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피해자이길 강요하나
왜 피해자이길 강요하나
  • 박주현 취재부장
  • 승인 2010.03.1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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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50호에 실린 브루노의 ‘한국적응기’는 정말 따뜻했다. 까만 얼굴과 하얀 이가 매력적인 그는 어디서나 친절한 한국사람들 덕분에 한국에 적응하기 쉬웠고 하얀 눈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이다. 외국유학생을 차별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적나라한 글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우리나라는 그래도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며 뿌듯해 했었다.
성소수자 정당인인 최현숙 씨는 블로그의 글을 통해 이러한 안일함의 허점을 찔렀다. 언론에서 성소수자 피해 사례를 요구하지만 난감하다고 말했다. ‘성소수자라서 차별 당하고 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내가 성소수자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무도 말할 수 없어 결론은 항상 그들에게 아무런 차별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반의 기준으로 봤을 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차별의 논리가 합당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약자임을 말하는 상황이 또 하나의 차별이자 아픔이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고3때였다. 어릴 때부터 아토피가 있어서 여름이면 짧은 티가 입기 싫었다. 친한 친구가 ‘피부괴물아’라고 장난삼아 놀리는 데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내가 그 친구에게 그 말이 내게 큰 상처가 됐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고 ‘참지, 뭐.’라며 대수롭게 넘어가고 싶었다.
우리는 약자를 대할 때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차별받고 있다’는 ‘피해를 당했다’를 의미할 때가 많고 언론에 나타난 약자의 모습 또한 우리의 기준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직업, 배우자 등 최소의 기득권을 잃었을 경우에  가장 공감을 얻고 비로소 ‘불쌍한 존재’로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다다.
기자로 일을 하다 보면 강자와 약자의 구도에 익숙해진다. 약자의 말에 귀기울여야지, 강자는 약자에게 베풀어야지, 어쩌면 이런 생각이 약자에게 피해자임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일반인의 기준으로 그들에게 당신은 피해 입고 있다고 각인시키는가. 우리의 말 한 마디, 시선이 가장 큰 차별이 될 수 있다.
본지에 게재되는 브루노 씨, 최현숙 씨, 하재철 씨, 윤웅렬 씨의 칼럼이 소수자, 약자의 칼럼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더 나아가 내게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칼럼으로 받아 들여졌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나와 같은 사람만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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