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더 나은 미래를 요구할 수 없다”/권상구
“과거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더 나은 미래를 요구할 수 없다”/권상구
  • 임기덕 기자
  • 승인 2010.03.02 2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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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연구소 권상구 연구실장

'대구신택리지'의 산파역 인문사회연구소 권상구 연구실장  / 김용배 기자

동아리 활동을 통해 시민운동에 뛰어들다=기자가 만난 인문사회연구소 권상구 연구실장은 학내 동아리 활동을 계기로 시민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그가 몸담았던 동아리인 ‘가장자리’는 사회 주변부의 소외받는 곳을 연구해보자는 취지 아래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들은 제3세계 국가에 한국이 산업화 과정에서 겪었던 문제들에 대한 지혜를 전수하고 현지의 지역사회 공동체를 개발하는 활동을 했다.

◇=기자가 만난 인문사회연구소 권상구 연구실장은 학내 동아리 활동을 계기로 시민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그가 몸담았던 동아리인 ‘가장자리’는 사회 주변부의 소외받는 곳을 연구해보자는 취지 아래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들은 제3세계 국가에 한국이 산업화 과정에서 겪었던 문제들에 대한 지혜를 전수하고 현지의 지역사회 공동체를 개발하는 활동을 했다.

 

“하지만 매번 제3세계 국가에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던 중 대구도 주변부, 소외된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문화영역에서 시민운동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죠.”

권 실장은 이후 대구YMCA에 들어가 대학생활과 대학YMCA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동아리 후배들과 한 학기 사업으로 대구문화지도(문화지도)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문화운동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당시 ‘가장자리’ 활동을 함께 하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 ‘대구는 매우 척박한 도시다’는 것이었죠. 대구의 각종 여건이 좋지 못하다보니 저를 제외한 친구, 선·후배 모두 다 수도권으로 ‘진출’하더군요. 그것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부에서 소외되고 있는 대상에 대해 함께 관심을 갖자고 해놓고 왜 떠나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남는다면 지역 사람으로 살아가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문화지도를 만들게 됐습니다.”

문화지도의 성공과 거리문화시민연대=우리지역에는 21세기의 새로운 문화적 감성을 제공해 줄 공간이 정말 없는가?”

권 실장은 서울의 홍대 앞이나 대학로처럼 대구에도 매력적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스스로 물었다. 하지만 사실상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문화지도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었다.

대학YMCA 회원들이 대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문화적 감성’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공간들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이들의 한 학기 과제이자 첫 작품인 문화지도가 빛을 보게 됐다. 문화지도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여기저기서 문의전화가 쇄도했고 초판 2백 부가 금세 동이 나 재판을 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

“문화지도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여기에 조금 더 집중하면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2백60만에 가까운 인구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요. 우리 지역사회의 문화적 기반을 지속적으로 관찰함과 동시에 거리축제를 비롯한 각종 문화행사에 대해 주도적으로 기획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권 실장은 03년 대학 때 친구들과 거리문화시민연대를 설립하고 ‘이야기가 있는 대구 도심’을 만들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대구신택리지(新택리지)를 편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때부터 대구 지역의 공간 변화와 근대 생활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물론 이번에도 그가 이용한 방법은 ‘발품’이었다.

간첩으로 오인 받은 ‘골목대장’=문화지도를 제작할 때부터 시내의 좁은 골목 곳곳을 누비고 다녔죠. 그런 모습을 본 동네 주민들은 하나같이 ‘학생 뭐하노?’하시면서 제가 하는 일을 굉장히 궁금해 하셨어요. 일반적으로 길거리에서 익숙하게 보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죠. 젊은 친구들이 지도를 들고 다니면서 주민들에게 동네의 역사를 물어보기도 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으면 무작정 건물로 달려가 건물의 내력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했죠. 중구의 경우 샅샅이 다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보니 ‘간첩’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죠.”

하지만 권 실장과 친구들이 지속적으로 찾아가 동네 주민들과 서로 대화를 나누고 얼굴을 알게 되면서 간첩으로 오해를 받은 것도 곧 풀렸다. 나중에는 ‘골목대장’, ‘골목 다니는 아이들’, ‘골목박사’ 등의 별명을 얻게 됐다. 일종의 ‘라포(rapport, 서로 간에 형성되는 신뢰나 친밀감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셈이다.

염매시장 성송자 할머니가 준 가르침=대구라는 지역의 공간 변천사를 말해주는 건축물들은 대부분 헐리고 관련 기록물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권 실장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시민들의 기억 한가운데에서 대구의 옛 모습을 뽑아낼 수밖에 없었다. 동네 토박이나 한 곳에서 오래 장사한 상인들은 이들의 좋은 ‘취재원’이었다. 대구의 옛 모습을 듣기 위해 틈틈이 오랜 기간 동안 계속 이들을 찾아뵈었다.

/ 김용배 기자
그중에서도 염매시장의 성송자 할머니는 권 실장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은 취재원이었다. “긴 시간 동안 조금씩 할머니의 일생과 염매시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머니께서 마음을 여시고 점차 본인의 삶을 긍정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 개인의 삶을 긍정해주고 이를 들어줌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어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또한 권 실장은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바로 과거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중에서도 염매시장의 성송자 할머니는 권 실장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은 취재원이었다. 또한 권 실장은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바로 과거에 대한 인정이었다.

 

“젊은이로서 대구의 과거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부정한다면 원하는 미래의 모습을 어른들에게 결코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택리지는 대구의 과거를 정리한 것이지만 미래의 교과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택리지 편찬의 어려움=하지만 편찬 작업을 하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초연구의 부족과 재정 문제는 신택리지 편찬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편찬에 착수할 즈음이었던 03년경 신택리지 편찬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지만 여기에 도움이 될 만한 기록을 남긴 지역의 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지역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관련된 기록을 미리 남겨놓고 이를 시민사회 운동가가 활용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 저희가 기본적인 컨텐츠까지 생산해야 했습니다. 몇 명 안 되는 인원으로 컨텐츠의 생산과 활용을 다 하려다보니 힘이 부쳤죠. 재정 문제도 발목을 잡곤 했습니다.”

그가 바라본 대학 문화의 상업화=지역의 문화운동가인 그에게 한 가지 생뚱맞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대학 문화의 상업화’에 대한 의견이었다. 시민사회에 있는 분들의 관점에서 으레 답을 예상했지만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대학 문화의 상업화에 대해 무조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거적 발상인 듯합니다. 철학이 일상생활 속에 존재하듯 대학도 일상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대학은 사회의 다른 부문과 어색하게 결합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 대학이 주도권을 가지고 아카데미 모델과 비즈니스 모델을 잘 결합해 대학이 바로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권 팀장은 “앞으로도 대구 도심의 변천을 지속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현재의 대구신택리지를 수정, 보완해 새로운 모습의 개정판을 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 공간 변화의 제대로 된 문법을 알려주는 것에 주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시민들이 문화적으로 한 단계 성숙하고 대구가 문화적 기반이 윤택한 도시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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