 진은영 시인의 시에서 뼈가 되는 부분이기도 한다. 이 시집 안에서 이미지들은 한 사물을 비유할 수 있는 다른 이미지를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시작했으나 그것은 점점 변화를 거듭하고 변주하고 증폭되고 확장된다. 진은영 시집은 이미지만으로도 시 안에서 그 세계를 얼마나 풍부하게 표현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지 그 최대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느낀 바와는 달리 시인에게는 분명 지금이 최대치가 아닐 것이다. 시인의 이미지는 앞으로도 계속 변환과 탈주를 해 나갈 것이며 더욱 새롭고 견고한 세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시인의 이미지는 변화했다. 아니 진화했다. 첫 시집인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은유의 구조가 보인다. 원관념을 사유한 시인은 보조관념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면 원관념이 보조관념의 이미지로 인해 확장된 의미를 가지게 되며 이는 엄연히 시인이 제시한 보조관념을 통해 새로워지는 것이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부분

 

 

 

이 시는 명확하게 이미지 사용의 구조를 드러낸 시이다. 봄이라는 원관념을 제시하고 시인의 보조관념을 표현한다. 이러한 구조는 새롭거나 신선하고 개성적인 시각이 아니라면 감동을 줄 수 없으며 이미 사전에 이러한 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내었기에 그 기대는 더 높아진다. 시인은 여기에서 ‘봄’이나 ‘슬픔’ 등에 관한 자신의 세계를 하나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보여주었으며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단어에 대해 실질적이고 선명한 시선을 제시한다. 독자는 이러한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써 잔상이나 추상적인 파편들로 머물러 있던 원관념을 시인의 시선을 통해 선명하게 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감정이 이입되고 사고가 확장되며 보편적이고 단순했던 원관념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게 된다.

좀 더 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봄’에 대하여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는다고 하였다. 보편적으로 봄은 잠들었거나 죽은 자연이 새롭게 싹을 틔우고 태어나는, 생명에 대한 신성함과 생생함이 가득한 계절이다. 이러한 계절을 단순히 묘사나 표현으로만 생명력이 넘쳐난다고 한다면 이미 보편적으로 느끼는 바이기에 진부하고 식상해질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생명력을 직접 보여주고자 하였다. 깨어난 푸른 뱀의 머리를 맨발로 밟는 행위를 통해서 말이다. 맨발로 흙의 감촉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생한 느낌을 떠올릴 것이다. 피부로 직접 생명을 접촉하여 생생한 느낌을 전달받아서 ‘놀랍고’, 말 그대로 뱀의 머리를 밟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어서 ‘놀라운’ 감정을 말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미지로 봄을 나타내고, 그것이 앞서 말했던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느낌과 기억과 부합되어 확장될 때 독자는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받게 되며 나아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첫 시집에서 간간히 보였던 이미지의 명확한 사용 구조는 다음 시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

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

세 마리 고기떼를 따라

푸른 물살을 헤엄쳐갔다

- 「첫사랑」전문

 

 

 

첫사랑에 대한 생각은 보편적이면서도 개인마다 서로 다른 고유한 이미지가 있다. 시인은 이러한 이미지의 간극을 메워주고 첫사랑이라는 감정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소년과 소녀,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나이에 느낄 수 있는 첫사랑의 감정. 시인은 소년이 물고기를 집어넣고 그 물고기가 가슴을 헤엄치며 지나가는 듯한 두근거림과 셀레임이라고 노래한다. 개개인이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더라도 분명 그 순간 느꼈을 떨림과 첫사랑의 느낌은 이와 같지 않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첫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원관념을 새로운 시선으로 이미지를 전환시켜 그 의미와 감정을 확장시키는 시이다. 언급했듯 그야말로 은유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공식을 명료하게 보여주면서 시를 쓰고 있는데 이는 정면 돌파하는 식의 당돌함과 추진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인 이미지 전환을 불러오면서 한 편의 시를 공고하고 명료한 상징으로 이끌어 나갈 때 더 큰 감정적 파동을 일으킨다. 이렇게 진은영 시인은 단순한 대입과 전환의 틀 안에서 자신 만의 고유한 시선의 이미지를 심도 있게 그려나간다.

 

 

 

너무 삶은 시금치, 빨다 버린 막대사탕, 나는 촌충으로 둘둘 말린 집, 부러진 가위, 가짜 석유를 파는 주유소, 도마 위에 흩어진 생선 비늘, 계속 회전하는 나침반, 나는 썩은 과일 도둑, 오래도록 오지 않는 잠,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 노란 풍선 꼭지, 어느 입술이 닿던 날 너무 부풀어올랐다 찢어진

-「나는」전문

 

 

 

이 시는 두 번째 시집인 <우리는 매일매일>의 시 중 하나이다. 이 시는 앞서 말해왔던 구조를 가지고 사용되었지만 다른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살펴보면, 원관념으로써 제시된 ‘나’ 즉, 시인 자신이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대상이 아니므로 당연히 다른 면을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자신이 ‘너무 삶은 시금치’ 혹은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 등 이라고. 나열된 이미지는 시인을 둘러싼 자아들이다. 그 자아들은 개별적인 고유의 분위기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나’라는 범주 안에서 만나고 충돌하면서 또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드러낸다. 너무 삶아 맛이 다 빠져버리고 풀어진 시금치의 모습,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처럼 절망 속에 맞이하는 또 다른 시련과 슬픔의 순간. 즉, 시인 자신에 대한 자아가 원관념으로 설정되었지만 공식과는 달리 보편적인 것이 아닌 고유의 존재이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개성적 이미지를 가진 보조관념을 통해 구체화된 특성을 제시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 에서는 섬세해지고 깊어진 이미지의 변화를 보인다. 시인에게 첫 걸음은 원관념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느낌과 이미지를 더욱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부각시켜 새삼스레 원관념의 대한 생각을 떠올리고 확실한 이미지로써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나아가 보조관념을 통해 원관념의 의미를 확장시키거나 시인의 시선대로 의미를 변환시키거나 다른 의도로 변주시킨다. 이는 단지 원관념에 충실했던 이전의 방식에서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시인의 고유한 시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이를 표현함으로써 원관념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생각들을 비틀고 확장시키고 탈주시키기도 한다. 독자는 이 변주의 과정 속에 원관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되짚어 보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시인의 변주를 읽어내어 두 개의 이미지가 만나 확장되어진 새로운 의미를 포착하게 된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아름답다」의 부분

 

 

 

이는 아름다운 너에 대한 노래를 하고 있지만 그 이미지가 보편적이거나 단순하지는 않다. 오히려 낯선 이미지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시인에게는 이미 확고한 세계로부터 나온 언어일 것이다. 독자는 생각한다. 평소에 말해왔던 아름다움에 대하여. 몸매가 좋은 연예인이나 푸르른 자연이나 멋진 회화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다고. 시체에서도 얼마간은 머리가 자란다. 하지만 죽은 이에게 반짝이는 핀은 필요 없는 물건이다. 죽은 여자의 머리가 자라고 반짝이는 핀을 한다는 것은 욕망을 뜻한다.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 여자에게는 아름다움이 하나의 욕망이다. 시인은 아름답다는 광범위한 의미 중에 욕망에 대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여자의 자라나는 머리카락처럼 허무하다. 욕망으로써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반짝이는 핀처럼 빛났으나 결국 허무하고 처량한 것이다. ‘우기의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집시의 시간」을 살펴보아도 단순한 비유로써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원관념을 시인의 의도대로 이끌어나가는데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없을 땐

마시던 술병을 내리쳤지

그녀와 함께 누운 모래밭의 밤하늘

검은 미꾸라지들이 반짝이는 유리조각에 찔리며

파닥거렸다

-「집시의 시간」부분

 

 

 

동일시의 대상으로써 검은 미꾸라지들이 사용되고 그녀와 누운 모래밭에서는 미꾸라지들 처럼 파닥거린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규제로부터 벗어나고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존하려 하는 행위이다. 마시던 술병을 내리치고 반짝이는 유리조각에 찔리며 몸부림치는 것은 고민과 규제와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괴로움의 시간이고 이러한 고민과 몸부림은 어쩌면 반짝거리는 것일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모래밭의 밤하늘을 표현한 시인의 이미지이다. 이미지를 통해 원관념에서 훨씬 더 나아간 지극히 개인적이고 새로운 시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 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는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는 매일매일」전문

 

 

 

이 작품은 처음에 살펴보았던 시들과는 달리 원관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힌트라면 우리의 매일매일이 그 대상이자 힌트인 것이다. 흰 셔츠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이상이며 일상 속에서 추구하는 것의 대표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매일 출근을 하고 원하는 직장에서 돈을 벌고 번듯하게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상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마치 흰 셔츠를 입었지만 버찌를 가득 넣고 넘어지는 모습처럼 말이다. 실수하고 의도대로 되지 않고 실패를 거듭한다. 흰 셔츠에 버찌가 묻어나듯이 삶은 온통 얼룩지고 우리는 매일 넘어진다. 우리는 오후 다섯 시의 권태로운 시간처럼 한 없이 늘어지는 삶의 순간들을 보낸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열쇠도 잃어버린 채, 흑단 상자속의 어둠을 흔드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이 우리의 매일매일이다. 시인이 보여주는 ‘매일매일’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인은 말하기 위해 이미지를 가져왔고, 나아가 시인만의 언어들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붉게 익어 흘러내리는 푸른 토마토’와 ‘흰 셔츠를 입고 넘어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고,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의 세계에서 가져온 이차적 이미지를 통해 일차적인 원관념을 전달한다. 원관념은 확장되고 선명해진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멜랑콜리아」전문

 

 

 

이 시는 조금은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 ‘1+1=2’ 가 아닌 ‘1+1=3’을 만드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의미의 확장이나 변화를 통해서 일상적인 결과만을 만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말해왔던 것이다. 이 시는 시인만의 세계와 이미지를 던져놓고 하나의 상황으로써 그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처음에 던져진 하나의 이야기가 ‘1’이라면 이어 긴밀하게 연결되는 다른 이야기가 또 하나의 ‘1’이라 하겠다. 두 개의 이야기가 만나면서 시인의 시선에 바탕이 되고 견고한 연결고리가 된다. 이어 마지막 연에서 반전적인 이야기로 앞서 풀어놓았던 바탕의 이야기를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처럼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흘러가던 이미지들이 합쳐지고 새로운 의미와 의도를 포함하게 된다.

시의 의미에 다가가 설명해 보자면, 그는 달콤하게 나를 그려놓았다고 하였다. 그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달콤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보는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나를 바라보고 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이다. 아이스크림 자체는 달콤하지만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며 무기력하게 본연의 모습을 잃고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구의 혀끝에도 닿지 못한다. 그조차도 말이다. 그가 그려놓은 나의 모습으로는 어느 누구와도 소통되지 못할 관계를 암시한다. 이러한 우울 속에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멜랑콜리아가 있다. 다음 연을 보면, 그는 슬퍼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처음 연과 다른 모습이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물고기임을 깨닫는다. 1연보다도 이해는 더 단절되었다. 물고기를 사막에 그려놓다니. 그리고 그는 이제 슬퍼한다. 그리고 나를 지워준다. 시인은 여기까지 두 개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 넣고 그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그 미묘한 차이와 상실감, 그리고 그 전반에 떠도는 우울함, 멜랑콜리아까지. 전달하고자 하는 어느 것 하나도 놓치는 것이 없으며 세밀하게 빠짐없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말한다. 그가 나를 지우고 나서 물고기인 ‘나’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고. 그는 낙관주의자라고. 시인이 그려온 이야기를 따라오던 독자들은 진정 멜랑콜리아 해지는 기분을 맛본다. 작은 이미지들이 그려온 우울의 방향을 한껏 뒤틀면서 진정 멜랑콜리아의 상황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순하고 몽상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듯 한 기분으로 읽어왔을지 모를 그들에게 가슴이 먹먹해 지는 기분을 안겨주려 했는지 모를 일이다. 여기까지 오면 진은영 시인의 이미지가 단지 원관념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이 시에서 보았듯 원관념자체가 점점 시인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혹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명확한 그림이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원관념 자체가 보조관념보다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어쩌면 보조관념을 위해 원관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죽은 식물과 동물의 냄새가

내 얼굴에 배어 있다

조금만 햇빛을 쬐어도

슬픔이 녹색 플랑크톤처럼

나를 덮는다

-「인공호수」전문

 

 

 

여기서 인공호수는 원관념이기는 하나 인공호수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시는 아니다. 오히려 ‘원관념이 시인의 시선에서 비롯된 이미지가 않을까’ 하고 헷갈릴 만큼 그 위치가 뒤바뀌어 있다. 여기서 인공호수는 시인의 이야기를 위한 전제로써의 소재나 바탕으로 작용하여 보조관념의 의미를 심화시키고 그 토대를 만들 뿐, 다른 고유의 의미를 함축하거나 심화 시키지 않는다.

시를 살펴보면, 죽은 식물과 동물의 냄새가 내 얼굴에 배어있다는 것은 이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죽음과 가까운 우울함과 심연의 슬픔들이 배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만 빛을 쬐어도 푸르른 플랑크톤처럼 드러나 나를 덮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미묘한 감정 상태와 움직임은 우리의 경험으로만 비롯되며, 뚜렷한 언어나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여기서 시인은 인공호수라는 매개에서 이러한 미묘한 감정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이를 극대화 시키고 일체화시켜 뚜렷하고 선명한 이미지로써 보조관념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설명되지 못한 감정들이 햇빛에 푸른 플랑크톤이 생기는 인공호수의 모습에서 이미지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오히려 보조관념으로 말할 수 있는 감정들과 추상적인 사고의 과정이 인공호수라는 원관념을 통해서 구체적인 관념으로 정의되고 뚜렷한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에, 역설적으로 보조관념에서 원관념으로 가는 방식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흔히 우리가 배워왔던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은유를 보면, 추상적인 대상이기는 하지만 ‘내 마음’이라는 대상을 ‘호수’라는 구체적인 매개체로 투영시켜 시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언어로 정의조차 되어있지 않는 관념적인 생각들을 인공호수의 성질과의 유사성에 대입하여, 또 다른 인공호수의 모습으로 정의 되어 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의 전환이 아니다. 변화이며 변주이고 시인은 능숙하고도 치밀하게 이를 해내고 있다.

 

 

 

이미지 사용을 중심으로 진은영 시인의 시를 보며, 설명하려드는 시보다 견고하고 선명한 이미지 하나가 더 확실한 소통수단이 된다는 것을 느낀다. 시인의 소통 방법으로 하나의 그림을 그렸을 때,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나는 이것을 탈주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본래 가진 고유의 의미가 한껏 뒤틀어지고 우울한 현실로 탈주해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사전적이고 일상적인 관념과 생각들은 시인의 이미지 속에서 철저하게 부셔져 버린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파편에 놓인 독자들은 유리조각에 찔려 몸부림치면서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진은영 시인에게 있어 이미지는 진화를 거듭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주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의 탈주, 이 미묘하고 치밀한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억압하고 눌러왔던 부분들을 자극하고, 시인이 그려놓은 세계로 질주하고 만다.

 

 

 

다리 부러진 피아노처럼

세계가 기울어진다

 

 

 

어둠

유리창 불빛이 레몬처럼 흔들린다

 

 

 

나는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

-「소멸」부분

 

 

 

누가 여름 마당 빈 양철통을 두드리는가

누가 짧은 소매 아래로 뻗어나온 눈부시게 하얀 팔꿈치를 가졌는가

누가 저 뚜꺼운 벽 뒤에서 나야, 나야 소리 질렀나

네가 가버린 날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놓았다

-「그날」부분

 

 

 

다리 부러진 피아노처럼 기울어진 세계는 소멸을 시작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지나온 익숙한 세계가 눈 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시인은 새로운 세계로의 문을 열어준다. 어느새 우리는 그 세계에 이끌려가 미묘하고 멜랑콜리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소멸의 순간,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던 나에게 그것이 흰 공책 가득 씌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우리는 흠뻑 젖었던 파란 손수건이 얼룩지며 말라가고, 그것이 온통 젖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는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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