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제의 역사를 돌아보다
대동제의 역사를 돌아보다
  • 조규정 기자
  • 승인 2009.06.04 17: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년 대동제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학생들의 저조한 참여율, 주막촌 일색의 행사, 초청가수 위주의 공연 등 끊이지 않는 악순환이 올해도 계속됐다. 이에 영대신문 축쇄본을 통해 과거 우리대학의 축제 모습을 살펴보고 현재의 대동제와 비교해봤다.

80년대 : 천마축전에서 대동제로

80년대는 '천마축전'이라는 대동제의 전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80년대 초에는 축전과 함께 '천마종합체육대회'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개교기념일 행사까지 겹쳐서 대대적인 행사가 치러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당시에는 동아리를 '써클'이라고 불렀는데, 축전 때마다 '써클'별로 다양한 전시회 및 행사가 많았다. 또한 각 단대별로 특색을 살린 장기자랑이나 무용대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단대와 '써클'의 참여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산줄다리기'와 같은 전통민속놀이 행사가 꾸준히 행해지고 있었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초청인사로 기성연예인을 부르기도 하여 논란이 된 적도 있다. 80년대 후반에 가서는 '주막촌'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는데 심지어는 '주막촌' 수를 제한했는데도 불법영업을 하는 주막이 나타날 정도였다. '주막촌' 수가 40여개에 달했다고 하니 주막문제는 비단 현재 대동제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90년대 : '반미', '통일', '평화' 구호만 무성

'반미', '통일', '평화'. 이 세 단어는 90년대 들어서 대동제의 주제로 자주 등장했다. 이처럼 90년대에는 매년 대동제의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행사를 진행했다. '환경대동제', '갑오농민전쟁 100주년 기념 대동제'가 신선해 보였다. 이때부터 자주 언급되는 것이 '주막촌'의 상업성이나 획일화, 참여율 부족으로 인한 행사의 지연․취소이다. 90년대 후반에는 총학생회가 학생들에게 대동제 주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심어주지 못하며 '반미', '통일', '평화'의 구호는 낡은 것이 되었다. 90년대는 '주막촌'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며, 주제에 맞는 다양한 행사가 마련되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활발한 참여가 부족해 엇박자를 이룬다.

2000년대 : 대동제는 주(酒)동제?

이 시기의 기사를 보면 '주(酒)동제'라는 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막촌'의 확대로 '대동제'는 술만 마시는 축제라는 인식이 강하게 퍼지면서 생겨났다. 술로 인해 각종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한 학생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대동제 기간 동안 사행성 놀이가 성행하기도 하고, 학생들의 참여 부족 문제가 심각하여 행사가 취소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03년도에는 'WTO기획강연회'와 비정규직을 다룬 마당극과 같은 그 당시의 사회 사안을 대동제에 끌어들이고 '중앙동아리의 문화공연', 애견퍼레이드, 깐느 광고 영화제 수상작 시사회와 같은 다채로운 행사들을 실시하여 교․직원과 학생, 지역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자리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시도에만 그쳤다. 최근 들어 주막촌의 일색의 행사는 더욱 거세지고, 학생들의 참여율이 높은 초청가수 중심의 공연은 늘어나고 있다. 기획강연회나 동아리의 전시회 및 행사는 갈수록 줄어들어 대조를 이룬다.

대동제가 가지는 문제점은 특정년도나 시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누적되고 고질적으로 변해갔다. 대학축제만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경향으로 흘러오게 됐다. 대동제가 아닌 '주동제'가 되고 마는 현실과 학생들의 참여가 부족해서 많은 행사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 해마다 대동제를 '초청가수가 누구냐'에 따라 평가하는 풍토 속에서 대학생을 위한 대동제는 존재하는 것일까?

조규정 기자
wooya44@ynu.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