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사용법
기억 사용법
  • 영대신문 편집국
  • 승인 2009.09.21 21: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일의 문예학자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을 ‘저장기억’과 ‘회상기억’으로 구분한다. ‘저장기억’은 기술의 차원에서 정보의 저장과 인출의 동일성을 목표로 하는 기억을 말하며, ‘회상기억’은 불러오는 과정 속에서 기억 주체의 상상력과 정서가 가미되면서 때로는 풍요로워지고 때로는 빈곤해 질 수도 있는 탄력적인 기억을 뜻한다. 한마디로 ‘저장기억’이 흔히 말하는 지식 내지는 암기술이라면, ‘회상기억’은 사적이고 개별적인 체험이다. 따라서 저장기억은 삶을 편리하게 해주고, 회상기억은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인간은 저장기억과 회상기억을 적절히 효율적으로 구사할 때 조화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으며, 사회 또한 저장기억과 회상기억에 대한 가치부여가 균형있게 이루어졌을 때 건강하고 안정적인 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기억에 대한 가치부여는 매우 편향적인 것처럼 보인다. 회상기억의 가치는 외면한 채, 저장기억에 과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저장기억의 기술과 역량을 키우는 데만 온 시간과 열정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에게 9단도 모자라서 20단까지 외우게 시키는가하면, 입학, 취업 등 인생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들은 죄다 저장기억의 수치적 결과물들 일색이다(수능점수, 학점, 토익점수, 한자능력시험점수 등).

다소 단선적인 비교의 예이기는 하지만 영화 <마더>와 <포레스트 검프>는 저장기억과 회상기억의 대비적 작동결과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두 영화의 남자 주인공, 도준과 포레스트는 모두 지능이 모자라 친구들과 주변인들로부터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이다. 남다른 모정으로 무장한 주인공의 어머니들은 부족한 자식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아들의 뇌리 속에 인생의 ‘좌우명’을 한가지씩 각인시킨다. 도준의 어머니가 도준에게 늘상 일러주는 말은 ‘누구든 바보라고 놀리면 가만있지 말라’는 것이고, 포레스트의 어머니가 포레스트에게 일러준 말은 ‘넌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 좌우명들은 주인공들의 뇌리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동된다. 도준의 좌우명은 그의 머리 속에 저장기억으로 새겨져 필요할 때마다 무조건 반사처럼 작동한다. 도준은 ‘바보’라는 단어만 들으면 곧바로 공격적으로 돌변하여 상대가 누가됐든 폭행하려든다. 반면 포레스트의 좌우명은 주인공의 내면에서 회상기억으로 기능하면서 어디서건 주눅들지 않는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승화되고, 이것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게 한다. 각기 다른 기억 작용을 작동시킨 도준과 포레스트의 인생 행보는 판이하게 다르게 진행된다. 도준은 뒤쫓아 가던 소녀가 자신에게 바보새끼라고 소리치자, 그녀를 향해 커다란 돌덩어리를 집어 던져 그녀를 죽게 만들고, 급기야 그의 살인을 영원히 은폐시키려는 어머니까지 자신과 똑같은 살인범으로 만들어 버린다. 한편 포레스트의 좌우명은 척추장애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포레스트를 미식축구 선수로, 군인으로, 탁구선수로, 사업가로, 종교적 지도자로까지 거듭나게 하며, 심지어는 역사적 사건들의 현장의 중요한 목격자가 되게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이처럼 생명력을 지닌 기억, 회상기억을 작동시키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다. 우리가 그토록 축척하고자 하는 저장기억들도 회상기억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면 단선적이고 생산성없는 내용물에 머무르고 만다. 축적된 지식과 체험에 개인의 창조적 사유와 주체적인 열정이 덧입혀졌을 때 그것은 인생의 길잡이가 되고, 새로운 도전의 동력이 되고,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지혜가 되고, 지리멸렬한 일상을 다채롭게 꾸밀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단조롭고 표피적인 삶을 살 것이냐, 밀도 있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 것이냐는 기억을 어떻게 구사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