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와 자기기만
자유의지와 자기기만
  • 편집국
  • 승인 2010.03.1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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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했다. 다른 사물들은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 사물이 존재하기 전에 사물의 목적이 미리 결정돼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칼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물건을 자르기 위해 칼을 만든다. 칼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칼이 존재해야 할 이유와 목적이 결정돼 있는 것이다. 칼의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인간의 경우는 어떠한가? 인간은 그저 태어날 뿐이다. 글자 그대로 아무 이유나 목적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혀 없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를 모른다. 게다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태어난 이유는 모르는데 죽음은 이미 결정돼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극단적 허무감이 발생한다. 사르트르는 이 극단적 허무의 상태를 가장 긍정적인 삶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다. 우리가 아무런 존재 이유도 갖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책임질 수 있는 본질적 자유를 얻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것도 처음부터 결정돼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삶을 창조해 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된다.


매순간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천하는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자 동시에 재앙이다. 항상 맑고 투명한 의식 속에서 선택하고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창조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그런 자유의지의 행사는 죽음조차도 명증하게 바라보도록 요구하지 않는가?


존재 자체가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택하는 것이 바로 자기기만(mauvaise foi)이다. 자기기만이란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회피하면서 꾸며진 상황 속에 자신을 밀어 넣으며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일상적 역할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거나 종교가 제시하는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은 대표적인 자기기만의 행위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조차도 죽음을 내 자신의 문제가 아닌 세상 사람들의 문제로 일반화시키면 쉽게 망각할 수 있다.


버거와 같은 사회학자들은 이런 자기기만의 행위가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화된 타자(generalized other)들을 통한 역할 동일시로 사람들이 사회에서 맡은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할 때 비로소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의 생활 드라마가 온전히 진행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경찰, 교사, 청소부, 상인, 정치인, 학생, 의사, 주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세상이란 것을 자연스럽고 안전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종의 방벽 기능을 한다.


세상이 사실은 아주 불안정한 인공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자기기만을 통해 현실을 회피하려 하지만 근원적인 불안감을 피할 수는 없다. 자기기만이란 자기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을 깨닫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역할의 수행에 매달린다. 역할에 대한, 상황에 대한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하며 기계처럼 움직이려 한다. 생존하기 위한 기계가 돼 버리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하고 실천하고 책임지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 성찰을 통해 가능하다. 나의 사회적 조건을 정확히 인식해야만 내가 하는 선택과 결정이 사회적 역할에서 비롯된 것인지, 내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남이 인정한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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