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연구원에게 듣는 중국이야기
이승우 연구원에게 듣는 중국이야기
  • 염수진 기자
  • 승인 2010.04.08 15: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왕이 행차할 때 잠시 쉬어가던 자금성의 태화전
▲ 우리대학 중국연구센터 연구원 이승우<약력>1989년 영남대학교 사학과 입학1993년 영남대학교 사학과 졸업1994~2002년 중국 남계대학 박사과정 졸업2003년~ 중국연구센터 연구원
중국 언어 문화학부 이승우 연구원을 만난 곳은 중앙도서관 16층 중국언어연구소에서 였다. 연구원은 푸른 치파오(중국 전통의상)를 맵시 있게 차려입고 기자를 맞이했다. 중국의 명차로 알려진 보이차를 마시며 연구원과 대화를 나눴다.
이 연구원은 04년 첫 회를 시작으로 지난 겨울방학까지 총 11회에 걸쳐 중국문화기행(문화기행)을 진행하면서 우리대학 학우들을 대륙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는 학생들의 눈을 높여줄 수 있는 기행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라고 한다.

중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중국과 관련된 책이 유행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에드가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중국 공산당에 관심을 가졌고 이후 중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역사 가운데 가장 쓰라린 기억이 바로 일제 강점기에요. 중국 역시 아편전쟁을 비롯해 주변 열강이 대거 침탈하는 처지에 놓였는데도 결국 국민들은 스스로 일어섰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죠.” 

어떻게 해서 문화기행을 시작하게 됐습니까.
“중국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중국과 제가 본 그곳의 모습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죠. 그래서 저는 한국으로 들어온 이듬해인 04년에 문화기행을 시작해 74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베이징과 톈진에 갔습니다.”
문화기행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1회 문화기행 때였어요. 그때는 배를 타고 갔는데 12월 31일에 출발해서 새해를 선상에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계획보다 조금 늦게 만리장성에 도착했더니 밤이더라고요. 그 덕에 세계에서 10위 안에 드는 만리장성의 야경을 봤어요.”
“그리고 2회 당시 몇 개의 조가 상하이에서 중국의 지하철이 어떤지 경험하기위해 용감히 지하철역으로 향했어요. 그들이 지하철 승강장에 들어선 순간, 자신들은 중국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조원들은 살기 위해 서로 손을 맞잡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정말 한 번 헤어지면 못 만날 정도였습니다. 이들의 우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끈끈해 졌습니다.
멀리서 지하철이 오는 것을 느낀 이들은 맞잡은 두 손을 움켜쥐고는 열차 안으로 뛰어들 것을 다짐했어요. 마침내 지하철 문이 열리고 수많은 인파들이 지하철의 좁은 문을 향해 몰려들었습니다. 조원들은 손을 맞잡은 채 한 명, 두 명 지하철로 오르기 시작했죠. 일촉즉발의 순간에도 책임성 강한 조장과 몇몇 남자 학우들은 조원들을 지하철로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덜컹’하는 짧은 기계음과 함께 문이 닫혔어요. 한 명은 지하철 안에서 다른 한 명은 밖에서 두 손을 움켜 쥔 채로 지하철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럴 때 문이 다시 열리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장은 맞잡은 두 손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고 당황한 채로 유리문을 통해 “도착지에서 만나요”하고 외쳤죠. 지하철에 탄 친구들은 두고 온 조장과 조원들이 걱정됐다고 합니다. ‘에이, 세 코스인데...’하며 안도하고 있는데 두 코스를 지나서 환승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됐어요. 지하철을 탄 친구들은 조장과 조원들 걱정에 지하철을 놓친 친구들은 ‘어떻게 찾지?’하는 막막한 생각뿐이었어요.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오지 않았죠. 잃어버린 친구들 걱정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호텔의 명함을 택시 기사에게 건네 호텔로 돌아왔어요. 돌아온 조원들은 다른 조장들과 조원들에게 연락을 했고 기다리던 조원들도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나서야 비로소 안심했습니다. 호텔에 도착한 조장과 조원들은 마침내 상봉하게 됐고 그들은 더욱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 눈 내린 만리장성
우리나라와는 다른 중국만의 독특한 상거래 문화가 있습니까.
“몇 학생이 짝퉁 명품을 파는 ‘수수가 시장’에 가방을 사러 갔어요. 가방을 파는 주인들이 외국인인 것을 알고 살갑게 잡아요. 그래서 한 곳을 들어가 마음에 드는 가방을 고른 후 흥정을 시작했죠. 가격 흥정을 하면서 ‘너는 어디서 왔니?’라고 물으며 사소한 이야기도 하죠.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2시간 반이나 지난 후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사고 나왔었죠.
우리나라는 물건을 살 때 덤을 주지만 중국은 흥정을 해요. 각각의 물건에는 임자가 있다고 생각해 주인을 찾아주기 위한 것이죠. 물건이 임자를 만나면 좋은 값을 받고 못 만나면 헐값에 판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처음에 물건 값을 비싸게 부릅니다. 이 과정에서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것을 배제할 순 없죠. 친구가 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물건을 살 때 처음부터 값을 깎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으면 안 됩니다. 쫓겨날 수도 있으니까요.”

연구원이 본 중국은 어떤 나라였습니까.
“제가 처음 중국에 간 것이 1996년 1월이었는데 당시에도 중국은 적국이라 국가정보원에서 교육을 받고 갔어요.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죠. 그 이유는 이중 전통이여서 사람을 보면 속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파악이 쉽지 않았지요. 중국에는 이중 전통이라고 해서 한자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이른바 ‘동아시아 문화권’ 국가로서의 전통과 현대 사회주의 국가적 전통이 어우러져 있어요. 서로 모순되는 전통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간’이 넓어 보였어요.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우리나라에 비해 중국은 평지가 아주 드넓게 펼쳐져 있어요. 그러다보니 건물 사이의 간격 또한 넓어 보였죠. 현지인들의 마음씨 또한 느긋해서 중국이 넓은 곳이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제가 공부할 때의 중국과 오늘날 문화기행 차 들른 중국은 정말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가장 큰 변화는 건물과 거리가 많이 달라진 것입니다. 08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오래된 내성을 철거하고 주상 복합 주택을 지었어요. 중심가에 들어선 호텔과 백화점 등의 새 건물들 또한 매우 깨끗하고 좋았어요.”

중국인들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까.
“실용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입니다. 소련이 먼저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했는데 경제 개혁과 동시에 정치 개혁을 진행했어요. 정치도 같이 하니깐 사회가 더 통제가 안 되서 혼란스러웠죠. 이를 본 중국인들은 정치도 함께 개방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국은 단순히 인구만 많은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 많은 소수민족들이 분포해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앙정부가 혼란에 빠지면 분열이 되기 쉽지요. 그래서 다른 나라를 지켜본 다음 자신들에게 맞는 방법을 강구한 것입니다.”

연구원에게 중국이란 어떤 나라입니까.
“저의 머릿속에는 중국에 대한 생각이 상대적으로 많이 차지하고 있어 다른 부분은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향후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우리나라는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한 국가만 맹목적으로 중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이 중요하죠. 양국이 서로 견제하고 있을 때 트집잡힐 빌미를 주면 안 됩니다. 이들 국가와의 사전 조율 등을 통해 충돌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이 연구원에게 중국은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다. 그의 말 한 마디에서 중국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이 묻어나왔다.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한 안중근 의사처럼 ‘하루라도 중국을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에 가시가 돋는 사람’으로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은 그였다.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동반자’처럼 가까운 사이가 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