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논단]별일 없이 산다
[천마논단]별일 없이 산다
  • 정지창 교수
  • 승인 2009.11.03 2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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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가장 불행하고 재수없는 세대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삭막하고 암담한 시대에 태어나 가도가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막 같은 세상을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가.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나도 우리 전 세대의 어른들 못지않게 아등바등 노력은 하지만, 도대체 손에 잡히는 확실한 성과는 없어. 그저 막연한 불안감과 습관에 등을 떠밀려 손발을 놀려보지만 구원의 손길은 오지 않고 기약 없는 기다림만 있을 뿐이야. 그렇다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답답하고, 화가 나고, 미칠 지경이야.

 이런 자의식을 안고 절망과 분노와 좌절감으로 얼룩진 청년들의 반항은 어느 특정한 시대의 일회적 현상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의 청년들은 19세기적인 모든 가치와 제도, 관행은 타파해야 할 낡은 유물이라고 선언하고, 기독교적 신앙과 부르주아적 문화에 가차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내세를 팔아 순진한 시민들을 현혹하는 사기’에 불과했고, 고상하고 세련된 부르주아적 문화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왜곡과 도피였다. 이들의 이러한 반항과 자의식은 1920년대에 이른바 독일표현주의라는 특이한 문예사조를 낳았고, 그 여파는 영화와 미술, 문학 등 여러 장르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런 현상은 승전국인 미국의 청년들에게도 나타났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도스 파소스 등 청년작가들은 고국을 떠나 파리 등지를 유랑하면서 자신들을 ‘잃어버린 세대’(로스트 제너레이션)라고 불렀다. 이들의 문학적 경향과 이후의 행로는 제각각이었지만, 기존의 이념과 가치, 제도에 모두 회의를 품고 반항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독일 표현주의자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였다.

 이런 청년들의 반항은 2차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에도 반복되었는데, 영국에서는 이른바 ‘성난 젊은이들’(앵그리 영 맨)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났고, 미국에서는 ‘비트 제너레이션’이라 불리는 한 무리의 작가들이 등장하였다. 이어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히피문화’라는 독특한 문화현상이 전세계로 파급되었다. 통기타와 청바지, 비틀즈, 여권신장 등은 모두 히피문화의 유산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러한 청년들의 저항문화는 1960년대의 통기타 음악과 탈춤/마당극운동 이후 연면하게 그 맥을 이어왔다. 대표적인 청년문화는 1970-80년대의 이른바 민중문화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대학가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아리’나 ‘해오름식’, ‘새내기' 같은 용어가 바로 민중문화운동의 산물이다. 저항문화는 어느새 주류문화로 편입되고 제도화된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쓰다보면 어느새 친숙해지는 것은 청바지뿐이 아니다.

 요즘 ‘장기하와 얼굴들’이 뜨고 있다. 그들의 노래를 들어보니 바탕에 깔린 주제는 ‘풍요로운 시대의 가난한 청년들’이다.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분노와 반항과 우수와 체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나 같은 구세대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청년시절에는 그런 느낌을 가졌었으니까.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견디며 표현의 자유에 목말라했지만, 요즘 청년들은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요 속에서 안정된 일자리와 지속가능한 가치를 찾아 헤맨다. 그래도 예전의 청년들은 무언가를 바꿔야겠다는 열정과 희망이 있었지만, 요즘의 청년들은 그런 열정과 희망도 ‘싸구려 커피’처럼 쉽게 구할 수 없다. 그러니 그저 ‘별일 없이 산다.’

 그렇다고 요즘 청년들을 야단치거나 동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게으르고, 버릇없고, 의지박약한 젊은 것들’이라는 말은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구세대가 청년들에게 사용했던 상투어고, 나도 젊었을 때 그런 소리를 신물이 나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제대말년에 머리 좀 길렀더니, 선임 장교가 ‘너희들은 우리 군의 암적인 존재들이야’ 하고 호통을 치던 것이 생각난다. 결국 청년들은 그들 나름대로 반항하고 고민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역사는 어차피 그런 청년들이 써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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