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의도 가는 길
1월 15일 새벽 2시에 약속 장소에 모여 태안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피곤함에 눈을 감으니 엊그제 TV에서 보았던 태안의 검은 바다와 흰 방제복을 입고 땀을 흘리며 묵묵히 돌을 닦는 자원봉사자들이 떠오른다.
시원하게 잘 뚫린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4시간쯤 달려 태안에 도착하니 6시 30분이다. 밖은 아직도 어두컴컴하고 조용하다. 기름유출로 시끌벅적 한 게 언제였냐는 듯 태안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곳곳에 플랜카드가 걸려 있다. ‘사람 죽인 삼성그룹 참회하라 ! 배상하라 !’, ‘자원봉사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가의도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인 안흥항에 도착하니 어느덧 떠오른 태양이 바다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차를 세우고 보니 방제복을 입은 채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주민이 보인다. 얼른 다가가 물었다. “가의도로 가려면 어떻게 갑니까?” “가의도? 얼른 따라와요.” 허겁지겁 짐을 챙겨 쫓아갔지만 작은 배는 벌써 출항하고 난 뒤였다. 주위에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또 다른 주민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한 번 얼른 다가가 가의도 가는 법을 묻는다. “봉사활동 하러 오셨소? 따라 오소.” 그래서 도착한 어느 작은 선착장에는 이미 많은 주민들이 방제복을 입고 가의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선착장에 인도한 어민이 “여기 봉사활동 하러 온 분들이구만”이라고 소개를 하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반기는 시선이 느껴진다. 방제복을 입은 모습들이 마치 반도체 공정 시 착용하는 ‘방진복’을 입은 것 같았다.
주민들을 따라 얼른 배에 올라탔다. 여기저기 자그마한 섬들이 보인다. 멀리서 봐도 기름에 오염된 부분이 검은 띠가 되어 눈에 확 들어온다. 한 달이나 지났으니 어느 정도 나아졌겠지라는 생각이 무참하게 깨지는 순간이다. 2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가의도 해안에 도착했다.
열심히 돌을닦는 동행한 기자 | 흡착포들 뒤로 보이는 주민들 |
◎ 무지개처럼 빛나는 바위들
기름에 절어 시커먼 바위와 사용한 흡착포를 모아둔 포대들 뒤로 아름다운 가의도의 모습이 보인다. 난생 처음 방문한 가의도를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주민들이 그나마 깨끗한 흡착포와 옷가지 등으로 바위를 닦기 시작했다. 흡착포 몇 장을 얼른 챙겨 한 아주머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위를 닦기 시작했다.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다. 잘 닦이지도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스펀지에 세제를 듬뿍 묻혀 닦아내고 싶었다.
날씨가 추워서 엉덩이가 시릴 즈음, 옆 아주머니가 흡착포 몇 장을 건네주시며 “엉덩이 시렵겠네, 이거 깔고 앉아요” 하시더니,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이내 다시 돌을 닦으시면서 다른 아주머니들과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신다.
잠시 쉬던 내 눈에 내 또래로 보이는 학생들 몇 명이 들어온다. 자원봉사자들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란다. 모두 근교 지역 주민들의 아들들이고 딸들이었다. 그들도 저마다 바다살리기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뒤에서 “학생, 이거 먹으면서 해” 하는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알사탕이다. 장갑 때문에 사탕 먹기가 곤란한 걸 아셨던지 아주머니가 직접 사탕을 까서 내 입에 넣어주신다. 알사탕 하나에 갑자기 힘이 솟는다.
자갈인 줄 알고 열심히 닦았는데 다시 보니 조개다. 땅을 조금 더 파보니 죽은 조개들이 계속 나왔다. 사람들도 경제적겵ㅍ탔岵막?피해를 많이 봤지만 이 조개들은 하나뿐인 생명을 빼앗긴 것이다. 사람들이 저지른 한 순간의 실수에 태안의 해변과 바다는 끙끙 앓고 있었다.
◎ 다음엔 살아있는 조개를 볼 수 있기를…
모래사장의 타르 덩어리들 |
그렇게 짧은 점심식사가 끝나고, 다시 돌을 닦기 시작했다. 갑자기 한 아저씨가 커피를 권하신다. “어디에서 오셨소?” “대구에서 왔습니다.” “멀리서들 오셨네, 커피 한 잔씩들 하시오.”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얼어있던 몸이 조금씩 녹는다.
커피 한 잔으로 몸을 추스린 후 잠시 일손을 놓고 해변가를 거닐었다. 조그맣고 까만 것들이 모래사장에 점처럼 박혀 있다. 타르덩어리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가의도의 모래사장을 본다면 흡사 점박이로 보일 것 같았다. 3시가 되자 주민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유람선 두 척이 해안가에 도착했다. 곧 밀물이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주민들은 깔고 앉던 흡착포에서 엉덩이를 뗀다. 내일을 기약하며 모두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결국 오늘의 방제작업이 끝나도록 취재는 하지 못했다. 주민들은 카메라만 보면 질색을 했다.
신나게 관광객들을 실어 날아야 할 유람선엔 기름때 묻은 방제복을 입은 사람들로 금새 넘쳐났다. 기름 묻은 돌들과 모래사장의 타르덩어리를 뒤로 한 채 배는 다시 육지로 향한다. 뒤를 돌아보니 홀로 남겨진 가의도는 그렇게 닦아냈건만 여전히 시커멓다. 가의도에는 아직 사람의 손을 거친 바위보다 사람의 손을 기다리는 바위들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오늘 가의도에서 보낸 나의 하루는 헛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손을 보탠다면 가의도는 반드시 원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넘실대는 가의도의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든다. 고맙다는 뜻일까? 아니면 다시 와달라는 뜻일까?
|