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봄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 최재목 교수(철학과)
  • 승인 2010.03.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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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길을 굽어보는 흔들리는 저 나무의 눈빛. 예사롭지 않다. 그만 뚝뚝 눈물을 떨군다. 저 위에서만 있으니 저 아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바뀌는 길의 풍경을 통해서 나무는 그 마음을 듣고 만진다. 그냥 침묵만으로 펼쳐지는 길의 말들. 한 번도 쓰여진 적 없는 길의 진실. 나무는 잘 안다. 나무는 길이 되고픈 거다. 그런데 길은 너무 많이 갈라져서, 나무의 이파리, 뿌리로는 다 디뎌볼 수가 없다. 차라리 자신을 부숴 흙이 되어 길이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모든 흘러 내려오며 갈라진[由來] 모습, 거슬러 올라서 처음 시작된[起源] 모습이 함께 만난다. 
사람들 발에 채이는 돌들, 찬바람 속에서 조금씩 헛기침을 하며, 자꾸 딴소리를 한다. ‘나는 돌이 아니라 신(神)’이라고. 그러다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눈을 찡그려 하늘을 쳐다본다. 별이 되고픈 거다. 그런데 저 별은 너무 멀다. 돌은 그곳에 살아서 닿을 수 없음을 안다. 찌그러진 쇠바퀴를 덜컹대며, 도넛 같은 둥그스럼한 연기를 길게 하늘에 걸며 달리는 기차를 타고서도. 10년이 걸려, 100년, 1,000년이 걸려도. 차라리 자신의 몸을 갈아 없애고 마음으로 별이 되는 게 빠를 거라 믿는다.
살아있는 것들은 살기를 멈추지 않는다. 각자의 방식으로 떠들어대고 퍼득댄다. 가슴에 품은 의미를 끝내 드러내 보여준다.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도 어느 선 안에서만 가능하다. 선을 넘어선 영역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공기 속에는 바위만한, 털이 보송보송 난 먼지가 날아다니고, 피부에 붙은 다이아몬드 같은 때엔 기와집 크기의 등불을 단 새들이 지저귀며 산다.
입에서 튕겨 나온 말(言語)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길을 만든다. 작은 개울을 넓히고, 쥐구멍만한 틈새를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반질반질 잘 닦아 놓는다. 꽃의 열매 속으로도 들어가 앉고, 산의 개울물에도 떠다니다 가끔 겨울잠에 들기도 한다. 너무 곤히 잠들다 화석이 된 것들도 있다. 가끔은 용암 속에 묻혀 다니다 수증기로 증발하거나, 화산도 된다. 도시 상공의 고층빌딩 피뢰침 속으로도, 휴대폰의 전파 속으로도 숨어 다닐 수 있다. 투명한 몸으로 영겁의 세월을 넘나들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다.
바람은 무시로 생멸하며, 우주의 저쪽에서 이쪽까지 불어 왔다 갔다 한다. 몸속, 뼛속에 들기도, 마을과 나라에 오래 머물기도 한다. 노래, 음식, 사랑, 정치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다가 그쳤다가 한다. 허공에서도, 수중에서도, 암석 속, 강철 속에서도 바람은 살아있다. 불멸한다. 사람들은 죽어서 바람으로 간다. 바람은 모든 것들을 자기 등에 태워 이동시켜준다. 유럽의 이름 없는 풀들을 우리나라 뒷산에 데려와 살게 하기도, 우리나라 벌레들을 저 지구 건너편에 가서 살도록 하기도 한다. 신라시대엔 배를 서역으로 밀어 아랍 지역까지 사람들을 데려가 살도록 했다.
새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세상을 공부한다. 그들이 듣는 강의는 날개를 퍼득이는 일, 소리를 듣는 일, 바람의 방향을 파악하는 일, 비가 내리고 꽃이 피는 곳을 아는 일, 벌레가 많은 곳을 찾는 일. 하늘의 일들을 땅에 전하고, 땅에 일어난 일들을 하늘에 전하는 새는, 하늘과 땅의 중간에서 살며 향기만 맡고 노래만하는 건달(건달바)과도 친하다. 그들은 예전부터 우주인들과 자주 만난다. 새는 푸른 하늘에서만 살지 않는다.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도 나래를 편다.
말의 길(言路)이 열리면, 귀가 뚫린다. 귀는 폼으로 달린 게 아니다. 우주의 약속이다. 그렇게 있는 것을 그렇게 들으라고. 자기 말만 듣거나 자기 말도 듣지 못하는 사람. 남의 말만 듣거나 남의 말도 듣지 못하는 사람 등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 봄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이 없다면 봄은 새롭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행성만한 먼지가 굴러다녀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무량(無量)한 마음이라야 언 땅에 파묻힌 형형색색의 꽃들이 보일 거다. 상상할 수 없다면, 말 귀가 없다면, 다 그만이다. 우리 대학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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