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 ‘꿀벅지’ 고삐 풀린 언론들 어디까지 가나?
‘루저’, ‘꿀벅지’ 고삐 풀린 언론들 어디까지 가나?
  • 이광우 준기자
  • 승인 2009.12.01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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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남자들은 루저(Loser), 남자 키가 1백80cm는 돼야 한다" 지난 9일 KBS의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된 H대 재학생 이 모씨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방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청자 게시판에는 항의성 글이 올라오고, 그녀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이 모씨는 방송 직후인 다음날 오전 1시 자신의 미니홈피에 해명하는 글을 올렸지만, 수많은 ‘루저’들의 화를 풀게 하지는 못했다. 며칠 후, 그녀는 자신의 대학교 홈페이지 커뮤니티에 “본의가 아니었다”며 “‘루저’라는 단어는 제작진이 알려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프로그램 제작진들 또한 반박글을 개재하며 책임공방에 열을 올렸다. 네티즌들은 ‘루저의 난’ 또는 ‘서해교전이 일어난 이유’등의 패러디물을 만들어 내고 이 모씨의 신상정보를 파헤치는 등 그녀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루저의 난’, 원인은 언론 매체의 왜곡된 의식구조

하지만 그녀를 향한 원색적인 공격은 며칠 지나지 않아 점차 사그러들고 프로그램 제작진에게 화살이 돌아가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지난 13일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성신여대 손석희 교수(문화정보학부)는 “나 역시 루저”라고 말했다. 그는 “사전에 편집을 했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제작진에게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같은 날 국회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가인권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김재윤 의원(제주 서귀포)이 "이런 식이면 이명박 대통령이나 김형오 의장, 여기 있는 모든 의원들이 다 루저"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인권위가 방송국을 대상으로 한 인권 교육에 나서야 한다”며 “방송 프로그램의 모니터링도 고려해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발언을 그대로 내보낸 방송사 제작진의 의식구조에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표현으로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킨 KBS 2TV의 예능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의 인터넷 홈페이지 캡쳐 사진

 

‘루저’들, KBS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루저’발언 논란이 뜨거웠던 지난 12일, 키 1백62㎝인 30세의 한 남성이 해당 프로그램으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KBS를 상대로 1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조정 신청을 냈다. 이 사실이 기사화 되어 알려지자 23일까지 언론중재위원회에 KBS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신청은 2백46건에 달했다. 이런 소송사태에 대해 정민수 씨(경제금융2)는 “‘루저’들의 소송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방송사에 의해 일어난 인권침해적 사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최저 10만원에서 최고 38억2천만원에 이르는 배상소송의 승소가능성은 매우 낮다.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2조 15항에 따르면 이번 루저 발언은 언론보도가 아닌 의견표명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피해구제의 판단 대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로 언론중재위 제1중재부는 지난 20일 2백46건 중 26건의 조정신청을 기각했다. 법조계에서는 민사소송을 청구하더라도 이 발언이 특정인을 지칭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승소할 확률이 희박한 것으로 보고있다.

 

또 다른 신조어 ‘꿀벅지’

‘루저’와 더불어 최근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꿀벅지’라는 신조어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꿀벅지’란 ‘꿀을 발라놓은 듯한 허벅지’등 여러 가지 선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 7월 21일, 인터넷 유명 커뮤니티인 DC 인사이드에서 네티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는 “가장 매력적인 허벅지의 여자연예인은?”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으며 1주일간 1만1천6백57명이 응답했다. 이 조사에서 소녀시대 티파니가 4천7백55명(40.8%), 애프터스쿨의 유이가 2천4백55명(21.1%)의 표를 얻어 1,2위를 차지했다. 그 후 두 연예인은 공공연하게 ‘꿀벅지 연예인’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8월 말부터 인터넷 기사와 지상파 방송에서 ‘꿀벅지’라는 단어가 일반화 됐다. 이 신조어는 약 한 달이 지난 9월 20일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한 여고생이 “성희롱적인 단어”라며 언론이 ‘꿀벅지’사용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을 여성부 홈페이지에 올린 것이다. 다음날 다음(Daum) 아고라에 같은 주제의 청원이 올라왔고, 약 4천명이 서명했다. 하지만 여성부는 “불특정 다수에 노출되는 언론의 표현은 여성부가 규제할 수 없다”고 회시했다. 글을 올렸던 여고생은 “아쉽지만 많은 사람들이 ‘꿀벅지’가 인권침해적인 신조어라는 인식을 깨우치게 돼 만족한다”고 밝혔다. 이 신조어는 여전히 몇몇 프로그램과 신문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루저’와 ‘꿀벅지’, 명백한 심의규정 위반

인터넷 쇼핑몰 검색창에 ‘루저’를 검색한 결과 3천17개의 상품이 나왔고, ‘꿀벅지’를 검색한 결과에서는 50개가 나왔다. 그리고 두 신조어가 언론에 처음 사용된 날(이달 9일과 지난 8월 20일)부터 이달 26일까지의 신문기사 중 연예․가십성 기사를 조사한 결과 각각 약 5백건과 약 2백50건을 기록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언론매체에서 아무런 제재없이 사용되고 있지만 두 신조어는 엄연히 심의규정 위반이다.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 제8조(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 위반 등)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1조(인권침해의 제한), 제29조(사회통합) 그리고 제30조(양성평등)에 저촉된다. 심의규정에 따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연예·오락방송특별위원회는 ‘루저’발언이 나온 프로그램의 제작진에게 중징계에 해당하는 ‘시청자 사과’를 권고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 권고에 그쳐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다. “심의규정이 존재하는데도 무책임하게 방송을 하고, 인터넷에서 버젓이 사용된다는 것이 어이가 없다. 단순한 건의나 권고보다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언론을 통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인권침해적 신조어들-인터넷 기사 캡쳐

 

우리대학 학우 65%, 방송사에 책임 있어 “윤리의식 필요”

 

우리대학 학우는 ‘루저’와 ‘꿀벅지’와 같은 인권 침해적 신조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 26일 학우 1백9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신조어들을 처음 접하게 된 경로에 대해 39%(75명)의 학우가 인터넷 커뮤니티(DC인사이드나 우리대학 자유게시판 등)를 통해 알게 됐다고 답했다. 뒤를 이어 신문․잡지가 29%(56명), TV나 영화가 23%(44명)를 차지했다. 이들 신조어들을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느냐는 질문에는 30%(58명)의 학우만이 ‘괜찮다’ 또는 ‘기발하다’고 답한 반면 70%(1백37명)의 학우들은 ‘기분 나쁘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논란이 된 ‘루저’발언에 대해서는 73%(1백42명)의 학우가 ‘문제있다’고 답했고, 그 중 66%(95명)의 학생이 윤리의식 없이 방영한 방송사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대학 주형일 교수(언론정보학과)는 “외모지상주의적 신조어의 양산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주 교수는 “신조어의 확대 재생산에는 언론 매체의 영향이 매우 크다”며 “전체 언론의 제작관념이나 윤리의식의 개선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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