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기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기
  • 임기덕 부장, 염수진 기자
  • 승인 2010.03.18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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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도마 안중근’

▲ 일러스트 : 조장은(시각디자인2)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 승강장. 한 노인이 객실에서 내려 러시아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있을 즈음 몇 발의 총성이 역 구내에 울려 퍼졌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세 발의 총탄을 맞았고 곧바로 수행원들에 의해 객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과다 출혈로 인해 생존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노인을 저격한 한인 청년은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3회 외치고는 곧바로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됐다.
앞서 언급한 ‘한인 청년’과 저격당한 ‘노인’이 어떤 인물을 의미하는지는 삼척동자도 알아맞힐 수 있을 것이다. 한인 청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하얼빈 의거)을 나타낸 것이다. 안 의사는 1909년 2월 14일 일본인 사법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이번 1551호에서는 26일 안중근 의사의 서거 1백 주기를 맞아 그의 일대기 가운데 학우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와 가족, 종교, 글씨 등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을 되짚어보고 다함께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고자 한다.
▲ 면회 온 빌렘신부와 두 아우(정근·공근)에게 유언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

▲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록한 그림

▲ 부인 김아려 여사와 두 아들 준생·분도(오른쪽)

◇응칠과 중근=태어난 아기의 가슴과 배에 총 7개의 점이 있었다. 조부 안인수는 이를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응칠(應七)’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부친 안태훈은 응칠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행동을 신중히 하라는 뜻에서 이름을 ‘중근(重根)’으로 고쳤다. 이후 응칠은 자(字)로 사용됐다.

◇집안 내력과 어린 시절=안중근 의사의 조부는 진해현감을 지낸 안인수였다. 미곡상을 운영하던 안인수는 황해도의 손꼽히는 자산가로 4백가마의 쌀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와 청어 2백만~6백만 마리를 생산할 수 있는 어장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너그럽고 후덕했다. 그의 자녀는 6남 3녀이고 그 중 셋째 아들 태훈이 안중근 의사의 부친이다. 6형제 모두 문체가 뛰어났지만 특히 태훈은 개화파 박영효 등의 주도로 일본에 파견하려 했던 70여명에 선발될 정도로 재주와 학문이 뛰어났다. 하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위기가 닥치자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밑의 청계동으로 옮겨와 은거했다.
안중근 의사는 조부의 사랑을 각별히 받으며 성장했다. 집안 서당에 초빙된 스승으로부터 사서삼경의 유교경전과 ‘통감’등을 익혔다. 또한 학문 외에도 활쏘기와 승마를 즐겨 숙부와 포수를 따라 산을 타며 단총으로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가 됐다. 뒷날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한 것도 어릴 때부터 갈고 닦은 사격 솜씨가 밑바탕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교적 가치관과 민족적 의식의 갈등=그의 집안 전체가 황해도 일대의 동학 농민의 난을 진압하러 가게 되는데 전리품으로 받은 군량미가 문제가 되어 부친이 도피 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가톨릭교도가 되는데 그 영향으로 안중근도 가톨릭에 입교해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이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어 포교활동도 하고 프랑스어도 배웠다.
안중근 의사는 해주, 웅진 등지를 순회하며 전교 활동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일반 대중의 교육 수준이 저급함을 알게 됐다. 이들을 깨우치기 위한 문명 개화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천주교 신앙과 문명의 개화를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조선인들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데 소홀해진다”며 외국인 신부들이 거부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보고 “천주교의 교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 신부들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며 교육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수개월 동안 배우던 프랑스말도 중단하고 민족적인 천주교 전교활동에 나섰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해 교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파면을 당했다. 하지만 84년이 지난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이 안 의사의 파면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 함으로써 그의 지위는 복권됐다.

◇놀라운 어머니=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이 모친 조 마리아 여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뤼순 감옥에 면회를 신청했다. 그의 모친은 두 아들의 입을 빌려 안중근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분함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되고 만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은즉 죽는 것이 영광이나, 모자가 이 세상에서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은 어떻다 말 할 수 있으리,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또한 조 마리아 여사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는다면 깨끗이 죽어서 명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빨리 천국의 하느님 곁으로 가도록 하라”고 덧붙여 말했다.
일본이 그를 살려주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그에게 항소하지 말고 민족을 위해 죽음을 택할 것을 단호히 말한 것이다. 위대한 아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안중근 의사의 글씨=안중근 의사가 남긴 글씨(유묵)는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은 1910년 2월 14일부터 사형이 집행된 3월 26일 이전에 집중적으로 작성됐다. 안 의사의 유묵은 전체 5백 점 정도가 되는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50여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유묵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대체로 나라에 대한 충성, 현실 고발과 일본에 대한 경고, 동양평화, 자기수양, 종교관 등이다.
받는 사람들이 모두 일본인 판사, 검사, 변호사, 서기, 교도소장, 교도관 등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자국의 지도자를 저격한 인물임에도 안 의사의 기백에 감동해 마지막까지 종이와 비단을 넣어 글씨를 써줄 것을 청했다고 한다. 그의 담당 교도관이었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안 의사가 서거한 후 고향인 미야기 현으로 돌아가 글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동양평화론’을 통해 본 ‘경세가’ 안중근=“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변함없는 분명한 이치이다.”
안중근 의사의 저작인 동양평화론(평화론)은 위와 같이 시작되고 있다. 평화론은 안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1910년 2월 14일부터 사형 집행 전까지 옥중에서 쓴 것으로 알려진다. 글의 도입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평화론의 핵심 정신은 한·중·일 3국의 공동 번영을 바탕으로 역사 발전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군사적으로는 뤼순을 중국(청나라)에 반환하여 중립지대로 설정하고 평화를 위한 공동 회의기구를 설치해 각종 현안을 논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현안이란 한 국가에 대한 침략 지배가 아닌 3개국이 조화롭게 잘 살 수 있는 안을 뜻한다.
당시 뤼순은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곳이었다. 부동항을 갖기 위해 남하한 러시아와 뤼순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던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 갈등까지 더해 훗날 러·일전쟁으로 불리는 일련의 전투를 치르게 됐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이 과정에서 양국이 서로 많은 피를 흘린 곳이 바로 뤼순이었다. 뤼순은 ‘대립’과 ‘갈등’, ‘전쟁’의 이미지가 어울리는 공간이었고 그만큼 평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기도 했다.
또한 3개국 청년들로 구성된 공동 군단을 양성하고 이들에게 2개 국어 이상을 교육해 서로 ‘형제 나라’의 관념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 경제적으로는 단일 화폐의 사용과 공동 은행의 설립을 제안했다. 3국이 경제적으로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중 양국의 균형 발전을 위한 일본의 역할도 언급돼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공동 평화 회의기구 설치와 단일 화폐, 다국적 군단 등의 구상은 오늘날 EU의 창설, 유로화 사용을 통한 유럽 경제의 통합, UN 평화유지군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 먼 미래를 앞서 내다본 안 의사의 안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호일 안중근의사기념관장(중앙대 명예교수)은 “장군, 의사, 선생, 영웅 등 그에게 붙일 수 있는 칭호는 많지만 먼 앞날을 미리 보고 경영했다는 점에서 ‘경세가’라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덧붙여 김 관장은 “동양평화론으로 이름 지어졌지만 여기서 말하는 동양의 평화는 곧 세계 인류 전체의 평화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오늘날 그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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