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내면(內面)이란 무엇인가/테리 이글턴
문학의 내면(內面)이란 무엇인가/테리 이글턴
  • 박주현 취재부장
  • 승인 2010.09.1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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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성의 다섯 가지 요소는 허구성, 도덕적 통찰, 독특한 언어 사용, 비실용적, 가치성이다.
“문학의 내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뿐 답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달리 나는 이 문제에 답을 할 작정이고 그 대답은 무척 독창적일 것이다. 더군다나 만약 나의 대답이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소박하나마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10일, 우리 대학교를 방문한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인문학적 성찰에 대해 말을 시작했다. 다음은 그의 강연 초록을 요약한 글이다.
 
서구 중세시대에 실재론(實在論)과 유명론(唯名論)이라는 두 철학 학파 간에 맹렬한 대립이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포함하는 실재론자들은 버섯이 버섯일 수 있는 조건이 어떤 의미에서는 실재한다고 믿었다.

한 개체로서의 버섯이 버섯일 수 있는 것은 그 개체가 버섯의 보편적인 본질이나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버섯이 실재하는 방식과 똑같지 않을지는 몰라도 다른 식으로 어쨌든 실재한다(고 사실주의자들은 믿었다).

이와 반대로 유명론자들은 이 같은 해석을 전면적으로 거부했다. 이 철학사조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들은 일반적 속성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 일반적 속성이란 세상의 질서를 이루는 당연한 방식이 아니라, 세상을 여러 가지 등급, 종, 범주들로 나누는 방식일 뿐이다. 그런 모든 등급과 범주들은 어느 정도 작위적 성격, 자의성을 지닌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나름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사물을 분류하기 마련이며, 이는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소 신비적인 이런 논의가 갖는 중요한 측면 중 하나가 독특한, 개별적인 것들의 위상인데, 이는 문학 유형론의 전통적인 관심이었다. 문학 유형론은 최소한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대체로 실재론적이기보다는 유명론적인 경향을 띤다.

문학 유형론은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그것이 가지는 감각적인 개별성으로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 유형론은 또한 문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고자 하는데 이런 주장은 사실 실재론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된다.

◆개체 간에 공유하는 특질이 있어야 같은 부류로 인정돼=실재론자와 유명론자가 무덤 속으로 사라진 지 몇 세기가 흐른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이런 종류의 논쟁으로 옥신각신하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가 똑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사물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물들이 같은 부류에 속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그 부류에 속하도록 해주는 필요충분조건인 속성, 혹은 일단의 속성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본질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물질에 대한 이런 본질주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최소한 하나의 속성, 다시 말해,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특성이 없다면 이들 중 어떤 것도 게임이라 할 수 없으며, 다른 특성들이 어떠하든 간에 이 속성의 존재가 그 자체로서 게임을 게임이라 할 수 있도록 하는 충분조건이 되는, 바로 그런 특성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철학적 탐구』 초반부에서, 이 가설에서 오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에 어떤 공통된 점이 있음을 당연시하기보다는 그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그의 대답은 모든 게임에 다 해당하는 공통점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게임이 다 경쟁적이지는 않으며, 또 모든 게임들이 다 승패의 결과를 수반하지도 않고, 모든 게임들이 ‘월드컵이 보여주듯’ 다 재미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게임’이라는 말은 순전히 자의적인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엄격한 본질주의와 그 어떤 것도 용인될 수 있다는 입장, 이 양 극단 사이에는 다른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사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이 양 극단 사이에 위치한다. 엄격한 규칙과 정의가 없다면 엄청난 혼란 속에 빠져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우익 신경증 환자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게임이라 부르는 일련의 것들을 살펴보고 얼마나 이것들이 한 가족에 속한 사람들의 사진들과 비슷한지를 주목하라고 말한다. 같은 가족 구성원의 얼굴은 서로 어떤 유사성을 보이는데, 반드시 가족 구성원 모두가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색을 하고 있어서 혹은 영국에서 찰스 왕세자의 귀(Prince Charles ears)라고 알려진 귀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발견하게 되는 것은 특성들의 매우 복잡한 교차와 중복인데, 가령 그 가족의 어떤 사람에게 그 가족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입, 눈썹, 턱이 있다면 또 어떤 사람은 단지 턱과 눈썹이 그러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입과 턱은 그렇지만 눈썹과 다른 부분은 다른 가족구성원과 전혀 달리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유사성의 계열 안에 서로 전혀 닮지 않은 구성원들이 있게 되는데, 그럼에도 이 구성원들은 그 가족에 속해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매개를 통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여러 형태의 글쓰기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해=앞의 모델이 문학의 이해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여러 형태의 글쓰기 사이에는 여러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은 게임이나 꽃 혹은 엔진들이 그런 것처럼 문학 작품들 모두가 단 하나의 특성이나 일련의 특성들을 반드시 공유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어떤 강렬한, 수사적이며, 아주 함축적인 언어의 사용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락원』(ParadiseLost)은 그렇지만 어니스트 헤밍웨이(Earnest Hemingway)의 작품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모든 작품이 허구(fiction)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농담, 꿈, 광고, 이스라엘 국방성 대변인의 진술같이 허구의 범주에는 들지만 문학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들이 많으며 게다가 문학의 범주에 우리가 포함시킨 것들 가운데 허구적이지 않은 것들도 많다. 지금 픽션이라는 주제가 제기된 김에 말하자면, 픽션은 문학 이론에 있어 철학적으로 가장 복잡한 개념들 가운데 하나로,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실로 엄청나게 어렵다.

예를 들어, 픽션은 ‘사실이 아닌 것’(untruth)과 동일하지 않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지만 픽션이 아닌 것들이 무수히 많고, 사실에 근거한 명제로만 이루어진 글쓰기도 여전히 픽션이라고 불릴 수 있다. 왜냐하면 픽션은 언어의 인식론적인 위상보다는 독자가 그 언어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와 더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픽션은 근본적으로 ‘믿어주기’(make-believe)의 문제이며, 우리는 동화 이야기를 ‘믿어주기’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믿어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구적인 텍스트를 사실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에 근거한 텍스트를 허구적인 목적에 사용할 수도 있다.

픽션을 쓰는 작가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행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짓말이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행위로 정의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되면 아이러니와 기타 많은 것들이 제외되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란 속이고자 하는 의도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것을 가리킨다. 픽션을 쓰는 작가들에게는 거짓말의 이 중요한 마지막 조건[속이고자 하는 의도]이 결여되어 있다. 픽션을 쓰는 작가들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확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주장, 진술을 실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단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 ‘유사성’ 모형에 있어 문제점은 비교 대상이 되는 두 개의 어떤 개체 사이에서도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내가 지금 이 순간 그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낼 수 없다 하더라도 오각형과 나의 왼발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이 질문에 한 우스개 같은 대답은 둘 다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학의 경우에 이야기가 될 만한 가족 유사성들이란 상당히 실질적인 것들이어야 한다. 그런 실질적인 유사성으로 나는 다섯 개의 특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문학성의 다섯가지 구성적 요소=그렇다면 문학성의 다섯 가지 구성적 요소는 무엇인가? 첫째, 허구성이다. 둘째, 인간 경험에 대한 중대한 도덕적 통찰을 제공한다. 셋째, 독특하게 창의적인 혹은 자의식적인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넷째, 교통 표지판이나 쇼핑리스트가 실용적이라는 의미처럼 실용적이지는 않다. 다섯째, 일반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특징들을 허구성, 도덕성, 언어성, 비실용성, 그리고 규범성이라고 할 수 있다.(중략)

그렇다면 우리가 문학적 글쓰기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특성들 가운데서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다양한 조합을 보여준다. 『오셀로』(Othello)나 『황폐한 집』(Bleak House)과 같은 모범적 문학작품의 경우는 앞에서 말한 요소들을 모두 보여주지만, 어떤 작품의 경우는 허구적이지는 않아도 도덕적 통찰과 뛰어난 문체 때문에 문학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런 예로 우리는 뉴먼 추기경(Cardinal Newman)의 에세이나 톨스토이(Tolstoy), 에머슨(Emerson), 혹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작품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 가령 악령을 쫓는 주문 혹은 역사적, 과학적 연구서도 그것의 언어가 풍요롭다면 그 때문에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나치통치의 생존자들이 쓴 일기도, 실용적이고-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쓰여졌다-비허구적이며 끔찍하게 썼어도 그 도덕적 통찰 때문에 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기술적인 범주=또한 나는 문학을 특히 가치있는 글이라고 보는 문제에 대해 나의 생각을 덧붙이고자 한다.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우리가 공항에서 종종 구입하는 종류의 글들은 문학 작품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럴 경우 모든 문학은 곧 좋은 문학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보잘것없는 문학작품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문학을 연구하는 다수의 철학자에게 이것은 모순어법 혹은 용어의 모순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문학의 나쁜 예들에 대해서 논하면서도 그것들이 저급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문학이 아니라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형편없는 소시지를 가지고 이게 정말 소시지인지 아닌지 진심으로 의문을 품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질문을 소설에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보잘것없는 문학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관습적으로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장르, 가령 비극, 목가 등에 속한 글이지만 유난히 좋지 않은 예라고 할 만한 텍스트를 가리킨다. 또는 문학이라는 지위에 이르고자 하는 야심은 있었으되 그것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 작품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나의 생각은, 문학에 대해 전제된 이런 특성은 문제를 풀기보다는 문제를 더 야기하며 따라서 이것에 대한 논의는 중단해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기술적인 범주이지 규범적인 범주가 아니다. 물론 비평가들은 가치판단을 할 수밖에 없지만 나는 비평가들이 문학을 정의하는 과제에까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문학에서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상과학소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문학 정전에 포함된 많은 것들이 그 정전의 기준에 맞추어보아도 열등하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껏 여러분들에게 문학의 정의에 대한 나의 이론을 피력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편으로는 지나친 본질주의, 즉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똑같은 특성들을, 혹은 똑같은 본질적인 특성을 하나라도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과, 다른 한편으로는 유명론의 한 유형, 어떤 글들을 동일한 범주에 넣을 수 있게 하는 연관성들이란 진정한 것도 아니고 세계 속에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구성한 것이라는 생각, 이 양 극단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울타리에 걸쳐 앉아 양다리를 걸치면 가장 빨리 총에 맞고 떨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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