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박예희 준기자
  • 승인 2010.11.1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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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 13일이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 일을 마치고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났고,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렸다. 그런 후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중 좌천동 앞길에서 한 시내버스에 치였고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절명했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게 된 그의 삶을 되돌아 보자.

청마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교 시절에 더욱 심해졌다. 그는 1922년 일본의 도요야마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이듬해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그 때 그는 일본인들에 의해 아무 죄도 없는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의 작품을 보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시 <수(首)>의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라는 구절에서 강한 항일 운동의 모습을 보여주어 그가 아나키스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31년 24세 때 ‘문예월간’ 2호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이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의 통영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는데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해 거처를 평양으로 옮겼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시를 짓는 데에만 전념했다.

1937년 30세 되던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는 것을 계기로 교육계에 종사하게 됐다. 39세 때는 제1회 시인상을 받았으며 41세 때인 1948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회장직을 맡아 반공 민족 문학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그의 시 <바위>에는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혼돈의 시대에 노래하지 않고,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기를 기도한 그의 절절한 침묵이 바닷바람에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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