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으로 느끼는 우리 정서와 우리 국토
두 권의 책으로 느끼는 우리 정서와 우리 국토
  • 이연지 기자
  • 승인 2009.03.12 1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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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실에서 만난 정지창 교수(독어독문)는 문서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테이블 위에 있는 다기(茶器)들이 눈에 띄었고, 서랍을 가득 채운 책들은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학기 초라 아직 정신이 없다는 정 교수였지만, 오랜만에 여유를 가지고 기자와 함께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Ⅰ.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 동․서양 문학의 완전한 조화를 엿보다

 요즘 우리는 '신문학사(新文學史) 100년'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전통적인 우리 문학․예술과 서양식 문학․예술이 교차하는 시점인 1900년대 초 개화기에서 100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1920년대 집필된 「임꺽정」은 한국적인 기존의 문학형태와 심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서양적인 문학 형식이 적절하게 조화하여 절정을 이룬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광수와 같은 개화기의 다른 작가들도 수준 높은 문학작품을 썼지만, 우리의 정서를 살리는 데는 미흡했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임꺽정」은 한국인이 가진 독특한 정서를 서양의 형식을 빌려 잘 소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신문학 100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이 작품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 우리의 위대한 유산 「임꺽정」

 요즘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면 너무 세계문학적인 보편성에만 치우쳐 있다. 문학에서도 우리의 것을 살릴 필요가 있다. 「임꺽정」은 세계문학적인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한국인의 정서와 심성을 잘 녹여낸 작품인데, 이 책에 쓰인 언어도 우리말의 결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반면 요즘 나온 책들은 번역 투 문장들이 난무한다. 서양식 문장에 물들어 있어서 한국적인 체취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임꺽정」을 번역해 외국에 소개하고 싶지만, 한국적인 정서가 많이 담긴 순 우리말 표현이 많아서 완벽하게 어감을 살려 번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번역하더라도 본래 「임꺽정」에서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사라지게 돼 책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이런 좋은 책을 학생들이 많이 읽고 우리말의 감칠맛을 몸소 느꼈으면 한다.

 그러나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어휘들이 많아 정작 읽어도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말을 하는데, 본문 내용 중 어려운 순 우리말들은 뒤쪽에 따로 풀이가 첨부되어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잘 안 읽히겠지만 반복해서 읽으면, 작품의 참 맛을 알게 될 테니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임꺽정」은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한 우리말을 되찾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할 책이다.

▷ 조선시대, '페미니즘(feminism)'을 논하다

 이 책은 개화기 때 쓰인 책이지만 내용이 굉장히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면이 있다. 조선시대는 유교사상이 지배적인 부계사회였기 때문에 아버지 성만을 따라왔다. 하지만 근래 페미니즘, 남녀동권주의에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姓)에 어머니의 성씨를 같이 기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또 작년부터 시행된 '가족관계등록법'에서는 어머니의 성을 쓸 수 있게 개정했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임꺽정」에 나와 있다.

 총 10권 중 4권 '의형제 편 1'에는 '박유복이'와 '곽오주'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농민의 유복자로 태어나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청석골에 들어와 도둑이 된 '박유복이'와 빈농 출신의 머슴인 '곽오주'는 청석골에서 탑고개를 지나다 힘을 겨루고 의형제를 맺는다.

 이 과정에서 '곽오주'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기왕 형제가 되었으니, 성을 하나로 하자"고. 머슴 출신으로 배운 것 없는 그에 비해 유교적인 인식을 가진 '박유복이'는 아버지의 혈통을 따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단호히 제안을 거부하지만, '곽오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를 다 받았는데 왜 아버지 성만 써야 하나"며 뼈있는 물음을 던진다.

 지나가는 내용 중에 한 구절이지만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유교의식이 아직 팽배하던 개화기에 이런 진보적인 사상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이렇듯 읽을수록 질리지 않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이 「임꺽정」이다.

▷ 이데올로기는 접고 책을 펼치자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 선생은 충북 괴산출신으로 3.1운동에도 앞장선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한 이후 북에 잔류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내각(수상 김일성)에서 부수상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월북 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이를 이유로 「임꺽정」은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었고, 1985년 출간된 1판은 당시 문화공보부로부터 판매금지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임꺽정」은 작품 자체로서의 재미보다는 '금서목록 1호'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평가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무거운 겉옷은 벗겨 내고, 작품 자체의 고유한 맛을 음미했으면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내가 좋아하는 독일 작가 중 한 명이다.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있을 때 동독에서 활동한 작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브레히트󰡑를 독일 작가라고 생각하지 동독 출신 작가로 보지 않는다. 우리도 더 이상 좁은 이념의 잣대로 작가의 소속에 따라 문학을 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Ⅱ. 「제주 걷기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최근에는 서명숙의 「제주 걷기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을 재미있게 읽었다. 제주도를 자동차가 아니라 골목을 따라 도보로 여행하는 11개의 '제주 올레'에 관한 내용이다. 올레는 제주도 방언으로 '거리길에서 대문까지의,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을 말한다.



 도보여행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귀찮겠지만 진짜 여행은 두 발로 걸으며 여행지를 몸소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겨울 방학 때 꼭 한번 제주도보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못했다. 언론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친 '제주에 길을 만드는 여자 서명숙'의 꿈과 열정이 함께 담긴 책이니 특히 여학생들이 역할 모델로 삼고 읽어 볼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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